노무현 대통령에 관한 추억

Posted 2009. 6. 2. 15:30

노무현 대통령이 떠나던 날, 업무차 갔던 회의에서 예전부터 같이 일하던 지인들과 저녁을 먹게 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의 서거에 관한 이런 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잊고 있었던 노 대통령과의 추억이 하나 떠올랐다.

2004년 연말~2005년 초였다.
입사한지 얼마되지 않아 처음으로 하게 된 일이 개인정보보호기본법(가칭)을 제정하기 위한 초안을 잡는 일이었

그때 문재인 수석도 만나봤다.

는데, 당시 계속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관심이 커지고 있던 터라, 여러 곳에서 관심을 가지고 있는 일이었다.

참여정부에서도 전자정부 사업의 일환으로, 전자정부 사업의 안전성 확보를 위한 역점 과제로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법적 기반을 확보하기 위한 사업이었기 대문에 꽤 열심히, 그리고 사명감을 가지고 추진했던 일이기도 하다.

개인정보보호법에서 무엇보다 중요했던 내용 중 하나는, 이른바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칭)을 설립하는 일이었다. 개인정보보호에 관하여 공공/민간 부문을 통합해서 다루고 개인정보 침해사건에 대해 피해구제를 할 수 있는 기구로서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설립하고 운영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도 KISA에서 운영하는 개인정보분쟁조정위원회나 행정자치부(당시)에 개인정보심의위원회가 있긴 했지만, 법률상의 한계 때문에 모든 분야의 개인정보보호를 위한 기구를 설립하는 것이 무엇보다 핵심적인 사안이었다.

외국의 경우 Privacy Commissioner(개인정보보호위원회 또는 프라이버시보호위원회 등으로 해석했다) 등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고, 개인정보보호가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르며 정보거래 등 향후 국가경쟁력 강화에도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우리는 이 내용을 충분히 검토하고 정리하여 별도의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으로 정리했고, 이러한 내용으로 법안의 초안을 청와대로 보고했다. (물론 나는 보고 권한이 없었고 같이 일하는 다른 분이 문서를 기안하여 보고했고 나는 보고서를 만들고 뒤에서 돕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하지만, 청와대에서 돌아온 답변은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기능을 국가인권위원회에 포함시키도록 수정하라는 것이었다. 예상컨대, 한나라당 등 보수세력에서 계속 주장하던 "위원회 공화국"이라는 달갑지 않은 비판 때문이었을 것이다. 위원회가 너무 많다는 야당의 비판에 기존의 위원회마저 위태로운 판에 새로운 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이 부담되었을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이미 정부의 업무에 사사건건 토를 다는 국가인권위원회와 유사한 조직이 또 하나 생겨버리는 것에 대한 부담이었을 수 있다. 국가인권위가 생긴 이래, 국가의 행정행위에 대한 국가인권위의 감시가 증가하자 이에 대한 피로감을 느꼈던 공무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인지라(이는 지금도 사실이다) 또 하나의 인권위 수준의 조직이 등장하는 것에 대한 반발도 적지 않았으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나름 사명감을 가지고 일하던 우리로서는 개인정보보호위원회가 인권위의 한 부분으로 전락한다는 것도 인정하기 어려웠도, 외국의 사례에서도 인권위의 한 부분으로 시작한 예는 있지만, 개인정보의 특성상 결국에는 독립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굳이 인권위의 밑으로 들어가는 시행착오를 시도할 필요도 없다고 판단되어 수정을 거부(?)하고 다시 독립된 기관으로서의 개인정보보호위원회의 설립을 계속 주장했다.

