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간 포스트가 없었던 것은, 개인적으로 바빴던 것이 제일 큰 이유이긴 했지만, 현재의 우리나라의 상황이 전혀 적응되지 않는다고 할 정도의 패닉상태이기 때문이다.

대통령이라는 이름의 군주(君主)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지 이달 25일로 꼭 1년이 된다. 그 1년간 우리는 대운하와 쇠고기와 용산과 미국의 오바마와 널뛰는 환율에 참 많이 울고 웃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가 아직도 이러한 많은 순간순간의 처참함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것은 대통령이 아닌 어떤 군주를 모시고 있다는 그 황량한 의식 때문이리라 생각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 부터 나온다고 하는 헌법의 거룩한 선언은 모든 국민은 대선 때 던진 선거권의 총합에 구속된다는 단순한 계산적 논리로 격하되었고,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라는 선언 역시 대한민국의 정체(政體)와 국체(國體)만을 의미하는 저급한 70년대식의 사전적 의미로 치부 당했다.


용산 참사. 과연 책임 소재가 문제일까?

용산참사는 당연히 그 진상이 파악되고 책임자는 처벌되어야 하는 문제다. 하지만, 결코 책임자는 처벌되지 않을 것이다. 그 최족적 책임자는 국민이거나, 또는 그 국민을 속인 조중동이거나, 또는 그 조중동과 공모한 이명박이니까. 아무것도 모른 채 그들에게 표라는 권력을 쏟아준 국민은 사기당한 피해자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들이 왜 사기에 빠지게 되었는지를 본다면 우리는 결코 조중동과 이명박을 용서하여서는 안된다. 그러면서도 끝끝내 이명박은 용서되겠지만.

문제의 본질은 어쩌면 경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경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전세계적인 경제위기에서 중요한 문제가 경제가 문제야 라고 했던 클린턴의 말은 우리 시대에 전혀 통용되지 않는 진리아닌 진리라는 것이 문제다. 횡성수설 하는 것인지 몰라 다시 첨언 하자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 라고 했던 클린턴의 말은 우리 사회가 바라볼 이상향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경제 대통령이라고 했던 이명박의 선택은 매우 무책임한 선택이었다. 우리가 중요시했어야 하는 문제는 경제를 왜 우리가 살려야 하는 문제였던 것이다. 살아남기위해서, 살기 위해서 경제를 살려야 한다는 좀 더 진보된 시각은 멀리한 채, 그저 경제만 살리면 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바로 문제였다.

우리가 경제를 꼭 살려야 하고, 주가를 3000까지 보내야 하는 것은, 우리가 살아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내가 죽거 네가 산다면, 네가 죽고서 내가 산다면 하는 제로섬게임으로 경제를 이해했고, 너가 죽더라도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는 경쟁과 짖밟음으로 우리 사회를 지탱하려 했다.

물론 경쟁이 절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경쟁은 필요한 수단으로서 조금씩 가미되어야 하는 것이지,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의 말처럼 경쟁이 우리의 인생을 좌우할 수단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들의 죽음이나, 미네르바에 대한 부당한 처벌에 대해 책임지지 않을 것이고, 이러한 것을 단지 우리 모두의 잘못이라고 양비론으로 몰고가는 것은 분명 위험한 일이나, 우리가 앞으로 이러한 민주주의와 사회안전망의 위기를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에 대하여서는 정말 심각한 사회적 고민을 필요로 한다.

2009년 어쩌면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사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 경찰에게 주어진 불법이라는 판단의 잣대는 부러졌다. 불법을 불법으로 막는 것이 정당화 되는 사회는 결코 민주주의 국가는 아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준 것은 불법을 불법으로 막으라는 무적의 권력이 아니라, 불법 역시 합법으로 대처해야 한다고 하는 정의의 권력이었으니까.

권력을 준 자가 그 권력이 정의롭지 못하게 사용되었을 때 그 권력을 빼앗는 것이  바로 정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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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주말 내내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는 서울은, 월요일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을 되찾았다. 항상 그렇지만. 주말에 외출했던 시민들은 불편했다고 한다. 시위 때문에. 휴일은 시위로 몸살을 앓고, 교통은 막히고....

언제나 그랬지만 시민들은 분노 했다. 시위 때문에 교통이 막힌다고.

시위를 왜 하냐, 시위를 좀 조용히 하면 안되겠느냐, 불법시위 근절하라. 건전한 시위문화의 정착..... 언제나 언론과 공권력이 이야기 하는 것이고 우리(나는 빼고)들도 원하는 것이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왜일까. 시위는 왜 하는 것이고, 데모 때문에 불편한 이 생활은 언제까지 해야 할까.

시위란 뭘까.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봤다. 시위라는 항목에는 없고, 데먼스트레이션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데먼스트레이션(demonstration)

요약 : 특정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다수인이 벌이는 집단행동

본문 :
약칭하여 데모라고도 하며, 시위 ·시위운동 ·시위행동이라고 번역한다. 개인이나 조직의 위력을 보이는 모든 시위행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시위를 위한 행진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요구사항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슬로건을 외치면서 공개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위력을 지배자에게 과시하는 한편,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다. 요컨대, 데모는 집단의사의 형성과 표현 및 그것의 전달과 실현 등의 기능을 지닌다.


시위는 개인 또는 조직이 위력으로서 자신의 입장과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시위가 타인의 교통 또는 생활을 방해한다는데에 있다.


