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일주일의 노동을 마감하는 22일 금요일 저녁. 아내와 TV를 보다가 경악스러운 프로그램을 하나 보게 되었다. KBS에서 방영하는 스펀지2.0 이라는 프로그램. 워낙 오래된(?) 프로그램이고, 아마도(예상컨대) 시청률 역시 만만하게 나오는 프로그램이니 그다지 주목받거나 하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나 역시 이런 류의 프로그램을 즐겨보지는 않으니, 그 시간대에 집에 있었다는 것이 우연일 뿐, 그다지 눈에 힘 주고 보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우리 대통령의 사생활은 깨끗할까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스펀지를 보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코너가 있었다. '무심코'라고 한 것 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뒤통수 맞은 기분이 이럴까. 그날의 코너를 보다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의 사생활"이라는 끔찍한 짓을 시사 교양 프로그램도 아닌 오락 프로그램에서 돌리고 있다니.

정보와 지식이 합쳐진 고품격 정보 버라이어티라는 소개가 무색하게도, 마치 전두환 시절의 3S 정책 처럼 우민화 정책에 한 몫하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우스운 걱정이 앞섰다.

그 날 대통령의 사생활 코너에서는 임기중에 음반을 발매한 인도네시아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자국 축구 1부리그에서 활약중인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대통령, 수중 각료회의를 연 '나시드' 몰디브 대통령 등등이 소개되었다. 마지막에 나온 것은 위의 기사에 따르면 전직 역도 금메달리스트라는 나우루의 '마르쿠스'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은 보지 못했고, (사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는데, 왜 못봤는지 모르겠다. 편집인가...) 마지막에 소개된 것은 쌍동이 정치인으로 유명한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과 총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런 저전 잡설은 냅다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1.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형제지간이다. 그러니까 한 집안의 두 아들이 둘 다 정치인이다. 이게 사생활이냐?

2. 형제가 둘다 집권자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안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만한 능력이 있을 때 얘기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 없는 소리다.

3. 2번과 상관이 없다고 할지 모르겠으나, 혹시나 상득이 형이랑 명박이 동생을 결부지으려는 것이라면 제발 제발 참아주길.

4. 뜬금없는 대통령 스토리는 뭔가. 우리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이나 몰디브 대통령에 대한 스토리는 관심이 없다.


언론이 정권에 장악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는 이미 우리는 5공에서 봤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 난리치는 국민이다. 땡전뉴스도 봤고, 그 전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위대한 영도력 아래서 제한된 TV와 신문으로 보며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신문지로 덕지덕지 발려진 그 터널을 달려왔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이 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정권이 언론의 장악을 위해 그 난리를 치는 것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니까. 그런데, 뉴스에서 이렇게 나불나불 떠들어 대면서 우리가 언론 장악했어요 하는 짓은 너무 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식상했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명박 정권에서는 오락프로그램을 장악한다. 이미 무한도전이나 빵꾸똥꾸 사건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시사프로그램의 장악이 어렵다는 사실(아마도 너무 눈에 빤히 보인다는 점 때문이겠지)을 간파하신 이 정권께서는 오락프로그램 건드신다.


사실. 아마도 이명박 정부에서는 오락프로그램에 대해 일언반구 논평하실 게 없으실 거다. 장악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동네 깡패들 중에서 가장 하수들이 하는 짓이 바로 삥뜯기다. 지나가는 꼬마 불러다가 삥뜯어내시는게 주 업무요 그게 하수다. 이런 하수 급의 양아치들이 성장하여 동네를 완전 장악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알아서 바친다' 동네 꼬마들이 알아서 보호비 명목으로, 세금 처럼 모아서 바친다. 물론 오른팔 정도 되는 꼬봉이 그 돈 수거해서 가져온다. 재미있는 것은 이럴 경우에 경찰도 별로 어찌 할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돈을 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때린 것도 아니고, 살살 꼬드긴 것도 아니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어쩌라고? 지들이 주는데 어쩌란 말이냐? 날 잡아잡수 하며 스스로 껍질 까고 있는 쏘세지 안먹으라고?

장미란 앞에서 사과박스 들다 허리부러지는 소리하고 있네.
알아서 알아서 귤껍질 까고 입에 넣어주는데 안먹는 놈이 병신이다. 방송도 똑같다.

스펀지는 그러고 싶은 의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알았으니까 닥치고, 왜 하필이면, 대통령의 인간적인 모습을 소개하면서 왜 형이랑 동생이랑 둘 다 정치하고 있는 그 동네 얘기 해 주시느냔 말이다. 그건 사생활도 아니고, 그나라의 정치상황이다. 우리 동네 상득이형과 명박이 동생은 전혀 딴판이니까 웃기지 말자. 상득이 형님께서는 동생이 대통령이라 물러나려고 하신 분이시던가? 못나간다고 사지 뻗어 버티시던 분이다. 아직도 건재하시고 말이다. 그분은 상왕(上王)이시니까.

언론 장악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언론이 알아서 기어다니는 짓이다. 무서워서 퍼떡 드러누워 배 내밀고 이렇게 기어다니는 언론. 그런 언론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말해주마.


10년 후 20년 후 우리 언론이 이명박 정권에 살랑거리는 것이 옳지 못했다고 누군가 일갈할 때, 지금 스펀지를 만들던 누가 그것을 반성할까. 나는 안그랬어요 하며 반성하지 못하고 우리의 친일파 청산 처럼 역사에 맞긴다느니 어쩔 수 없었다느니 하며 개거품 물고 변명하며 나는 죄없네 하고 빠져나갈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왜곡되어버린 우리의 현대사를 전달하지 못한 책임은 이명박에게 짊어지게 한 채, 자신을의 손을 씻으며 예수를 죽였던 본디오 빌라도 처럼 그들은 발을 뺄 것이다. 그 언젠가 친일파 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언론을 움직이는 원로로 남을 것이고 우리는 그런 언론인들의 후예를 계속해서 우리의 언론이라 믿고 의지해야 하는 불행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알아서 기는 소극적이지도 못한 비열한 배신자들.

나서서 때리지도 못하는 비겁한 박쥐들

우리 언론은 스스로 그렇게 되려는 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벌써 그렇게 되었거나.



(덧붙이자면, 앞의 신문에서의 프로그램 내용과 실제 방영내용이 다른 이유는 아마도, 이상득과 이명박을 위한 막판 뒤집기 쑈였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에 흘리기는, 아니 미리 편집된 내용에서는 그런 얘기 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 쌍동이라는게 뭐 그리 사생활이고 인간적이라고- 막판 경영진에서는 뭔가 꼬리를 치고 싶었을지 모른다. 더럽게도 말이다)



지금까지 내가 한 말은 결단코

"아니면 말고" 다.

나도 살아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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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블로그에 함부로 글쓰기가 겁난다는 분들이 많다. 그래도 어쩌랴, 남자는 고백의 동물이요, 어쩔 수 없이 지껄이는 것을 업보로 살아온 블로거들이 침묵하는 것도 그 모냥이 빠지는 것을.

요즘 우리나라 좋은나라 돌아가는 꼴 보니 가관이다. 혹자는 김대중이 아직도 죽지 않고 떠들어대는 꼴이 보기 싫다고 하더만, 내가 보기엔 그렇지 않다. 아니 그럴 수 없다.
죽을 수가 없는거다.

나라꼴 아작나는 꼬락서니 보면서 우향우를 하다못해 팽그르 돌아버리는 내 나라 보면서, 노무현도 떠난 마당에, 유시민과 한명숙은 약해 빠졌고, 이해찬은 와불이 되어버리는 이 상황에 그 노구를 이끌고 가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으신 거겠지.


이 와중에 신문을 보면 이상하지만,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또 안돌아가는 머리로 생각해 보니,
이건 충분히, 한나라당도 충분히, 알 수 있을 법한, 그런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더란 말이다.


1. 천성관 검찰총장 후보자. 의혹이 꼬리를 물다못해 아주 줄줄이 비엔나 같은 꼴인데, 그들도 알 거다. 부적절한 인사인 것을 하지만 대안이 없는게 그들 탓이랴. 그 동네에서 아무리 잘 뽑아봤자 청렴한 강직한 대쪽이 나올리도 없고 설사 나온다고 해 봤자 도움 안된다는거 아니까, "그동안의 공직생활 동안 별로 벌어두질 못해서 14억"인 재산을 둔 그를 버릴 수는 없다는 것도 잘 알고 있으리라. 리스차량이 뭐 대수고 28억 아파트가 대수겠는가. 국세청장 후보자는 말하고 싶지도 않고, 알지만 어쩔 수없는 내 마음 나도 몰라

2. 미디어법 통과 시킨다고 바로바로 조선일보가 치고들어올 수도 없고, (언젠간 들어오겠지만) 그렇다고 이 언론이라는 바닥에서 자존심으로 뭉친 언론인들이 고분해 질리도 없다는거. 그들도 안다 한나라당도 안다. 다 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돌아서니 조중동이요 앞서자니 노종면인데. 30년 절친 조중동이랑 싸우고 돌아서서 SBS 절친노트 출연을 약속하느니 김구라 상판 보는 것이 그보다 더 괴로울리 없고, 2만개 일자리는 커녕 MBC앞에 포장마차도 중소기업 사장님이니 한두자리 빼먹으니 괜찮을 것 같고... 알기는 아는데 물러서자니 청기와집 창고에 쥐새끼 한마리가 곳간을 다 비워 남겨줄게 없다하니 답답하기도 하겠지. 잡지도 못할, 아니, 당장은 잡지도 못할 언론 길들이기 보다는 대충 얼기설기 묶어 가는게 한 3년은 나을 것도 같은데, 뒤에 청기와 들어가실 독재자의 따님께서 눈알을 부라리니 당장 못끝내면 다음 국회는 남의 잔치라. 알지만 어쩔 수 없는 내마음 당신 곁으로

4. 때마침 장마인지 집중호우인지는 4대강을 정비하여 홍수를 예방해야 하는 필요성을 강조하고 싶은데, 물에 잠기니까 잠수교니, 안잠기면 그게 잠수교냐 하는 말도 안되는 말장난 부터, 이미 자전거길이라고 광고까지 다 해놨는데, 잠겨버린 자전거길은 또 뭔지. 하나라당 애들도 알고 있을거다. 4대강이고 나발이고 그다지 몇년 도움 안될거라는 사실을 그런데 어쩌겠냐. 사는게 삽질이요 먹는게 토목인데, 안할 수도 없고. 그러니 별수 있겠냐 엄마야 누나야 강변살자하는 노래보다 더 무서운 강변에 땅사자를 몸소 실천한지 어언 몇년이던가. 이제는 빼도박도 못하고 대선공약이 恐藥이 될 때까지 밀어붙여야 할 것이 아니겠는가. 하회마을 휘휘돌아가는 강물에 논개처럼 뛰어드는 한이 있더라도 그나마 살아갈 희망인데, 강을 뚫든, 강물을 마시건 결국 물먹는건 매한가지니 서해페리 강물에 띄우기 전에 어쩔 수없이 나라를 아작내야 하는 심정이야 말해 뭣하겠냔 말이다. 환경이 죽어자빠지고 도마뱀이 언제 또 소송을 걸어올지 모르지만 아무튼 알지만 어쩔 수 없는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사실 그 친구들도 다 알고는 있을 것이다.

차마 말을 못해서 그렇지.

알지만 어쩔 수 없는

아직 못다한 노래들.



이쯤에서 들어보자.

한나라당이 손담비와 함께 부릅니다.

