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79년의 12.12사태 이후 사회는 박정희의 죽음을 딛고,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일반 시민의 생활과 달리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이미 거의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대통령이던 최규하는 벌써 꼭두각시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드디어 종식된 박정희 폭력정치의 막을 내리고, 진정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우리는 이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고 부른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소원하던 민주화 열망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드디어 우리나라도 민주화된 근대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정권을 잡은 신군부로서는 박정희류의 억압정치를 통해 사회 각 부분의 역량을 억눌러야만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대중적인 민주화 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신군부가 선택한 그 본보기는 바로 광주였다.
왜 광주여야 했을까? -
광주는 갑오농민전쟁과 일제시대 당시 학생독립운동의 성지를 시작으로 민중 항쟁의 역사와 전통이 깃든 곳이다. 1929년 11월 3일 일제시대 광주학생운동이 발생한 그날은 아직도 학생의 날로 기념되어 기억되고 있다.
또한, 광주는 야당의 정적 중에서 가장 많은 대중적 지지를 받고있던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기도 했다. 전라도 목포 태생인 김대중은 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 박정희-전두환으로 이어지는 경상도 기반의 정치세력과 함께 우리나라 정치세력의 큰 축을 이루고 있었다. (경상도의 민주화 세력은 거제도를 고향으로 하는 김영삼 중심의 세력이었다)
김대중이나 김영삼이 처음부터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지방 토후세력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나라에서 지역화, 지역기반 정치세력화는 박정희시대로부터 시작되었는다. 박정희라고 하는 초대형의 정치적 걸림돌을 제거하기 위하여 동서를 불문하고 집결되어있던 민주화세력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하여 박정희는 자신의 고향인 경북 구미, 대구와 경남, 부산을 집중 육성하여 경부고속도로의 개통과 부산/대구 직할시의 발전을 이루어 냈으나 상대적으로 전라도의 산업발전을 가로막는 방식을 취하였다. 이로서 2차 산업(제조업)을 통해 부국강병을 이루려는 박정희의 계획은 구미-대구-울산-포항-부산으로 이어지는 산업라인을 구축하였으나, 전라도는 여전히 농업위주의 산업만을 육성하여 상대적으로 낙후되도록 했고, 결과적으로는 전라도의 상대적 박탈감과 경상도의 상대적 우월감에 따른 민주화 세력의 분열로 이어졌다.
(1980년대까지 사회 교과서에서 우리나라 전라도 지역을 단순히 곡창지대로만 표현하고 있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다. 울산의 현대조선소, 포항제철이 박정희 당시에 만들어진 것만 바도 알 수 있다. 1980~1990년대 전라도 지역의 대기업은 금호그룹이 유일한 그룹이었고, 이나마도 1990년대에 금호가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면서 사라졌다. 경부선이 일찍 복선화를 이루었던 것과 달리 호남/전라선은 1990년대까지 여전히 단선으로 상경하는 기차와 하행하는 기차가 만나게 되면 한쪽이 비켜주는 방식이었다. 실제로 평야지대인 호남지방이 공장의 설립이나 교통의 발전에 필요한 모든 기반이 충족한데 비하여(심지어 우리나라 강의 80%가 서쪽으로 흐른다) 산지(태백산맥)가 더 많고 바다가 깊은 경상도 지역의 발전은 상식과는 거리가 있다). 지금도 경상도의 경우 대구, 부산, 울산 등 3개의 광역시가 있지만, 전라도에는 광주가 유일하다.
광주는 이러한 배경 속에서 경상도를 지역기반으로 선택한 기득권 세력에 대해 타 지역에 비해 상대적으로 반감이 많았고(실제로 당시 정권의 실세는 대부분 경상도 출신이기도 했다), 민주화의 열망도 강하였다. 정권의 입장에서는 광주만 제압할 수 있다면, 전라도 세력의 대부분을 괴멸시키고 경상도에 대해서는 경상도의 상대적 우월감을 자극하여 정국의 안정과 함께 안정적인 독재화를 이룩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감정에 호소하는 국론분열과 독재체제 강화 방식은 이란, 이라크, 이디오피아, 나이지리아 등 저개발 신생 독립국에서 많이 사용하던 방식으로, 이란과 이라크 등 회교국에서는 수니퐈와 시아파의 갈등을 이용하는 경우가 많고, 아프리카 신생독립국에서는 2개의 대립되는 부족의 관계를 이용하는 방식을 취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최근의 발칸반도와 유고, 알제리 등에서는 민족주의를 통한 인종청소의 방식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1980년 3월에 각급 대학에서 새학기가 시작되자, 박정희 정권 당시 위축되었던 학생운동과 대학의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듯하였다. 각 대학별로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하고 긴급조치로 학교를 떠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돌아오면서 대학가에 다시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노동현장에서도, 노조 민주화, 근로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조직 정비에 나서고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김대중은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에는 사면복권되어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김종필(김종필은 이미 박정희 당시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숙청을 당한 상태였으나, 신군부에 의해 다시 정치활동을 재게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활동이 가능해진 민주화 세력은 1980. 5. 14.광화문과 종로 등에 5만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명이 운집하여 계엄 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로써 이른바 '서울의 봄'은 절정에 달하는 듯하였다.