왜 시위는 우리를 방해하는가?

현대사회의 발전에 따라 개인과 집단의 국가권력에 대한 요구와 투쟁은 증가한다. 그러한 요구가 정형화 된 것이 바로 민원이다. 이러한 민원은 단순한 증명서 등의 발급부터 각종 인허가의 요청 등으로 세분화되고 이러한 민원은 일정한 법률행위 또는 사실행위로 표현되어서 행정청에 전달되고 행정청의 행정행위에 따라 그 신청 또는 신고에 대한 일정한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나 각종 민원의 처리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민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정치적 의사의 요구 또는 주장 그리고 일반적 또는 특정의 국가정책에 대한 반대의 의사표시 등에 관하여는 행정청의 민원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의사표시의 표출방법과 그 요구의 주장방법이 바로 시위이다.

시위는 타인으로 하여금 위력을, 세력을 과시함으로서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관철시키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1인의 위력 또는 세력보다는 다수, 군중의 위력으로서 이를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은 시위의 기본적인 속성에 속한다. 특히 사회의 기득권층이 아닌 소외계층 또는 소수자들의 경우 최대한의 인원을 동원하여 그들의 주장을 표시함으로서 다수의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 또는 기득권으로 하여금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옳지 못함을 인정케 하여 이를 관철시키는 것은 시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며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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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시위를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의 몇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정당한 주장과 목적
2. 최대 다수의 동원
3. 집권층 또는 권력층에 대한 최대한의 위협
4. 주장되는 의견과 정책의 현실반영

이 4가지 는 시위의 목적이며 수단 또 동시에 목적으로서 기능한다.

이 중에서 2번의 경우 자신의 위력을 보임을 목적으로 하고, 3번의 경우 이 위협의 효율적인 작용을 목적으로 한다. 문제는 이른바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교통의 혼잡 등 여러 타인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찌보면 필수불가결한 시위의 목적이 된다.

앞서 정리한 몇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다수의 위력으로서 권력에 대한 최대한의 위협을 이끌어내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위의 계속이 사회혼란과 국론 분열로 연결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권력의 자각을 요구한다.

권력의 자각. 즉 시위대의 주장과 요구가 소수로서의 주장과 요구가 아닌 듣고 이를 반영할 가치있는 주장이라는 사실을 자각케 하여 기득권의 불편을 감수하고 이를 반영해야할 현실적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이 시위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위는 그 요구 관철의 수단으로서 반드시 타인의 불편을 전제로 한다.


즉, 시위란, 타인을 불편하게 하여 그 불편한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서 일반대중 및 권력으로 하여금 이 시위의 정당성 및 시위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이를 위하여 타인의 불편을 초래하는 것을 그 수단으로 한다. 현대 사회에서 교통과 물류의 정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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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시위는 당연히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다.

시위에 있어 시민의 불편은 당연하고, 이는 시위가 가져야할 당연한 수단이며, 시위의 목적 또한 이러한 불편을 담보로 한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하는 시위는 아이러니 하지만, 현재의 불편을 담보하여야 한다.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시위는 수단을 상실한 목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1인 시위 등 시민의 불편을 최대한 적게하는 시위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시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가장 유용한 수단은 시위대가 시민들로 하여금 그 시위를 통한 불편을 느끼도록 하고 이를 통하여 시위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시위를 통한 교통불편을 강조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그 시위의 내용과 목적으로부터 괴리되게 하고 단지 불편을 주기위한 악의적인 행위로 매도하여 시위대의 주장따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민주적이지 못한 시민들을 만들어낸 지금의 시위문화를 만들어낸 권력과 언론이 과연 우리에게 건전한 시위문화를 위하여 붑법시위를 엄단한다는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시위대의 악의적 행동은 물론 시민들의 반발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위대의 시위 목적의 관철을 위한 시위 본질적 행위인 교통불편의 초래를 악의적으로 보도하여 시위대와 시민을 분리, 이간시키는 권력과 언론은 시위문화의 건전화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시위는 발전한다.

그러나 시위에 의한 불편은 발전하지 않는다. 아니, 발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위에 의한 불편은 시위의 목적달성을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다. 시위는 당연히 우리의 불편을 수단으로 하고 그것이야 말로 시위의 가장 큰 힘이다.


시위때문에 불편하다면,

왜 그 시위가 일어났는지를 생각하여 그것이 옳은 주장인지, 그렇지 않은 주장인지를 따지고 그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어떠한 수단이 존재하는지를 고려하여 현재의 시위상태가 올바른 요구의 주장방법인지가 시위의 불법성을 따지는 근거가 되어야 하며, 이 시위가 주는 불편은 시민이 짊어져야 할 당연한 민주주의의 대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부과된 민주주의를 향한 숙제는 그들의 피가 아니라, 그들의 인내와 참여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피를 요구하지만, 그건 우리 같은 민초 또는 시민들에게는 과분한 영웅의 칭호일 뿐이다. 우리에게 지워진 숙제는, 누군가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릴 때 이를 인내하고 바라보며 우리의 불편이 민주주의를 향한 피의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이번 주말동안 언론은 역시, 주말내내 이어진 시위에 대한 불평불만의 성토장이었다.

시위는 당신에게 불편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건전한 시위문화에는 원활한 교통정책 따위는 없다.


시위하고 데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