"미쳤어"


지엄하신 저작권님 덕분에 니들이 직접 찾아 들으셔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땡큐



덧) 3번이 빠졌다는 사실, 한나라당도 알 수 있을 법한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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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의 정치 이슈들, 언론 이야기

6, YTN, KBS 사태 촉발

2008년에 언론계는 핵폭탄을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엄청난 일을 겪었다. 가장 먼저 발생한 일은 물론, 최시중씨의 방송통싱위원히 위원장 취임이었다. 최시중씨는 알려진대로,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전 정권에서 정보통신부의 일부 기능이 더해진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기관으로, 우리나라 전체 방송과 통신에 대한 주무부처다. 물론 방송통신위원회는 독립기관으로 대통령 직속기관(다른 정부부처는 국무총리가 통활한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행정부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 기능한다.

물론 최시중씨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고 그 분야의 전문가인가의 문제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언론이나 사회에서 문제삼던 것은 그가 이명박의 최측근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정권을 잡은 쪽에서는 자기편의 사람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나, 최시중씨가 인

YTN 사장 구본홍씨와 노조위언장 노종면씨

수위 시절부터 피력한 언론관이나 방송/통신에 대한 시각 등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최시중씨의 인선에 대해서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기 위한 첫 시도라고 보고 있었다. 최시중씨의 위원장 취임 후 발 드러난 사건이 바로 구본홍씨의 YTN 사장 임명이었다.

구본홍씨는 MBC의 기자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로, 인수위 시절부터 자문위원으로서 활동해 오다가 정부 출범 후 YTN의 사자으로 내정되었다. 이에 YTN은 보도 중심의 케이블 방송국에 친정권적이고 이른바 정권의 고소영 라인에 속하는 구본홍씨의 사장취임을 극렬하게 반대해왔다. YTN은 민영 방송사이기는 하지만, 오직 뉴스만을 보도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특징을 가진다. 이 YTN의 대주주는 한전의 자회사인 KDI, 한국마사회, KT&G 등으로, 대부분 정부가 인사권 등을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회사들로, 실질적인 대주주는 정부라고 할 수 있다. YTN사태의 본질은 그러한 특징을 가진 회사의 경영진이 과연 정부에 대해 얼마나 독립적인 온론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정권들이 해 왔던 실태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정부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는 언론아닌 언론으로 YTN이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충분히 할 수 밖에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오게 된다.

YTN노조는 이에 따라 사장 선임을 위한 주주총회의 저지, 구본홍씨의 출근 저지 투쟁을 계속 해 왔으나, 갑작스럽게 진행된 주주총회에서 주주이기도 한 노동조합의 출입이 저지된 상태에서 구본홍씨는 사장에 취임하고 이어 노조집행부를 대거 해직하고 징계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정부의 정책 등에 대한 비판 기능을 담당하던 돌발영상 등을 담당하던 제작인에 대한 징계를 가함으로서 노조와의 갈등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이에 따라 YTN사태는 아직까지도 그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YTN문제는 순수 정치적인 문제가 이슈가 된 것이라면, 뒤이어 발생한 KBS 사태는 현행법상의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KBS의 사장이었던 정연주씨는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이었다. KBS는 공영방송으로, 정부가 출자해 만든 방송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반 언론사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이에 이명박정부에서는 "공영방송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연주 사장의 퇴임을 종용하였다. 즉, 정권이 바뀌면 정부의 소식을 전하는 언론 역시 정권에 따라변화하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정연주 등 현 KBS는 반발했고, 정연주 사장의 임기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권은 현 방송법의 규정을 들어 그를 해임하고자 하였으나, 현 방송법에서는 한국방송공사(KBS)의 사장을 대통령이 "임명(任命)"한다고 되어있어 그 해석이 논란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해임권을 포함하는 임면(任免)으로 해석한데 반

무한도적 제작진도 파업한다고 한다.

해 대다수의 법률학자들은 해임권이 포함된 권한의 경우 이를 임면으로 명시하여야 한다고 함으로서 정연주 사장의 해임절차에 대한 적법성이 논란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임면권의 존부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하여 감사원으로 하여금 KBS를 특별감사토록 하여 정권의 입맛대로 감사원과 정부 소속 공공기관을 움직인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정연주 사장의 퇴임 이후, 시사투나잇 등의 시사프로그램에 대한 정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지는 등 정권의 필요에 따른 언론 개편이라는 시나리오가 전명적으로 시작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와중에 MBC피디수첩에 대한 탄압이나 EBS 지식채널e 피디의 강제 보직이동 등 정권의 언론 장악을 위한 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정부의 언론 장악 시도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해결의 기미가 안보이고 있다. 각 언론사 사장을 자기사람으로 임명하여 언론 경영권을 장악한데 이어, 최근에는 방송법을 개정하여 대기업과 조선일보 등 신문사의 방송 겸업을 허용하기 위한 법률의 개정을 시도하자, MBC를 중심으로 방송사의 노조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고 총파업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오늘도 이어지는 2008년의 정치계 이모저모

어제 1,2,3번의 사건들이 현제 기득권층의 집권에 따른 권력기반 조성에 관한 사건들이었다면, 오늘 이어질 이야기는 그에 대항하는 反정권적 사건들이 주를 이룰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총선 이야기는 하고 지나가야겠지.

누구나 이번 한해의 최고의 국내 사건으로는 (정치적으로마 본다면) 촛불집회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번해에 있었던 총선의 결과는 정말 많은 시사점을 준다.


4. 제18대 총선 - 한나라당의 승리.

4월에 있었던 18대 총선은 매우 기형적인 총선이었다고 기억될 것이다. 여러가지 변수가 많이 있었는데, 여러명의 대선 탈락자-이인제, 권영길, 문국현, 손학규, 박근혜, 이회창, 등등-의 출마도 마찬가지였고, 민노당에서 갈려 나온 진보신당의 원내진출이 가능할지에 대한 여러가지 전망이 나왔다. 무엇보다,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전국구 스타들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원내진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또한 이른바 대운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물론, 이재오 등 친이명박 계열의 심판은 물론 박근혜의 친박연대라는 희안한 정당의 출연 또한 엄청난 변수로 작용했다.

18대 총선 결과

결과적으로는, 민노당의 반토막, 한나라당의 완승(압승까지는 아니었다고 해도), 민주당의 턱걸이, 진보신당의 참패, 자유선진당의 선전, 친박연대의 반란으로 정리된 총선결과는 매우 암울한 것이었으나, 이방호, 이재오의 낙선과 진보신당이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 친박연대와 창조한국당의 선거자금관련 비리 등의 문제를 안고 출범한 18대 국회는 개원 초부터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한선교 등 탈당파와 친박연대는 일괄적인 한나라당 복귀를 꿈꾸었고, 당선자 숫자에서 압승이 아닌 완승으로 만족해야 하는 한나라당 역시 그들을 함부로 내 칠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정례 등 일부 당선자들의 비리까지 안고 가기에는 너무 부담이 크다는 사실 때문에 아직도 이들의 원만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상컨대는, 18대 총선선거사범에 대한 사법처리가 완결되는 2009년 1월에는 어느정도 정리된 상태에서 일괄적인 타협이나 정계 재편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된다.

이번 총선의 큰 의미는, '돈선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전의 선거에서와 같이, 후보자가 뿌리는 그런 돈선거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 돈선거의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시를 중심으로 나타난 이른바 뉴타운 선거이다. 이 뉴타운 선거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노원구의 경우, 정치 신인인 홍정욱씨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 외에도 최대 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동작구에서 정몽준이 손학규를 낙선시켰고,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는 대운하 공약이 어느정도 먹혀들어간 선거라고 생각된다(특히 영남지역의 대운하 후보지에서 더욱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 어느정도 세계적 경제불황이 점쳐지고, 서브프라임 이후 발생한 이른바 일본 엔화의 엔케리는 경제적 부담감을 증폭시켰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부동산 가격도 점차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강해졌다. 이에 역대 정부는 겉으로는 부동산 거품의 제거나 부동산값 안정을 항상 경제목표로 제시하여왔으나, 이명박정부는 노골적으로 부동산 가격 하락세의 진정, 그리고 나아가 부동산 경기부양을 통한 경제 성장을 내세웠다. 비록 정책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외연상으로도 확연히 역대 정권과는 반대로 부동산 가격의 거품제거를 위한 노력은 없어졌다.

이러한 경제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믿고 있는 국민들 역시 민주화의 여부나 국가사회의 진보적 가치창출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투자 등등의 재테크를 통해 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욕망이 충만했고, 이러한 결과로 18대 총선은 돈선거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결과적으로는 모두 부동산과 주가에 선거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정도로 집값상승을 주도할 수 있는 후보가 어디서나 유리한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계속 종합부동산세에 대한 위헌론이 급부상했으며, 이에 따라 정책 선거가 아닌 부동산 선거로 전락해 버렸다.

이재오와 이방호



18대 총선결과에서 진보 계열의 참패에 대해서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역대정권에서의 실정을 그 원인으로 찾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우세했다. 10년간의 진보의 집권기동안의 정치실험에서 국민이 만족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전반적으로 우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진보진영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민주화가 진전되고 인권 자유 등의 문제가 많이 해결되면서 유권자들의 관심이 실생활과 관련된 사항으로 옮아간 것이지 국민 대다수가 보수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10년동안의 정치실험에서도 바꾸지 못한 보수진영의 확고한 기득권지향성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생존력의 결과였다고 본다. 또한 앞서 계속 설명한 바와 같이, 남들 집값은 다 떨어져도 내 집값은 올라야 한다는 개인적인 욕망의 분출이 낳은 기형적인 총선결과였다.


5. 촛불문화제에서 촛불집회로, 그리고 촛불시위로.

2008년 대한민국의 최대 사건은 역시 5월과 6월로 이어지는 촛불집회였다. 특히 6월 10일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에서 발생한 6.10항쟁 기념일의 촛불집회는 연인원 100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참여하며 최대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시민의 재탄생을 가져오는 성과를 낳았다.

5월 초, 몇명의 여고생들이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진 촛불집회는 이른바 광우병 쇠고기 수입 결정에 따른 반발에 따라 일어났다. 대통령 취임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30개월이상의 미국산 소를 수입하기로 미국측과 합의하면서,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광우병에 걸렸을 수 있는 위험한 쇠고기를 국민에게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수입이 결정되자, 정치권은 물론 사회 각 분야의 반박이 이어졌고, 이에 대선에서는 선거권 조차 없었던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계천에서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게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초기에는 어린 고등학생이나 청년을 중심으로 시작된 촛불집히는 날이 거듭될수록 많은 인원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경찰은 강경진압을 통해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이미 새로운 시위아닌 시위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21세기형 web2.0세대인 젊은 학

6월10일 등장한 "명박산성"

생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제적인 동원이나 선동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촛불 시위대는 그 중심세력이나 배후 조종 단체 없이 움직인 것이었으므로 경찰의 입장에서는 매우 통제하기 어려운 세력이었다. 더군다나, 쇠고기 이후 얻어진 힘을 바탕으로 시민들은 각 분야에 대한 새로운 이슈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정부조직개편이나 인권위원회의 축소 등 정부변혁에 대한 불만은 물론, 대운하와 747 및 FTA 등 대통령의 핵심 선거공약에 대한 반대의견이 자유롭게 쏟아져 나왔고, 결찰의 강경한 반인권적 시위진압에 관한 불만도 함께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첨단의 인터넷 환경은 시위현장을 생중계로 전국에 내보내며 생생한 목소리를 주류언론이 아닌 개인언론의 힘을 빌어 전달하기 시작했고, 각종 포털 사이트는 이들의 토론장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와중에 특히 다음의 아고라는 이른바 토론의 성지로 급부상했고, 급기야는 국회 청문회자리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류 토론장으로 급부상했다. 지난 대선 당시 네이버는 평정되었다는 한나라당의 발언 영향도 있었던 만큼, 이번에는 다음이 네이버를 누르고 인터넷 토론 메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촛불집회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아고라의 미네르바가 등장하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촛불집회는 비록 가시적인 성과(쇠고기 수입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나,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 것이다.