- 계엄 확대 -
신군부는 학생의 시위가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서, 1980.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선포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이었지만, 5.17의 계엄 확대는 제주도까지 포함하는 확대 선포 였다. 지금까지 민주화세력이 요구한 계엄 철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조치였고, 이어서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 해제와 유신잔당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전국적으로 벌인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빌미로 시위를 배후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 등으로, 고려대 이문영(李文永)명예교수 언론인 송건호 한겨레신문 고문 민족사학자 함석헌옹 민족시인 고 은 한승헌 전 감사원장 이해동, 문익환 목사. 한화갑, 김옥두, 김상현, 이해찬, 김홍일, 설 훈(이후 국회의원이 됨) 이택돈, 한완상, 송기원, 이 석, 예춘호, 김종완, 이호철, 윤보선 전 대통령은 물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대표였던 김대중 등 26명의 민주인사와 정치인들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전격 체포, 수감하였다.
또한,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 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작전명 : 화려한 휴가
- 5.18 -
광주에서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고 있었다. 18일 일요일 아침 10시 비상계엄의 확대 소식을 들은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했는데 공수 부대의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들과 일반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당시 공수부대의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 최근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시민까지 학생들의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20일에는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지며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민주화요구 시위를 신군부의 거짓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불순 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조작해 보도한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또한 21일에는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하면서 계엄군에 대항한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시민군은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한 틈을 타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민주화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민군대표를 조직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무정부상태였던 이 기간동안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민주항쟁당시 광주를 시민들의 자치가 실시된 빠리 꼬뮌당시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새벽,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대부분 살해하고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당시 정부 발표로는 사망 191명 부상자는 852명이었다.(군인 사망자는 22명, 경찰은 4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9명은 군인간 오인사격으로 사망. 정확한 통계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www.518.org/main.html?TM18MF=A030106 참조)
광주항쟁 일지
5월 17일 토요일 21:40 -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5월 17일 토요일 24:00 -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5월 18일 일요일 09:40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5월 18일 일요일 10:00 - 전남대 주둔 계엄군과 전남대생 간 첫번째 충돌 및 부상자 발생
5월 18일 일요일 10:20 -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
5월 18일 일요일 15:40 - 금남로에 계엄군 및 시위진압 전투경찰대 배치. 시위대 강제 진압
5월 19일 월요일 03:00 -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
5월 19일 월요일 16:30 - 게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5월 19일 월요일 20:00 -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5월 20일 화요일 10:20 -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은 채 마구잡이 구타 당함.
5월 20일 화요일 18:40 - 택시 및 버스 200여대가 차량 경적 시위.
5월 20일 화요일 20:10 - 시위대, 도청으로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5월 20일 화요일 21:05 -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5월 20일 화요일 21:50 -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보도한 광주MBC 방화
5월 20일 화요일 23:00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2명 사망
5월 21일 수요일 13:00 - 도청앞 광장에서 계엄군 공식 발포 개시.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기 시작함.
광주, 금남로
자세한 광주 항쟁 일지
· 5월 17일 (토요일, 맑음)
· 21시 40분 : 비상국무회의, 비상계엄 전국확대 의결
· 23시 00분 : 민주인사, 복적생, 학생운동 지도부 등 예비검속
· 24시 00분 : 비상계엄 전국확대, 광주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및 학생 연행
· 5월 18일 (일요일, 맑음)
· 9시 40분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 10시 00분 : 학생들이 "계엄해제하라" "휴교령 철폐하라"는 구호를 외치며 항의시위
· 10시 15분 : 곤봉을 휘두르는 공수부대원들의 진압으로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짐.
· 10시 20분 : "금남로로 가자"는 구호와 함께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하기 시작
· 15시 40분 : 유동 3거리에 공수부대가 등장하면서 진압작전 감행
· 19시 02분 : 계엄사령부, 광주지방 통행금지시간이 저녁 9시로 앞당겨졌다고 발표
· 5월 19일 (월요일, 오후부터 비)
· 3시 00분 : 증파된 11여단 병력, 광주역 도착
· 9시 30분 : 시민들이 계엄군의 무자비한 탄압에 맞서 임동, 누문동 파출소 방화
· 10시 00분 : 시민들 수가 점차 불어나면서 금남로에서 공수부대원들과 투석전 전개
· 14시 40분 : 조선대로 철수했던 공수부대가 다시 투입되어 무리한 진압작전 전개
· 15시 00분 : 시내 기관장 및 유지들, 회의를 갖고 시위 진압을 완화하도록 건의
· 16시 30분 : 계림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생 김영찬이 계엄군의 총에의해 부상
· 20시 00분 : 수만명의 시민들 "전두환 타도" 외침.
· 5월 20일 (화요일, 오전에 약간의 비)
· 8시 00분 : 고등학교 휴교조치
· 10시 20분 : 카톨릭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힌 채 심하게 구타당함.
· 10시 20분 : 공수부대와 시민간의 공방전 계속
· 18시 40분 : 금남로에서 200여대의 택시가 전조등을 켜고 경적을 울리며
· 18시 40분 : 차량시위를 벌이자 시위대 분위기 고조
· 20시 10분 : 시민들이 도청을 향해 금남로, 충장로, 노동청 방면에서 공수부대, 경찰과 대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