일반적으로 다른 곳이었더면, 일개 연구원과 담당 국·과장이 감히 대통령의 의견에 반발하여 계속 동일한 내용의 보고를 올린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것이었다. 다른 대통령이었다면 이미 나는 다른 직업을 찾아봐야 했겠지.(한편으로는 대통령이 이런 보고서를 일일히 읽어봤을리도 만무하다고 생각했었다. 그저 청와대 보좌진들의 의견이겠지 했다. 그러면서 보좌진들을 바보라고 속으로 욕하기도 했었으니)

이렇게 두세 차례 듯을 굽히지 않고 계속된 보고를 올리던 어느날, 같이 일하던 바로 그 분이 이내 개인정보보호위원회를 인권위 소속으로 하는 것에 대해 검토를 하자고 했고 결국은 인권위에 그 기능을 넘겨주는 방향으로 정리하게 되었다. 나는 어짜피 잃을 게 없던 천둥벌거숭이 같은 놈이라 처음엔 계속 못한다, 안된다 하며 반발했지만, 이내 어쩔 수 없이 대통령의 뜻대로 개인정보보호기능을 인권위의 기능으로 정리하는 새 법안을 마련해야 했다.

그 일이 있은 후, 국회의 심의 과정과 국가인권위의 여러 사정에 의해 다시 총리실 소속으로, 독립된 기관으로 왔다갔다 하며 우여곡절을 격다가 17대 국회에서는 처리되지 못한 불운을 겪었지만, 이후 18대 국회에 들어와서 개인정보보호법은 현재 국회 계류중이다(지금의 법안은 17대 국회 당시에 이은영의원이 대표발의한 개인정보보호법과는 전혀 다른 법안이다. 지금의 개인정보보호법은 공공기관의 개인정보보호에 관한 법률을 대체하는 법률안으로 18대 국회에서 새로 마련된 것으로, 17대 국회의 이은영의원 대표발의안이나 당시 민주노동당의 노회찬 의원이 대표발의한 법안과는 전혀 다른 법안이다).

"뭐야? 이것들이..." 했을거다 아마..-_-



나중에 들은 뒷 이야기의 내용은 이러하다. 일반적으로(아니, 이런 이야기는 노무현 대통령에 대해서만 적용되고 그 전에는 이러한 적이 없었으므로 일반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여기서 일반적이라 함은 노무현에게 있어서는 일반적이란 뜻이고 다른 역대 정권에서는 거의 그런 적이 없다고 해도 무방할 것이다), 대통령에게 보고를 하고 그 내용에 관하여 대통령이 지시사항을 하달한 경우, 실무부서에서는 이를 반영하여 새로운 정책방향을 설정하고 그 실천계획을 수립하는 것이 보통이다. 하지만, 개인정보보호법의 예에서와 같이 실무자가 대통령의 결정에 반박하고 다시 동일한 내용의 보고를 올리는 일은 별로 없다(있기는 하다). 우리가(구체적으로 내 이름이 거론되거나 한 적은 없겠지만) 계속 대통령의 결심에 반(反)하는(?) 보고서를 올리자 대통령이 끝내는 대통령 결제 시스템(노무현은 전자결재를 선호했다)인 이지원 SYSTEM에 이러한 취지의 내용을 기재하고 결재했다고 한다.

실무자의 의견은 충분히 검토 했고, 그 뜻은 알겠으나, 정부정책상 어려움이 있으니 이번에는 대통령의 뜻을 따라 주기 바람

악플은 안 달았다고..

물론 정확한 내용은 아니지만 이러한 취지의 결재의견을 피력했다고 한다.

일견 별거 아닐 것 같은 이야기일 수 있지만, 일반 회사에서건, 아니면 특히 공직사회에 있어서 윗사람의 견해에 반대하는 보고서를 두어차례 들이댈(?) 수 있는 분위기는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불가능에 가깝다.
게다가 그 상대가 대통령이라면..

전부터 노사모임을 자임했고 노빠라고 자칭해 오던 나에게 이러한 일은 사실 약간 충격이었고(2004년 초까지 군대에서 행정장교를 했으니 더더욱 그러했다. 감히 상관의 의견에 반대라니) 대통령의 의견에 사사건건 토를 달아 반박했던 나도 참 대책없는(?) 놈이었구나 싶다. 직접 자기이름으로 보고서를 썼던 그 양반은 정말 얼마나 살 떨렸을까 싶기도 하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누군가, 어떤 실무자가, 이명박 대통령에게

"대운하건, 4대강 정비사업이건, 말도 안되는 사업이니 하면 안됩니다"라고 보고서를 올리면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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