첫째, 선거권이 없거나 정치에 무관심한 어린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하여 시작되고,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알려진 이른바 아줌마 부대와 각종 쓰레기들의 집합처라고만 인식되어져 왔던 네티즌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어 시민으로부터의 계몽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기존의 시위와 20여년 전의 6월 항쟁은 일부의 엘리트와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여러 무리들이 시민의 침묵과 지지 속에 이루어낸 민주화라면, 2008

광화문에 운집한 시민들

년 촛불집회는 다수 민중의 각성에서 부터 시작된 이른바 "생활정치"로서의 민주화에 대한 시발점을 형성했다. 정치권의 행동이나 정권의 변화가 가져오는 생활의 변화에 둔감했던 것이 20여년 전의 민중이었다면, 쇠고기로부터 시작된 촛불시위는 그러한 작은 사건에 대한 민중 스스로의 자각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노무현정권에서부터 학습된 정권에 대한 반대 진영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실생활에서 적용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자발적인 정화의 시도였다. 기존의 시위에서 탈피하여 수십개의 구심점이 존재한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민중이 스스로 자성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더 한층 성숙된 정치의식가 함께 자정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끊임없는 토론이 이루어지며 스스로 그목소리의 방향성과 행동의 지향점을 설정하고 이를 위하여 자제와 협력을 통한 공공선(共同善)의 구현을 위한 양보화 타협이 이루어졌다. 첫번째의 성과가 시민적 합의의 도출방식으로서의 하부계몽과 상향식의 의견표출이었다면, 이 두번째의 성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과는 그러한 공동선의 실현에서의 샐활로서의 민주주의의 현실화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구심점이나 중심된 조직은 없었다고 하나, 이러한 점이 민주적 합의와 행동의 다양화를 가속시키는 촉발제가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름대로의 판단과 논리로 무장한 시민세력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며 계속된 마찰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끌어내며 상생의 길을 찾아갔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인터넷에서 두드러졌다. 촛불집회 어디에서건 "토론의 성지 아고라"의 깃발이 나부끼며 사람들을 인도했고, 아고라를 비롯한 인터넷은 토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 와중에 많은 악플이나 악의적 글들도 올라왔으나, 시민사회의 주류는 이러한 악플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정화하며 민주주의의 참 가치를 실현하는데 주력했다.
세번째로는 언론 운동의 새로운 변화다. 촛불집회의 막바지에 나타난 조중동 등 기존의 보수언론에 반대하는 시민세력은 스스로 언론이 되어 블로그를 통한 사실의 추적과 분석을 효과적으로 이룩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미니홈피와 블로그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기장이나 고백의 공간이 아닌 개인을 중심으로한 독립언론의 형태로 발전하며 기존 언론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다음의 블로거 뉴스나 올블로그, 블로그코리아 등 메타들로그를 통하여 새로운 언론으로서의 개인언론이 탄생하고 기존의 언론이 하지 못한 언론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 이외에도 많은 이슈들이 촛불집회를 통해서 토론되며 이룩되어졌고 이러한 현상은 2008년의 대한민국을 정의하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촛불집회의 가장 큰 성과는, 첫째, 아래로부터의 자각과, 둘째, 생활정치인의 등장, 셋째는 21세기형 언론기능의 완성이었다.


시사투나잇이 사라진 자리에 어떤 프로그램이 들어왔다. 이름은 시사360.

시사투나잇의 아쉬운 종영에 이어 만들어진 이 프로그램은, 솔직히 말하면, 너무 졸속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프로그램 소개만 봐도 그렇다.

시사360

시사투나잇



왼쪽이 시사360의 프로그램 소개. 오른쪽의 시사투나잇의 프로그램 소개와 비교해 보면 졸속이 아닐 수 없다. 저 정도의 프로그램 기획의도와 개요 정도의 설명은 일반 회사라면 포스트잇 한장에 적어 보고할 때 간략 브리핑 해 주는 메모 정도에 지나지 않는 정도의 메모일 뿐이다. 뭘 하겠다는 건지 알 수가 없게 하겠다는 건지 모를 정도니 이 정도면 "아직 어떻게 할지 몰라서 이 정도만 알려드릴께요. 프로그램 성격은 상황봐서 분위기 봐서 대충 만들어갈 계획입니다~" 라는 소리와 다를 바 없다.

특히 첫 방송에서 미네르바 신드룸이라는 소제목으로 방영한 내용은 웃기는 짬뽕 수준이다.
오죽하면, 신문에서까지(일반적으로 상호간 비판은 그다지 심하게 하지 않았던) 그 내용을 비판하고 있으니 할 말 없을 정도다.
미네르바의 발언에 대한 신뢰성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조명은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한 전형적인 언론의 횡포다. 제대로 된 미네르바의 글을 읽어보지도 않은 사람들이 대다수인 이 상황에서 미네르바가 옳으니 아니니 하는 분석에 많은 시간을 할애하는 것은 언론의 사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네르바는 "주장"을 말하는 "논객"일 뿐이다. 어쩌면 지금 이 시간에 자기 블로그에 글을쓰고 있는 모든 사람이 논객이다. 그런 그에게 국가는 침묵할 것을 명령했다(명령이라고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상상해 보자.

우리 모두에게 "블로그에는 각자 개인적인 이야기만 쓰는 것을 허용한다" 라고 한다면, 그 누가 참겠는가?
미네르바가 자신의 말을 하건, 말건, 쓰건, 씨부리건 그것은 그의 자유다.
그의 말을 듣고, 읽고, 믿고, 신봉하는 것도 그 글을 말을 접하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다.

시사360은 미네르바의 전망과 논평이 얼마나 정확한가에 우선 중점을 두고, 기획재정부의 반발을 자세하게 소개한다. 경제에 대한 비관적 평가를 했다는 이유다. 왜 그는 비판을 했는가가 중요한가?

아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늙은 인간. 시민, 그리고 국민, 더 나아가서 언젠간 내가 될 수 있는 그 사람이 입에 재갈이 물려졌다는 사실이다. 미네르바가 어떻게 우리를 홀렸는가에 우리는 관심없다.(실제로 나 조차도 미네르바의 글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적은 없다. 그의 발언을 담은 글을 PDF 파일로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누군가가 개소리 잡소리 헛소리를 하더라도 우리는 그에 대한 판단을 하기 전엔 그것을 들어주진 못하더라도, 그것을 못하게 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시사 360의 어제 방송은 그런 면에서 확실하게 시사투나잇과 차별화를 만들어냈다. 마이너들의 목소리를 밤 늦은 시간에 나즈막히 읊조리던 시사투나잇과 달리, 시사360은 정부를 비판하되, 정부가 원하는 비판을 해줬다. 즉, 메이저의 비판이다. 어찌보면 이제 관영방송으로 전락해가고 있는 KBS는, 이런 식의 정부의 자기반성 대행서비스를 제공하려는 것인지 모른다.

시사360의 급조된 웹사이트는, 시사투나잇의 귤색 메인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급하게 만드려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귤이 회수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깨우쳐 줬을뿐.

급하긴 급했나보다.



360도를 돌면 바로 그자리다.


하지만, 다른 말로 표현하면,

"완전히 돌았다"라고 한다.


1. 헌법재판소가 종합부동산세의 세대별 합산산정방식이 위헌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종합부동산세는 유명무실해졌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에 관해 여러 각계의 의견을 보면,
"헌재의 재판관이 모두 종부세 대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강부자 판결이었다" 라는 점에서 종부세 찬성론자들의 의견이 좁아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번 판결의 의미는 다른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고 본다.

법의 그림자에 숨어버린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법률적 해석을 하는 기관이 아니다.
간통죄가 합헌인가의 여부나, 국민에 대한 개병제를 취하고 있으며 군경력자에 대해 가산점을 줄 것 인가의 여부는 어찌보면, (다른 의미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우리의 일반 상식과 다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우리의 삶과 괴리된 헌법적 판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 진다.

헌법은 정치적 산물이다.

우리의 지금 헌법은 이른바 87년 6월 항쟁의 결과였다. 이는 당연한 국민의 정치적 행위에 따른 당시 정치적 결정이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의 헌법이다.
헌법은 20여년간 변한 것이 없고, 우리의 삶이 변했지만, 아직도 우리가 그 헌법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헌법은 단지 그 글자만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문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력을 지닌 강령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헌법재판소의 역할은 그 헌법을 우리의 시대정신으로서 계속된 재해석을 해 나가는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헌법이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는 우리가 그 헌법의 올바른 가치를 현대 국민의 다수가, 그리고 고통받는 소수가 어떠한 기준과 지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도록 헌법을 해석하고 그 가치를 반영하여야 한다.
그것이 헌법재판소의 역할이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단지 법논리적으로 세대별 합산과세가 어떠하다는 의견으로 말아야 할 내용이 아니라, 그 헌법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관점에서 우리의 헌법이 정한 질서를 해석해서 내어놓는가에 대한 기준이 되었어야 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법뒤로 숨어버린 비겁한 모습이다. 법이라는 형식논리에 치우쳐, 우리의 현실, 우리 상황을 직시하지 못한 비겁한 발상일 뿐이다.


2.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절필선언을 했다.

어제 인터넷에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한 예측과 전망 그리고 비판을 해오던 미네르바가 절필을 선언했다.

그는 불행하게도,

"이제부터는 내 마음 속에서  " 한국" 을 지운다." 라는 다소 충격적인 말로 글의 첫머리를 대신했다.

조국이 그에게 원한 것은 다름아닌 침묵이었다고.
그의 글을 보며 많은 인터넷의 한국인이 우리의 현실을 보았다.

침묵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미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웠지만, 우리는 그저 침묵만을 강요당할 뿐 어떠한 권리도, 어떠한 자유도 얻지 못하는 것이 2008년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권의 이 땅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눈이 없다


나는 미네르바를 알지 못한다. 경제 상황에 무지한 탓도 있지만, 그의 글이 정확한 분석인지 여부에도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고, 많이 읽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그가 경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글을 썼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그가 투자의 목적이건, 투기의 목적이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입에 재갈을 물려 이제 눈의 양 옆을 가린채 경쟁으로만 치닫는 경제동물로서의 속성을 부여받았다.

앞으로느 사이버 모욕죄도 신설될 듯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사이버 모욕죄는 우리를 사이버에서 목을 조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와 현피를 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이버 모욕죄는 우리를 악플로 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허황된 믿음을 주고는 우리를 비판과 견제가 없는 세상으로 몰아갈 것이다.

미네르바의 주장에 온전히 동조하지 못하지만, 어떤 전 시대를 살았으나 더 자유로왔던 사람의 글귀가 생각난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볼테르 -



3. 시사투나잇이 어제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시사투나잇이 막을 내렸다.
지난 5년간 가장 명쾌하진 않을지라도 꾸준하게, 그리고 가장 화려하진 않을지라도 정확하게 현실을 바라볼 수 있었던 왜곡되지 않은 창이 하나 사라졌다.
KBS에서는 시사투나잇이 '생방송 시사 360’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하지만, 프로그램의 제목이 바뀌고 그 성격이 바뀌면 그것은 분명히 다른 프로그램이다. 시사잡지 시사IN 의 한 기사에서도 나와있듯이,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잘되고 있는 프로그램의 제목을 바꾸는 것은 방송상식에 벗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행태는 기존의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것과 같다.

흔히 정치권에서는 공영방송인 KBS가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보다는 정부의 정책의 방향을 국민에게 홍보하고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는 채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권의 방송이 아닌 지금 KBS의 타이틀 처럼, "국민의 방송"이다. 정권에 협력하고 정권의 나팔수가 되는 것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홍보기능만으로도 충분히 족하다.

"끝"


우리가 원했던 것은 정치적으로 점철된 방송사의 쇳소리가 아닌, 우리의 삶을 닮고 있는 한개의 언론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요구였다.

어제
인터넷에서는 미네르바가,
TV에서는 시사투나잇이 사망했다.

더불어 언론과 여론과 비판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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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광화문 사거리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대형컨테이너 20개가 길을 막고 있다. 나 역시 오늘 아침에 출근 중에 보고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면서, 정부종합청사와 미국대사관이 있는 이 길에 저렇게 큰 대형컨테이너가 20개나 들어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저 컨테이너의 용도가 '국민의 진입을 막기위함'이라는 사실은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명박 정부 100일. 그 100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행동하며, 부르짖기 때문에,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웬만하면 이명박 정부의 현재와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성, 그리고 전망에 대한 이야기나 정부를 성토하는 질타성 글을 올리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상황에서 똑같이 정부를 욕하는 목소리 하나 더 보태는 것 보다는 행동하고 인식하며 기다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단순 논리였다. 하지만, 오늘의 사태를 보면서는 (이 정도 가지고 사태라고 할만 하겠냐마는, 이건 사태다.) 침묵하는 다수니 하는 웃기는 소리 보다는 한 마디라도 더 보태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부와 언론의 달라진 현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인터넷의 힘을 간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퍼지는 말들, 그것이 괴담이건 아니건, 그것을 control 하거나 monitoring할 수 있는 어떠한 힘이나 조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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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못잡는 시중씨



(사실 이 말은 모 기관장이 퇴임 후 어느 강연회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 흔한 괴담들을 말하는 것이라 치부하며 우습게 볼지는 몰라도, 이제 이 것이 이명박 정부의 현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가지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 부터 언론에 대한 장악을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설정했다. 이는 방통위원장으로 최시중이라는 최측근을 전면 배치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시중이 어떤 인물이고,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냐를 판단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이명박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또는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열쇠였으니, 이러한 이명박정부에 대한 언론관의 평가는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이버는 평정, 다음은 폭탄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내부의 은밀한 목소리가 밖으로 퍼지기는 했지만, 인터넷에 대한 심각한 개입을 시사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이 중심의 인터넷과는 괴리되어버렸다.
 
이 점에서 전에 썼던 글에서 한 내용을 인용해 보자.

< 투옥된 블로거, 최장기 투옥 언론인으로 신기록 수립할 예정 >

Josh Wolf라는 블로거가 샌프란시스코의 경찰차가 불이 붙는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의심되는(실제 촬영이 되었는지는 기사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 필름을 연방검사에게 제출하지 않고, 연방대배심에도 협력하지 않은 죄목으로 법정 모독이 인정되어 투옥. 미국 역대 최장수의 투옥 언론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고 한다.

얼핏 전혀 연관이 없는 이 두 가지 사실은 2007년, 아니 그 이전부터의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된다.
먼저, '전통적' 언론인이 아닌 블로거가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되었다는 것. 즉 개인 미디어의 언론화를 뜻한다. 제도권에서도 진정한 언론으로서 개인 미디어가 자리잡은 것.

참고할만한 글 - < 블로거에 언론의 지위를 허하라 - John Conyers(美, 민주당 하원의원) >

- 개인의 공공화, 공공의 개인화. 그리고 개인미디어로서의 블로그 (2007.2.8 작성)-

지금 이명박 정부는 언론을 잡기 위해 조중동과 경향, 한겨레로 대표되는 좌우 양익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고, 인터넷에 대해서는 네이버와 다음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포털을 어떻게 콘트롤 할 것인가에 역량을 집궁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통적 시각의 언론관이 이미 용도폐기된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의 블로거 뉴스에서 보는 바와 같이,이미 신문 언론 권력은 인터넷 언론과 지상(紙上)언론으로 양분되었고, 방송언론 역시 MBC, KBS가 아닌 인터넷방송으로 일부 권력이 이동되었다. 인터넷 포털 역시 지금까지 인식되어오던 뉴스 전달자의 개념을 탈피하여 적극적인 Gate Keeper로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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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말해놓고도 뭔가 뿌듯한 두언씨

위에 인용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국이나 일반적인 우리 사회 Net People의 입장에서는 이미 블로거는 언론인이며 그 하나하나의 정보는 언론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고, 또한 자격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명박 정부는 게시판에서 노는 실업자나 할일 없어 돈만 쥐어주면 되는 애들로 치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어떤 언론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조중동이나 경향, 한겨레, MBC, 또는 KBS에서 성공하더라도 이는 반쪽짜리의 성공에 불과하다. 훨씬 더 많은 언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권의 성패는 어쩌면 언론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내었다가 지난 노무현 정권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운 바다. 이명박 정부의 전통적이고 전근대적인 언론관의 개혁은 이명박 정부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은 소문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소문을 증폭할 수는 있고, 괴담도 우표할지 모르지만, 그 괴담을 현실화 할 가상 현실도 가지고 있다. 그저 괴담의 유포자를 잡아넣었다고 해서 언론에 대한 할 바를 다했다는 것은 매우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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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박았다!


이 언론을 장악 하겠다고 하는 정부의 시각이다.

이명박 정부가 가장 실패한 정부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언론에 대한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통제적 권력의 실천에 있다. 그들이 정권의 나팔수 라고 폄하했던 국정홍보처를 폐지하는 바보같은 짓을 하면서도 언론을 장악해서 그 상부구조를 뒤흔들어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결국 진시황과 호해에게 있어서의 환관 조고의 방법만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00만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것 보다, 당연히 이명박 한 명의 귀와 눈을 가리는 것이 쉽다. 언론이 5,000만이 되어버린 오늘의 블로그 시대에 언론의 입을 막고, 국민의 귀를 막는 것은 북한식의 5호담당제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감시체제다. 결국 막을 필요가 있는 언론의 길은 이명박으로 통하는 그 한개의 길이다.

어쩌면 이명박이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헛소리해대는 것은 이렇게 뚫어져 버린 언론의 방파제를 내버려둔 채 이명박으로 통하는 한개의 작은 샘물만을 남겨둔, 정두언의원의 지적이 옳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발언의 의도는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이 절대로 뇌 용량이 2MB밖에 안되는 바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기는 치지도 못했고, 그 많은 재산이 아직 남아있을리도 없다) 하지만 제한된 조건하에서 누구든지 제한된 판단 밖에는 내릴 수 없다. 그 길이 차단된 것이다. 성냥개비 두개만 들고는 아무도 담배를 태울 수 없다. 담배가 없으니까.

최소한 인터넷만 봐도 이러지는 않는다 라는 말이 너무나 실감나는 요즘

또 하나의 언론, 그리고 이른바 대안언론으로서 이제 블로그가 일어나거나, 이명박이 그리로 내려올 때다.


레고 쌓듯이 컨테이너 몇 개 쌓아올린다고 그 물결이 멈출 것이라 생각한다면, 조중동만을 너무 열독한 결과라고 밖에 몰 수 없다.

이미 언론을 장악하려는 이명박은 실패했다. 아니, 이명박을 얼굴로 내세운 극우 보수주의자들이나 친미 사대주의자들은 이미 20세기에 멈춘 세계관 속에 도태되어버렸다.

이명박,

언론의 소리를 들으라.

오늘 그 언론이 광화문 컨테이너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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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불쌍한 경찰이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조선일보 기사의 사진


이명박의 지지율은 날로 더 떨어져가고 있고, 이명박정부는 드디어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선언했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드디어 이명박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명박이 두려워 하는 것,

그것은 "노무현" 처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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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노무현이 왜 그토록 국민들과 멀어지고 끝끝내는 욕먹은 걸로만쳐도 무병장수 할 수 있을 정도의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건, 그 내용이 어떠헸건 그것이 정당했는가의 여부를 떠나 노무현이 실패했던 것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모두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보에게는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의 참전과 FTA라고 하는 우파와 신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이 진보로 취급되던 노무현에 대한 배신의 의미로서 욕먹어야 하는 대통령이었다면, 보수세력에게 있어서는 반미와 친북이라는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의 수괴로 낙인찍혔으니 사면초가에 아군은 하나도 없는 형국이었고 결국은 '노무현스럽다'라는 신조어에나 등장하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어버렸다(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나는 약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

이명박이 두려운 것은 지금 중고생들이 촛불 들고 나와 한소리 해대는 것이 아니다. 어짜피 그네들이야 입시가 가까와오고 기말고사가 가까와 온다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저 촛불시위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명박씨가 이런 철없는(?) 중삐리 고삐리들 때문에 가던 길 멈춰 불도저 시동 끄실 양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촛불시위에 대해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하다 못해 끝내는 물대포 쏘아가며 정공법이 아닌 신속한 진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조선일보 기사 중에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떴다.

< 취객에도 맞는 경찰 공권력 >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취객 등 경찰 지구대에 끌려온 사람들의 행패에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도, 결국은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당하고 산다는 불쌍한 스토리다. 거기에 덧붙여 외부 전문가의 말을 아래 처럼 빌려 한 것은 이 사실이 얼마나 심각한 현상인지 알려주는 친절한 기사다.

경찰대학교 행정학과 표창원 교수는 "공권력 집행의 약화는 경찰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안녕과 평온의 문제"라며 "공권력이 권위를 잃으면 결국 피해는 법을 지키는 사회적 다수에게 돌아온다"고 말했다.


 얼핏 보면 그냥 경찰공무원의 힘겨운 업무와 그를 걱정하는 신문기사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 기사가 한창 인터넷에 올라온 시간인 2008년 5월 24일 00시 27분에 일어났던 일들과 같이 본다면 이것이 그리 녹녹치 않은 조선일보의 이명박씨에 대한 훈수두기라고 생각된다.

한겨레 신문에 이미 살수차가 동원되어 거리로 진입한 촛불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살수와 연행이 있었다는 기사가 떴고 오후 10시 20분에 드디어(?) 집회 참가자들이 거리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추가되었고,  11시50분에는 살수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결국 새벽에는 폭력사태까지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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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왜 뜬금 없이 "불쌍한 경찰"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갑작스럽게 가져왔을까? 최근에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는 사실들 때문에 경찰이 동정의 대상이 되었던가? 오히려 경찰의 기강해이가 문제되거나 전직경찰의 범죄 가 문제되고, 각종 성희롱, 성추행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경찰의 태도가 문제되긴 했지만, 경찰의 고충에 대해 갑작스럽게 환기시켜 우리를 경찰을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로 몰아넣을 필요는 없던 시기였다.(비록  경찰에겐 안 좋은 소식이지만, 경찰을 탓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생각건데, 이러한 갑작스런 조선일보의 기사는 급조되었다기 보다는 이미 작성되어 때를 기다렸다는 느낌이든다. 이미 오래전 부터 기획된 기사이며, 그저 때를 맞춰 기동취재반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경찰에 대한 폭력을 잠깐 취재했다는 느낌 뿐이다.

경찰에 대해 조선일보가 연민의 정을 느꼈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이지만 이 기사는 오직 한명을 위한 기사인 듯 하다. 명박씨, 잘 보고 있는가?


조선일보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는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명박아, 그것밖에 못하니?
좀 더 쎄게.




이명박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노무현 처럼 되는 것이라면, 노무현처럼 진보로부터도, 보수로부터도 똑같이 욕을 먹어 끝내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어 '명박스럽다'라는 단어가 또 한 가지의 뜻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이라면, 노무현 처럼 이렇게 조선일보가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지금은 진보세력과 아이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불굴의 소시민들 나부랭이(?) 들이 나와 겨우 촛불 들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고 조선일보 앞의 시위대가 끊임없이 이어지면, 조선일보는 강경하게 나올 수 있다는 소리다.

경찰, 뭐하니, 화끈하게 밟아버려!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순간, 어느샌가 낮에는 시청광장을 중심으로한 보수단체들이 나와 빨갱이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우리 중, 고삐리들을 걱정하며 타도 이명박을 외칠 것이고, 밤이 되면 적색 빨갱이와 그 사주를 받은 시민들이 광화문에 모여 불을 지펴 그의 퇴진을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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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존나 말리고 싶은 정갑씨



우리에게 중도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명박을 지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니 중도에 서서 "글쎄..."라고 말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낮과 밤을 양분한 보수파와 진보를 가장한 유사진보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있을때 한번 더 이야기 해 보자)가 과정은 다르더라도 결국은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면 이명박은 욕하면서 배우는 어린 자식 처럼 노무현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보수도 그를 물러나라 하고, 진보도 그를 떠나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명박이 진짜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래도 병신 저래도 병신 소리듣는 것은 이골이 난 상태니 상관 없지만, 보수도, 진보도, 그리고 군부와 조선일보까지 등을 돌리게 되면 이명박 정부는 더이상 지지기반 없이 떠나야 하는 아쉬운 옛 연인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전에도 잠시 얘기를 했지만 조선일보는 단순히 기사만 싣지 않는다. 그들은 고도의 편집권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찌라시다. 그들이 뱉어내는 기사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보수가 어떻게 우리의 입을, 머리를 귀를 마비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최상의 교과서다.

이명박은 토요일 한밤중에 한마디의 육중한 경고를 들은 것이다.

이명박이 움직여 저 빨갱이를 소탕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안녕과 평온의 문제"는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조갑제와 같은 평화와 진리의 사수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진보와 보수는 결코 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이 두려워 하는 것은 그들이 끝내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같이 결론을 내는 것은 단 하나,

이명박 퇴진 이다.


이명박에게 있어서 보수파는 어쩔 수 없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일 수 밖에 없다. 서정갑의 예비역 대령연합회나 재향군인회 등 군부에서 파생된 보수주의 단체는 군대 미필자인 이명박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계속 거두지 않고 있는 실정에서 기독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아직 남긴 남았지만, 그들도 혼란하고 빨갱이의 마수에  죽어가며 도탄에 빠진 가련한 백성들이 시끄럽게 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엄정한 법집행을 시급하 시행하지 않는다면, 6.25때 어떤 고지의 전투처럼 낮과 밤이 바뀐채로 우리는 진보와 보수의 끊임없는 퇴진 소리를 들어줘야한다.


이명박은 아마 이번 시위에서 계속적으로 과격하지만 조용하게 진압을 시도할 것이다. 물론 수 많은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고 어쩌면 한 두명의 치명적인 희생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물타기 역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그것은 양쪽으로 부터 비난을 받는 노무현과 같은 존재로 전락할 자신을 참을 수 있는 용기가 이명박에겐 없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막내로 전락해 버린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서 이슈가 되었다.

< 함부로 '삽질'하다 허리망친다 >

동아일보도 걱정이 되었나 보다.


이명박 무엇이 두려우랴!!!
덤벼라.


하지만, 이것은 알아두셔야 한다.

우리가 쪽수가 더 많다. 유남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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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다. 정말 광우병 때문에 시끄럽다. 언론과 정부는 아니라고 하고, 국민은 분노한다. 그리고 소리친다. 살고 싶다고. 정부는 여전히 안전함만 말하고, 언론은 여전히 배후만 캐고 있다. 국민은 이제 스스로 언론이 되어야 하고 투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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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최근 며칠간의 정국과 문화와 사회는 광우병 열병을 앓았다. 지금도 역시 광우병은 우리 사회 최고의 이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 아니, 사실은 이 광우병 사태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밝혀지고 있어 그 수많은 일들 사이에 우리가 이 정권하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 걱정이다.

광우병때문에 구멍이 송송 나 버린 뇌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파렴치한 사찰과 감시와 통제와 공안정국 그리고 소외된 자들의 계속적인 소외와 죽어가는 자들의 날카로운 외침이다.


전에 쓴 글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미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정권을 탄핵이니 하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종료시킬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 자신들은 계속 군림하며 나아갈 것이 확실하다.

이명박정부가 노무현 정권과 다른 점이 분명 많이 존재하지만, 노와 이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소통의 회복"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노무현은 대화가 단절되고 communication의 필요가 극에 달하면 정공법을 택했다. 검사와의 토론, FTA관련 토론. 등등 스스로 언론의 힘을 빌려 그들과 소소통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물론 그것이 모두 옳은 방법이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진시황이 스스로를 '짐(朕)'이라 칭하며 장막 뒤에서 신하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어느정도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대통령이 모든 사안에서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위해 거리로 나오는 것은 반대이니, 노무현의 방식이 신선하고 직접적이며 정공법이라고 하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튼, 노무현은 직접 대화를 시도함으로서 그의 할 말을 하고자 했고 그렇게 우리는 노통과 소통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어떤가? 이명박 정부의 소통방식은 수족을 부려 그들의 말에 강제로 끼어든다. 촛불문화제를 기획하는 학생을 직접 찾아가 강제로 듣고, 조사하고, 감시하고 검열한다. 문제는 이러한 검열과 감시가 강압적 고압적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위에서 소통하려고 한다. 노통이 그 위치가 위건, 아래건 소통의 상대방이 있던 곳 까지 내려와 소통하고자 하는 것에 반해 그들은 확실하게 위에 있고, 그곳에서 소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상대방을 자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소리치라 한다. 들리지 않는 그곳까지 소리치게 한다. 이는 소리치지 않게 함과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이 소리침의 행위가 그 능력에ㅔ서 벗어난 행위임을 들어 그들을 외면한다. 즉,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면 듣지 못하니 외면하고 듣게되더라도 그들의 목소리임을 인정치 않으니 결국은 듣지 않는 것. 그리고 그들은 경찰과 감시, 검열이라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소리치며 일방적 소통을 시도한다.

우리가 이제 겨우 10년간의 진보적(진보가 아닌 진보적인) 정권에서 이룩한,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쟁취한 그 수 많은 민주주의의 희망은 소통이다. 위와 아래가 자유롭게 소통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자는 소통하고, 왼쪽과 오른쪽이 소통하고, 위와 아래가 소통한다. 민주주의는 communication이다.
수 없이 많은 열사들이 피흘렸던 것은 소통이었다. 나의 뜻을, 나의 이상을 그들에게, 누구에게든 말하고 설득하며 소통함이 바로 우리가 얻어냈던 민주주의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서는 어떤가. 우리는 소통하고자 한다. 촛불로서, 시위로서, 문화제로서 그리고 인터넷으로, 덧글로, 블로그로, 통하고자 한다. 대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명박은 이미 소통의 다른 방법, 다른 방식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선전과 차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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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랑 한판 벌인 경찰서



그들은 일방적으로 소리치고, 일방적으로 말하지만, 우리의 입은 차단하고 우리의 소리에는 그들의 귀를 차단한다. 이명박 탄핵의 소리는 들었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만을 본다. 보긴 보았으되, 듣지는 않는다. 미친소 물러가라는 소리는 듣지않고, 그들의 소리치는 목소리를 대중에게 선전해 줄 자들의 목구멍에 기름을 빼 주기 위해 바베큐 파티를 연다. 목소리를 내는 자들의 목소리는 애써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하고, 심지어는 국민과의 소통은 포기한채 소와의 소통을 시도하기 까지 한다. 모든 소통을 거부하며 일방적 소통, 아니 호통만을 원한다.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후퇴를 암시하는 말을 했었다. 그것이 어떤 뜻이었는지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우리는 소통의 상대방이라는 지위를 빼앗겨 이제 선전과 광고 그리고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객체로 전락해 이 사회의, 그리고 이 나라의 주인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한국은 여전히 헌법에 의해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그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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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예전처럼 내가 국민이기 때문에 주권을 가지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권을 가지는지 여부에 따라 국민인가 여부에 대한 고민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소통이 없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잃은 것이고, 그러한 소통의 부재로 우리가 주권이 상실되었다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빠져들게 된다.

이명박정부는 우리와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소통의 방식은 정확한 의미의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소통, communication이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 외침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소통이 없다. 이명박 정권의 속에서는 말이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 그리고 그가 구성한 내각과 한나라당이라고 하는 총선에서 승리한 여당을 믿고 맡기자는 주장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와 그 가치를 수호할 때만 유효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지킬 권력을 주었지만, 그것을 훼손할 권력을 쥐어준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나라당을 찍었건, 이명박을 찍었건, 그것은 ㅜㅇ요하지 않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여당을 이명박과 한나라당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대화와 소통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이 없는 한국을 만들라고 그들에게 권력을 준 것이 아니라 비록 그것이 부동산값이나 올리라는 소리라도, 그것이 우리의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지위가 아닌 소비자로서, 투자자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는 것이라 해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을 위한 소통이다.


소통이 없는 정부는 우리에게 주권이 있음을 확인시켜주지 못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인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그 순간 이후의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다. 국민은 더이상 자신의 정부가 아닌 이명박 정부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이 국민소통능력이 떨어진다면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많이 기대는 안하지만, 이본에는 제발 자신의 말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다.



< 이 자리에 있던 소울 드레서의 광고는 소울드레서 관계자님의 부탁으로 잠시 내렸습니다.>
< 소울 드레서 광고가 정식으로 개제 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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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딩박은 이명박이나 박근혜랑은 무관합니다.


홍길동.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여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받았으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총선의 결과를 보고 그 이후에 터져나오는 한 많은 사연들을 보니 이번 총선 사태(?)는 홍길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민심이 천심이라 할 수 없으니, 민심능 천심이라 하지 못하는 국민을 호부호형 못하는 홍길동과 무엇이 다르단 걸까.


1. 홍길동이 진짜 도둑인줄 알았다는 사람들.

< 정청래 vs 문화일보 >

홍길동이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다. 물론 물건을 훔치기는 했다. 그러나 홍길동은 탐관오리가 '부당하게' 취득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 했을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 불법적인 주거침입은 있었을지 모르겠다.

정청래 의원의 행동이 모두 적절했다고 판단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정청래의 행동에 앞서 그 배경과 실체(fact)에 대한 문화일보와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는 악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기사로 인한 인터넷 댓글만 보아도, 언론이 어떻게 홍길동을 도둑으로 몰아갔는지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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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의원(아직은 현역 의원이다)은, 국회에 남아있던 386의원들 중에서 몇 안되는 정확하고 탄탄한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던 사람이었다. 지금 당선된 통합민주당의 인사들을 보면, 과연 정 의원 만큼 한나라당의 우익정치에 날카로운 지적과 견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운데, 이런 상황에서 말도 안되는 비방과 악의적인 선전으로 희생된 정의원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기자회견을 하면서 울먹이던 정청래 의원.
4년 후에는 돌아온 홍길동이 될 수 있을까?


2. 진짜 홍길동 처럼 나타난 사람

< 아가씨's coming to town >

특별히, 조선일보의 기사를 골라봤다. 오죽하면 조선까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 약관(약관이라는 단어는 사실 남자나이 20세를 뜻하는 말이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거나 시작한지 얼마 안된 젊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주길)의 젊은 아가씨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서 특별당비를 내고 비례대표 1번을 꿰찾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특별당비란, 국회의원선거 또는 대선에 있어서 당의 선거자금의 급조달을 위한 당비이니 만큼 특별한 액수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억대 이상이며 일반적으로는 십억대 이상의 액수를 말함이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겨우 복지관의 연구관이나 복지시설의 간사 정도만 하던 젊은 여성이 그런 돈이 어디서 났을까에 대한 의혹은 버릴 수가 없다. 굴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돈 많은 어머니를 두고 있다고는 하나, 어머니의 돈을 자신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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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으로 특별당비조로 내려 한다면 그 사이에 있었던 증여행위에 대한 세금은 납부하셨는지도 의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만약 이렇게 그들이 열심히 해명하고 있는 일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예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젊은 아가씨에 불과하다. 그다지 화려하지 못한 배움의 정도 때문인지 취직은 잘 되지 않고, 어머니가 설립한 기관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리고 여러 언론에서 언급하고 걱정하며 지적한 바 처럼, 어머니가 들어갔어야 할 자리에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들어갔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물론 그녀를 비난함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예상이다).

도대체 홍길동 같은 그녀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도대체 친박연대를 위하여 정당투표를 던진 박근혜의 팬클럽들은, 과연 그녀의 얼굴이나 선전벽보에서라도 한번은 보고 찍은걸까?

홍길동이 엄마의 치마를 휘두르며 나타났다는 소리는 허준도 몰랐던 이야기.



3. 정말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부른 홍길동

홍정욱.

우리나라 조기유학의 첫번째 성공 케이스
그에 관한 사항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올블로그 상위에 랭크된 글을 링크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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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선배다. 하지만 그는 위선자다.



< 홍정욱 바로알기 >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노회찬의원을 '노동귀족'이라고 칭함이다.

위선자.

그가 살았던 현대 아파트 75동은 내가 잘 안다(한때 내가 그 뒷동인 73동에 살았다).
그 집은 80평짜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던(지금은 아니다) 아파트였다. 같은 현대아파트에서도 그 집에 살면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곳이다.(집에서 축구한다는 소리까지 했었다. 참고로 73동은 48평)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서민이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위선이고 파렴치다.

노 의원은 고등학교 1학년인 1973년부터 민주화 투쟁을 해오던 인물이다.
감히 홍정욱 따위가 말할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서민배우의 아들' 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배우(이제는 내게 자식교육 못시킨 불쌍한 아버지로 기억될 것이다)였던 남궁원씨는 결코 서민이 아니다. 정몽준 의원의 조카사위인 그도, 서민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서민이 뭔지나 알고 말했는지 의심스럽다.

자신의 아버지를 똑바로 부자 아버지라 말하지 못한 그. 홍정욱은 홍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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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모습을 국회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빈다.







물론 더 할말은 많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도록 하자.

이번 총선이 홍길동이었다면,

이제 국민이 활빈당이 되어 탐관오리들을 응징할 일만 남은 것이다.
옷갖 위선과, 악의적 보도와 음해와 그리고 밀실공천이 존재하는 곳 국회.

이제 그곳으로 홍길동들이 간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이제 누구에게 돌을 던질까.

투표율 46%

Posted 2008. 4. 9. 23:57

2008/04/08 - [Joke Diary] - 좆병신 찌질이 20대야, 너 따위가 뭔가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지 마라


네, 저는 찌질이입니다.
46%만 선거하는 나라에서는 찌질이도 살만합니다. 풋; 푸후후;


안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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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말 4월호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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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말 4월호 별책부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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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페이지 입니다.

*-_-*


물론,

사진에 대한 전문지식
없습니다.


물오른 사진
없습니다.

-_-

언론은 구라쟁이입니다 -_-

감사합니다.


아 민망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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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분은 좋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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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하면 크게 보임



인터넷을 보다가 멋진 자료를 하나 발견했다.
이 기사들을 왜 못봤던 건지;;;

이제부터 하나하나 차근차근 읽어가야겠다.

<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 >


오늘은 시간이 조금 남을 듯해서 엇그제 봐둔 기사를 통해 이명박 정부의 허구성에 대한 글을 쓰려고 했었다.

그 기사는,

< 도로공사 vs 청와대 >

이거 였다.

이명박 정부가 수없이 뱉어내는 그 많은 허상에 속아버리고 있는 우리들이 너무 불쌍했다.

이명박 정부의 수많은 허상들. 존재하지도 않는 것을 이명박에 대한 말 그대로의 anal sucking 수준의 언론을 보면서 참담한 기분을 두고만 있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이명박 정부의 "죽여주는" 대국민 play 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오늘 기사를 보다보니 또 다른 '꼭지가 돌아가는' 기사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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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형제도 폐지에 대한 부정적 시각 >

이 기사였다.

사람을 죽이지 않는 것을 정부의 직무유기라고 하는 자세라니, 그런 생각이라니, 그런 철학이라니.

물론 인륜을 져버린 범죄는 엄격하게 처벌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력의 살인이 정당화 되는 것은 아니다.

사형제도를 통해 범죄를 예방하겠다는 생각은 어떤 바보의 생각인지 알 수가 없다.

대통령이 된 자는, 태아의 인격과 생명의 소중함은 무시한 채 낙태를 옹호하더니, 이제 그 손발이 된 수하들은 이미 태어난 자들을 죽이려는가?


이 땅에서 사형이 다시 실시되는 그 순간,

우리나라의 민주주의는 10년 아니, 100년은 후퇴한다.

이 사형제도에 관해서 이전에 썼던 글을 다시 링크한다.

2007/07/05 - [Daily] - 사형제도의 완전한 폐지를 위하여


물론 이 글을 올렸을 때만큼 엄청난 비난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추가로, 낙태발언에 대한 것도 같이 링크

2007/05/28 - [Daily] - 이명박의 '불구자 낙태' 발언에 다시 불을 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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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 430?



요즘 PD 수첩 방영 이후로, 허경영에 대해서는 짜증난다와 알게뭐냐 그만 좀 울궈먹어라 등등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반응이 계속되는데, 허경영을 바라보는 비이성적인 시각과 냉정한 눈으로 보면,


허경영이 아니라, 이명박의 아이큐가 430일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비록 옆의 사진 처럼 선캡하나 제대로 못쓰는 위인이긴 하지만, 이명박의 말을 들어보면, 그리고 그의 오른팔이 되어버린 인수위에서 발표하는 것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대통령으로 아이큐 430짜리를 뽑아놨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제성도 없고, 환경만 좆될 것 같은 대운하도 그렇고,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대학 입시정책도 그렇고, 전화받을 때도 돈 내야 하는 핸드폰 요금 정책도 그렇고, 여성부가 복지부에 흡수되는데 여성부가 힘이 더 커지는 정부조직개편안도 그렇고..

전혀 아이큐 100짜리인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정책들만 나오고 있으니, 우리가 아이큐430짜리 뽑았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그냥 웃어넘길 430 논란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번 대선에서 허경영 후보에게 표를 던진 대부분의 사람이 장난으로, 심심해서, 등등 말도 안되는 이유에서 였다면,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도, 허경영에게 표를 던진 사람과 비슷한 생각이거나 수준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 지금 인수위를 비롯한 대통령당선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반증에서 부터 비롯되는 국민 바보 프로젝트 아니겠는가?

이명박의 아이큐가 100에서 왔다갔다 하는 수준일지는 모르지만, 중요한것은 우리가 말하는 어떤 것도 이명박의 귀에는 안들리는데다가, 언젠간 운하 공사도 시작될 것이고, 경제는 도 다시 재벌과 있는 놈들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번 대선 후유증의 가장 큰 문제점인 국민바보프로젝트는 어찌되었건 시작될 것이고 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명박의 아이큐와 상관없이,

이명박정권의 좆대월드는 2월 25일이면 개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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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가 100정도라 미안했을 노 대통령


이렇게 이야기 하는 나도 사실 이명박의 아이큐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동한 노무현을 까대던 조중동과 그 일당들(나머지 그 아류작들은 찌라시 수준도 안되니 말할 것도 없고)이다.

"그래 너 잘났다" 면서 까대던,
"대통령이 말을 너무 막한다"고 까대던,
"권위가 없다"고 까대던

그 언론이라는 것들 말이다.

딸이 3이나 있으니 여성정책 걱정하지 말라는 쳐죽일 소리나 해대는 돌발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황당했던지.
아들 얻으려고 애를 4명이나 낳은(저 당시에는 아들딸 구별말고 2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대였다는 사실...) 애물단지 같은 고추없는 딸년들 3명이나 낳은게 자랑이라고 저런 소리를 하는데,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 정도다.

외국인들과 만나서 함부로 외국어로 지껄여대는 줒대없는 사대주의적 외교적 수준이라니... 도대체 어느나라의 대통령이, 지도자가, 외국인에게 자랑스러운 우리말과 우리문자를 가지고 있는 한 국가의 수장이 외국어를 지껄인단 말인가? 함부로 말이다. 아무리 지가 잘났더라도, 아무리 우리나라가 좆같아도, 함부로 영어를 지껄인다는 것은 굴욕적이다.


이런 수준의 이명박 당선자에게, 침묵하는 조중동의 5년이 궁금하다.





물론, 대운하의 물살에 살아남기라도 해야 한마디 하겠지만.

요즘 가장 뜨거운 것이 뭐냐고 물으신다면, 한 순간의 주저함도 없이 이명박(아니, 어쩌면 김경준과 BBK)과 삼성이라고 답하겠다.

이명박의 BBK사건은 이제 초읽기로 들어간 듯하다. 내일은 에리카김이 이명박과 김경준의 관계를 밝혀줄 이면계약서를 공개한다고 했고, 이명박은 계속 이를 부인하고 있지만,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조사가 이루어질 것으로 보인다. 비록 검찰은 26일까지 중간수사결과를 발표하는 것은 어려울지 모른다는 입장이지만, 26일 이전이라면 이명박의 낙마가 예상되고, 그 이후라면 낙선이 유력하니 이래저래 한나라당으로서는 답답하고 짜증나는 시기가 아닐까(26일 이후 발표되어 이명박의 지지율이 떨어지면, 그때가서는 대선후보를 교체할 수도 없는, '퐝당'하지만 어쩔 수 없는 시츄에이션이 발생한다. 26일 이전이라면, 박근혜로 교체할 가능성이라도 남아있지만... 부디 근혜씨는 공직선거법 제49조에서 정한 후보자 등록 서류를 준비하고 기다릴찌니, 다행히도 근혜씨는 가족이 없고 여자라서 발급받기가 한결 수월할 것이다)

다음으로 드거운 것은 역시 삼성.
자칫 김경준이라는 핵폭탄급 인물의 귀국에 밀려 차갑게 식어버리지 않을까 우려했으나, 다행(?)하게도 청와대의 비호아래 그 뜨거움은 여전히 활활 유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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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용철씨가 공개한 삼성의 뇌물 사진



사진찍는 것을 취미로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웬만하면 해상도가 좋은 라이카나 carl zeiss 렌즈로 찍었으면 하는 아쉬움도 있고, 구도와 색감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 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올해 신정아 누드사진과 함께 엄청난 파괴력을 갖춘 사진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이로서 삼성은 불행하게도 변명도 제대로 못하고 꼼짝없이 딱걸린 상황이 되어버렸다.

삼성은 그동안 김용철변호사의 삼성 떡값(뇌물인지...) 관련 폭로를 모르쇠 내지는 철저한 부정으로 일관해 왔다. 웃긴 것은, 추미애가 돈을 받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얼마나 중요하면 몇달간의 업무지시내용을 종합하는 '회장님의 방침'에 들어갈 정도였냐는, 로비와 뇌물 전달이 중요한 업무였다는 점을 인정하고 말게 되는 황당한 역인정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아무튼, 삼성은, 이병철부터 이어오던 정경유착의 이미지를 단숨에 떡방아간으로 만들어버리는 능력을 발휘했다.

그동안 누구도 비틀지 못했던 삼성의 철옹성은, 두 용철이 때문에 무너지게 생겼으니 건희씨와 재용씨는 용철이란 이름만 들어도 지금쯤은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이를 갈지 않을까?


그런데,
그 와중에 대행인지 불행인지 이병철 전 회장의 타계 20주년을 맞이하여 故 이병철씨의 생가가 일반에 공개 되었다고 한다. 어제 시사투나잇(야밤에 하는 light한 시사트로그램이라 즐겨 본다) 에서는 이를 취재하며 그 지역의 사람들과 삼성의 수사를 촉구하는 시민단체의 짤막한 충돌을 소개 했다.

가끔, 아니 우리 사회에서 자주 나오는 사례이지만, 이런 모습을 보며 천민자본주의의 천국이 되어버린 우리나라의 상황을 너무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하면서도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지역주민들은, 이병철 회장의 생가를 통한 관광객의 유치를 기원하며 잔치를 벌였다고 한다. '이런 훌륭한 분이 우리 고장 출신이라는 것에 기뻐'하면서 말이다.


우리나라가 절대 현재 천민자본주의에 지지부진한 사상적 토대에 세워져있다는 강력한 물증이 아닐까 한다.



이병철이 어떤 인물이며, 삼성은 어떤 기업인가?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보아도, 그가 과연 성공한 기업인인가하는 의문을 가지게 하는 것은 물론, 지금 은밀하게 이루어지고 있는 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지는 편법적인 경영권승계 과정을 보아도 삼성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이 되어서도 안되고 그럴 자격도 없다.


어제의 시사투나잇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병철이, 이건희가 존경받는 것은 그들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기업, 삼성을 이끌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없다. 그러나 삼성의 성장이나 지금의 최고의 위치에 있기까지의 과정을 보면, 그리고 삼성의 이건희가 존경받는 모습은 그들이 돈을 벌기 위해서는 심각한 정경유착도, 극심한 노동탄압도 불사한 파렴치하고 치졸한 작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외국에서도 비웃는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도 안되는 행위로 국제사회가 인정한 양심수를 만들어낸 기업, 8천억 사회환원으로 국민을 기만하는 기업.

지금까지 두어차례 삼성에 관한 포스팅을 했지만, 삼성은 '그들이 단지 돈을 많이 벌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국민에게 존경을 받고 있고, 누구나 삼성에 들어가고 싶어한다. 그들이 사업을 어떻게 경영을 어떻게 하고 있는가는 논의 대상조차 되지 않는다.

삼성의 비자금 사건이 터진 지금 이 순간에도 언론은 삼성의 신화아닌 신화에 불을 밝히기를 주저하지 않고(관련기사)있고, 이병철 생가 주변의 주민들은 마치 위인전에나 나올법한 위인의 탄생과 삶을 신격화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천민자본주의를 이끌어온 삼성 그리고 이건희, 이재용, 이병철.

지금도 삼성 특검법은 청와대의 반대와 한나라당의 엄한 물타기로 언제 처리될지 계속 표류하고 있다(내년총선을 거치며 법안 자체가 폐기될지도 모른다). 심지어 누군가가 대통령이 된다면 삼성의 이번 행위는 유야무야 넘어갈 공산이 크다.

재벌경제와 비정규직 노동자로 규정지워지는 지금의 한국경제가 좀 더 정의롭고 민주적으로 발전할 수 있는 기회는 쉽게 오지 않을 것 같다.

대한민국의 경제민주화는, 삼성이 없어져야 가능하다고 생각된다. 삼성이 우리나라에 꼭 필요한 이유 따위는 없다.
단지, 없어져야 할 이유는 있을지 모르지만.

참고기사 -아직도 삼성이 이재용에게, 아들에게 재산을 주는 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위한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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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주말 내내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는 서울은, 월요일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을 되찾았다. 항상 그렇지만. 주말에 외출했던 시민들은 불편했다고 한다. 시위 때문에. 휴일은 시위로 몸살을 앓고, 교통은 막히고....

언제나 그랬지만 시민들은 분노 했다. 시위 때문에 교통이 막힌다고.

시위를 왜 하냐, 시위를 좀 조용히 하면 안되겠느냐, 불법시위 근절하라. 건전한 시위문화의 정착..... 언제나 언론과 공권력이 이야기 하는 것이고 우리(나는 빼고)들도 원하는 것이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왜일까. 시위는 왜 하는 것이고, 데모 때문에 불편한 이 생활은 언제까지 해야 할까.

시위란 뭘까.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봤다. 시위라는 항목에는 없고, 데먼스트레이션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데먼스트레이션(demonstration)

요약 : 특정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다수인이 벌이는 집단행동

본문 :
약칭하여 데모라고도 하며, 시위 ·시위운동 ·시위행동이라고 번역한다. 개인이나 조직의 위력을 보이는 모든 시위행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시위를 위한 행진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요구사항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슬로건을 외치면서 공개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위력을 지배자에게 과시하는 한편,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다. 요컨대, 데모는 집단의사의 형성과 표현 및 그것의 전달과 실현 등의 기능을 지닌다.


시위는 개인 또는 조직이 위력으로서 자신의 입장과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시위가 타인의 교통 또는 생활을 방해한다는데에 있다.


왜 시위는 우리를 방해하는가?

현대사회의 발전에 따라 개인과 집단의 국가권력에 대한 요구와 투쟁은 증가한다. 그러한 요구가 정형화 된 것이 바로 민원이다. 이러한 민원은 단순한 증명서 등의 발급부터 각종 인허가의 요청 등으로 세분화되고 이러한 민원은 일정한 법률행위 또는 사실행위로 표현되어서 행정청에 전달되고 행정청의 행정행위에 따라 그 신청 또는 신고에 대한 일정한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나 각종 민원의 처리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민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정치적 의사의 요구 또는 주장 그리고 일반적 또는 특정의 국가정책에 대한 반대의 의사표시 등에 관하여는 행정청의 민원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의사표시의 표출방법과 그 요구의 주장방법이 바로 시위이다.

시위는 타인으로 하여금 위력을, 세력을 과시함으로서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관철시키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1인의 위력 또는 세력보다는 다수, 군중의 위력으로서 이를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은 시위의 기본적인 속성에 속한다. 특히 사회의 기득권층이 아닌 소외계층 또는 소수자들의 경우 최대한의 인원을 동원하여 그들의 주장을 표시함으로서 다수의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 또는 기득권으로 하여금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옳지 못함을 인정케 하여 이를 관철시키는 것은 시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며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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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시위를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의 몇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정당한 주장과 목적
2. 최대 다수의 동원
3. 집권층 또는 권력층에 대한 최대한의 위협
4. 주장되는 의견과 정책의 현실반영

이 4가지 는 시위의 목적이며 수단 또 동시에 목적으로서 기능한다.

이 중에서 2번의 경우 자신의 위력을 보임을 목적으로 하고, 3번의 경우 이 위협의 효율적인 작용을 목적으로 한다. 문제는 이른바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교통의 혼잡 등 여러 타인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찌보면 필수불가결한 시위의 목적이 된다.

앞서 정리한 몇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다수의 위력으로서 권력에 대한 최대한의 위협을 이끌어내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위의 계속이 사회혼란과 국론 분열로 연결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권력의 자각을 요구한다.

권력의 자각. 즉 시위대의 주장과 요구가 소수로서의 주장과 요구가 아닌 듣고 이를 반영할 가치있는 주장이라는 사실을 자각케 하여 기득권의 불편을 감수하고 이를 반영해야할 현실적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이 시위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위는 그 요구 관철의 수단으로서 반드시 타인의 불편을 전제로 한다.


즉, 시위란, 타인을 불편하게 하여 그 불편한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서 일반대중 및 권력으로 하여금 이 시위의 정당성 및 시위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이를 위하여 타인의 불편을 초래하는 것을 그 수단으로 한다. 현대 사회에서 교통과 물류의 정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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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시위는 당연히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다.

시위에 있어 시민의 불편은 당연하고, 이는 시위가 가져야할 당연한 수단이며, 시위의 목적 또한 이러한 불편을 담보로 한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하는 시위는 아이러니 하지만, 현재의 불편을 담보하여야 한다.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시위는 수단을 상실한 목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1인 시위 등 시민의 불편을 최대한 적게하는 시위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시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가장 유용한 수단은 시위대가 시민들로 하여금 그 시위를 통한 불편을 느끼도록 하고 이를 통하여 시위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시위를 통한 교통불편을 강조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그 시위의 내용과 목적으로부터 괴리되게 하고 단지 불편을 주기위한 악의적인 행위로 매도하여 시위대의 주장따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민주적이지 못한 시민들을 만들어낸 지금의 시위문화를 만들어낸 권력과 언론이 과연 우리에게 건전한 시위문화를 위하여 붑법시위를 엄단한다는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시위대의 악의적 행동은 물론 시민들의 반발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위대의 시위 목적의 관철을 위한 시위 본질적 행위인 교통불편의 초래를 악의적으로 보도하여 시위대와 시민을 분리, 이간시키는 권력과 언론은 시위문화의 건전화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시위는 발전한다.

그러나 시위에 의한 불편은 발전하지 않는다. 아니, 발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위에 의한 불편은 시위의 목적달성을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다. 시위는 당연히 우리의 불편을 수단으로 하고 그것이야 말로 시위의 가장 큰 힘이다.


시위때문에 불편하다면,

왜 그 시위가 일어났는지를 생각하여 그것이 옳은 주장인지, 그렇지 않은 주장인지를 따지고 그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어떠한 수단이 존재하는지를 고려하여 현재의 시위상태가 올바른 요구의 주장방법인지가 시위의 불법성을 따지는 근거가 되어야 하며, 이 시위가 주는 불편은 시민이 짊어져야 할 당연한 민주주의의 대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부과된 민주주의를 향한 숙제는 그들의 피가 아니라, 그들의 인내와 참여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피를 요구하지만, 그건 우리 같은 민초 또는 시민들에게는 과분한 영웅의 칭호일 뿐이다. 우리에게 지워진 숙제는, 누군가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릴 때 이를 인내하고 바라보며 우리의 불편이 민주주의를 향한 피의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이번 주말동안 언론은 역시, 주말내내 이어진 시위에 대한 불평불만의 성토장이었다.

시위는 당신에게 불편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건전한 시위문화에는 원활한 교통정책 따위는 없다.


시위하고 데모하라.
< 인터넷 괴담 >

얼마전, 모 클럽의 사이트에 토마토와 관련된 글을 간단하게 하나 올린 적이 있다. 내용을 요약하자면,

토마토는 과일이 아니라 채소라고 한다. 이는 미국 법정에서 그렇게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라고 한다.는 내용으로 떠돌고 있는 잘못된 상식에 대해 쓴 글이었다.


괴담수준은 아니지만, 이런 식의 이야기는 인터넷에 한두개가 떠도는 정도가 아니다.

심각하게는 누가 누구를 상대로 범죄행위를 했는데, 경찰이 조직적으로 그를 비호하고 있다거나 하는 정도로 범죄 수준의 소설에 가까운 낚시글들이 떠다니기도 하고, 러시아어로 인사말 이라면서 이 개새끼야 하는 욕설 수준의 질 낮은 농담이 떠 다니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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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만든 놈이 개새끼다 -_-

문제는 이 처럼 농담으로나 떠도는 이야기라면 별 문제는 되지 않을 것이다(이 러시아어에 관한 내용은 꽤 퍼진 편인데, 사실 이런 농담도 심각한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 사람이 이런 글을 보면 당연히 기분 나쁘지 않겠는가? 소중한 자기 나라의 언어가 한 개념없는 외국인에 의해서 우스운 장난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러면서 우리는 외국의 농담에는 흥분하는데 말이다).

하지만, 그것이 거의 범죄를 조장하는 내용이거나 타인의 금전을 갈취하고자 하는 의도가 있는 경우(얼마전 논란이 되었던 인터넷 앵벌이가 이런 경우에 속한다) 또는 타인의 명예를 심각하게 훼손하는 경우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인터넷의 특성상 그 전파성은 오프라인과 비교하여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빠르다. 한번 유포되기 시작하면 확산은 아무도 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과거에 이라크에서 사망한 故 김선일씨의 살해장면을 정보통신부가 국내 유입을 차단하려 무던한 애를 섰는데도 끝내는 2시간여 만에 포기한 사례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인터넷의 특성은 격지자(隔地者)의 거리를 순식간에 사라지게 하는 정도의 마술같은 능력에 있다. 과거에 기차라고 하는 괴물이 나타났을 때도 인간의 이동거리의 혀경을 불러왔고, 전화가 보급되며 대화자의 거리를 혁신적으로 단축하였지만, 이제 인터넷은 장소, 시간 모두를 순식간에 무의미한 존재로 만들어버릴 정도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인터넷을 떠도는 괴소문은 지금도 끊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인터넷의 더 심각한 문제는 인간에 의해 유형화된 물건으로 전하여 짐에도 불구하고 그 수정과 확대 재생산이 무척이나 간편하게 이루어진다는 점에 있다. 심지어는 이런 현상은 현직 기자들에게서도 나타나는 현상이다. 나는 겨우 지금 쌀밥을 먹었을지 몰라도 한두 단계만 벗어나면 진수성찬에 레드 랍스터를 뜯었거나 기아에 허덕여 식당의 버려진 밥을 집어먹었을지도 모르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수 많은 개작과 가필이 이루어지지만 아무도 그 책임을 지지 않고 결국은 아무런 대응도 무의미하게 만들어버리는 힘. 그것이 인터넷에게는 있다.

이러한 인터넷의 힘을 익명성의 차단이라는 것으로 막아보려는 시도도 있으나, 인터넷은 익명의 힘을 그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사실은 간과한 것일 뿐 실효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최근 대선 시즌을 맞이하여 각종 포털에서 시도하고 있는 제한적 본인확인제가 시행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악플은 쉬지않고 재생산되는 것도 그러한 사실을 반영한다.

인터넷에 의한 이야기의 확대 재생산이 하루이틀 이루어져 온 것도 아니지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 네티즌이 어쩌면 더 문제랄 수도 있다. 이야기는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확대된다. 그것이 어쩌면 이야기의 본질이기도 하다. 우리의 구전 설화들이 그래왔고, 모든 이야기들은 장터나, 작은 모임을 통해 확대되고 소문은 현실로 굳어지기도 했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야기라고 하는 무기물의 생명력이나 다름없다. 인터넷 역시 마찬가지다. 인터넷의 생명은 퍼짐이라고 하는 확산운동이다. 끊임없이 확산되고 널리 퍼진다. 마치 단군이 그랬던 것처럼 홍익긴간 처럼 널리 사람에게 퍼지지 않는 인터넷은 생명이 없다.

인터넷과 이야기가 만나게 되면, 확대되어 재생산되고 그것이 빠른 속도로 퍼지는 것은 당연한 원리다.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위해 인터넷을 접하는 것이다. 보도의 일상화, 사건의 정형화, 그리고 확대의 보편화는 인터넷에서 확산이라는 모터를 달고 당연한 원리로 우리의 생활 곳곳에 파고드는 것이다. 그러나 이를 확인도, 생각도 없이 받아들이는 것은 인간의 본성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을 확대하여 다시 사실인양 보도하거나 믿어버리는 것은 순전히 인간의 탓이다.

이러한 인간의 탓을 해결하기 위해 인터넷을 통제하는 불상사에 대해 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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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클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임 열려 버린 판도라의 상자.

< 가난한 놈들은 투덜대기만 한다 >

왜 우리는 조선일보를 욕하고 기만적이라 욕하는가.

조선일보의 행태에 대해서는 굳이 여러번 떠들 것도 없이, 지난5,6공을 거치면서 권력에 유착해서 얻어냈던 그 화려한 영광을 보면 알 수 있다. 79년만 해도 중앙일보는 물론 한국일보에도 뒤지던 매출액이 어떻게 전두환과 노태우를 거치면서 우리나라 최고의 언론기관으로 부상했던가(당시 동아일보는 석간신문이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매출액이 적었다)

오늘 저 위의 기사를 보면서도 이놈들이 확실히 이면박을 밀어 한나라당 집권에 일조하고 또 예전처럼 권력과 함께 나라 망쳐먹으려 작정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 중심에 또 조갑제가 있다.


얼마전 조갑제는 허무맹랑한 논리로 우리를 경악시키며 또 다시 보수 꼴통으로서의 위치를 확고히 하는 한편, 공개적, 공식적으로 이명박을 확실히 지지하는 듯한 인식을 심어주었다. 그 글이 바로 내 블로그에서 밝힌 바와 같이 < 왜 부자가 가난한 자보다 더 도덕적인가 > 라는 글이다.

이 글을 처음 볼 때만 해도, 조갑제의 말에 귀기울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아니, 그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면 바보였다. 왜? 부자가 도덕적인 것은, 말 그대로 낙타가 바늘 구멍에 들어가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니까. 하지만, 조선일보가 뛰면 다르다. 왜? 조선일보니까.

조선일보는 글부터 대략 한달이 채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 위의 기사를 내 보냈다. 조선일보의 큰형님인 조갑제의 논리를 뒷받침 하기 위한 그리고 나아가 이명박의 깨끗한 부자로서의 삶을 부각시켜 부정부패와 부정축재를 옹호하여 도덕교사가 아닌 대통령을 뽑기 위함이라는 허무맹랑한 논리를 키워가려는 것이다(오히려 도덕교사는 좀 부도덕해도 된다 요즘엔 대학 잘보내는 교사면 장땡이다. 영어교사건, 도덕교사건 그것은 상관 없다)

조선일보에 나온 그림부터 웃기고 기만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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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이보고서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것인가? "절대로 부자가 될 수 없는" 이라니.
부자가 아닌사람 = 투덜대기만 하는 사람
가난한 사람 = 투덜대기만 하는 사람 = 나쁜 사람의 논리를 따라가고 있다.

그렇다면 당연히 부자 = 착한 사람이 되겠지.

조갑제는 그의 청부론에서 이와 같이 밝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富者는 대체로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다. 부자는 우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신뢰성이 강하므로 부자가 되었다. 즉 도덕적이기 때문에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물론 예외적으로 속임수와 뇌물로 부자가 되는 경우가 있다.
  가난한 사람은 신체부자유자나 특별한 가정사정을 제외하면 대체로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신용이 떨어진다.
  부자는 남을 돕는다. 기업을 만들고 많은 사람들에게 일자리와 월급을 준다. 가난한 사람은 남을 도울 수가 없다.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경우가 많다. 이 또한 부자가 더 도덕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조갑제 논리의 가장 큰 오류는 동일선상에서의 비교가 아닌, 차별화된 비교와 비약의 논리라는 점이다. 부자는 남을 돕는다의 반대는 남을 돕지 않는다 또는 돕지 못한다가 되어야 함에도, 더 나아가, 민폐를 끼치게 된다는 비약을 한다. 속임수와 뇌물로 부자가 된 자의 문제는 겨우 물론 이런 경우도 있다는 언급에 머문다.

이러한 조갑제의 논리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사람이 비판해 왔으니 더 비판할 이유는 없다고 생각된다. 이 글에 대해서는 솔직히 어떤 사람도 사족을 달지 못할 정도로 명백한 아전인수격의 황당한 소리였다. 그런데, 이 문제를 다시 조선이 들고 나왔다는 것이 문제다. 이 조갑제의 발언 만으로는 어떤 힘도 생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내 결국 우리는 세뇌될 수 밖에 없을지 모른다. 이유는 조선이 우리에게 소리치는 얄팍하지만 깊은 충고가 있기 때문이다.

투덜대는 당신은 부자가 될 수 없다.



최근의 이러한 부자와 부자론에 관한 글과 기사를 보면, 한 가지 의문나는 점이 생긴다. 우리는 왜 부자가 되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왜 부자가 되어야 할 것이며, 부자가 되어서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에 대하여 지금의 부자와 부자 아빠들은 침묵하고 있다. 어떤 이유에서 부자가 될 것이며, 어떤 방법으로 부자가 될 것인가 그리고 부자란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하는가. 아무도 이러한 문제에는 답을 하지 않는다. 단지, 당신은 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강권할 뿐이다.

우연히 지인에게 [한국의 젊은 부자들]이라는 제목의 책을 얻어 읽은 적이 있다. 한국에서 부자라 일컬어지는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돈을 벌었는가에 관한 책이었다. 당시 베스트셀러였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이 돈을 벌었던 방식은 매우 간단 했다.
불법 도박
알박기
해외(특히 시장자본주의가 이제 겨우 성장하기 시작한 중국과 동남아) 부동산 투기
국내 부동산 투기
골프장 건설

심지어는 친절하게도 불법과 합법을 오가며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을 설명해 주기도 한다. 대부분의 이 책에 관한 서평이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했으나 공염불이었다. 왜 부자가 되어야 하고 부자 이후의 문제는 침묵했다.
오늘 조선일보의 기사도 또한 같다.

조선일보의 부자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옛날엔 우리 집도 부자였는데
2. 전엔 저 땅 다 뽕밭이었는데
3. 회사가 강북이어서
4. 빚도 없이 열심히 모았는데
5. 주가 부동산 폭락해라

이 제목만 봐도 모르겠는가? 조선일보는 투기를 해서라도 돈을 벌라고 하고 있다.
뽕밭이건 뭐건, 농사를 지을 것은 아니지만, 돈이 된다면 밭이건 논이건 사두라는 소리고, 어떤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우리나라 부동산 가격을 잡기 위해 정부가 어떤 노력을 하는지 그건 관심없이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보라고 권유하고 있는 것이 조선일보다.

위의 기사를 잘 읽어보면, 돈을 못버는 당신은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사람이고,
투자 시각도 없이 세상돌아가는 물정에 어둡거나,
현실에 안주하기만 하는 게으름뱅이이고,
돈이 없으면 빌려서라도 투자하지 못하는 소심쟁이에,
주가와 부동산가가 떨어져도 사 둘 수 없는 가난뱅이에 불과하다.

이 모든 논리가, 조갑제의 글에 일치하는 도덕적 부자론이다.
조갑제는 가난이 곧 부도덕이라고 했지만, 조선일보는 한 걸음 더 나아가 가난은 곧 무능이며 투덜이에 신세한탄이나 하는 병신이라고 치부해 버린다.
역시 조선일보는 왜 부자가 되어야 하고, 부자들이 이 사회에서 감당해야할 몫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어쩌면 자기 자신들이 그렇게 더럽고 치졸한 방식으로 축재 해 왔기 때문에 어떠한 답도 낼 수 없는 더러운 인생일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조선일보의 말대로, 투자와 투기를 넘나드는 빠릿빠릿한 인생을 살면 분명히 부자가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어쩌라는 것인가? 그 부자로서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말이다.

그 따위로 부자가 되어 자신과 함께 이 사회를 주무르는 기득권이 되고자 함인가?




조선일보는 절대 아마추어가 아니다. 조갑제 하나만으로는 그들은 힘이 없다. 하지만, 그들에게는 언론이 있다. 그들은 이런 식으로 우리를 기만하고 세뇌한다.

그것이 우리가 조선일보를 저주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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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일왕




조아세

라는 단체가 있다.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세상을 만드는 시민 모임"이다.

조. 아. 세

조선일보 없는 아름다운 새상에 살고 싶다. http://www.joase.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