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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광화문 사거리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대형컨테이너 20개가 길을 막고 있다. 나 역시 오늘 아침에 출근 중에 보고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면서, 정부종합청사와 미국대사관이 있는 이 길에 저렇게 큰 대형컨테이너가 20개나 들어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저 컨테이너의 용도가 '국민의 진입을 막기위함'이라는 사실은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명박 정부 100일. 그 100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행동하며, 부르짖기 때문에,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웬만하면 이명박 정부의 현재와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성, 그리고 전망에 대한 이야기나 정부를 성토하는 질타성 글을 올리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상황에서 똑같이 정부를 욕하는 목소리 하나 더 보태는 것 보다는 행동하고 인식하며 기다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단순 논리였다. 하지만, 오늘의 사태를 보면서는 (이 정도 가지고 사태라고 할만 하겠냐마는, 이건 사태다.) 침묵하는 다수니 하는 웃기는 소리 보다는 한 마디라도 더 보태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부와 언론의 달라진 현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인터넷의 힘을 간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퍼지는 말들, 그것이 괴담이건 아니건, 그것을 control 하거나 monitoring할 수 있는 어떠한 힘이나 조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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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못잡는 시중씨



(사실 이 말은 모 기관장이 퇴임 후 어느 강연회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 흔한 괴담들을 말하는 것이라 치부하며 우습게 볼지는 몰라도, 이제 이 것이 이명박 정부의 현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가지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 부터 언론에 대한 장악을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설정했다. 이는 방통위원장으로 최시중이라는 최측근을 전면 배치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시중이 어떤 인물이고,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냐를 판단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이명박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또는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열쇠였으니, 이러한 이명박정부에 대한 언론관의 평가는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이버는 평정, 다음은 폭탄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내부의 은밀한 목소리가 밖으로 퍼지기는 했지만, 인터넷에 대한 심각한 개입을 시사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이 중심의 인터넷과는 괴리되어버렸다.
 
이 점에서 전에 썼던 글에서 한 내용을 인용해 보자.

< 투옥된 블로거, 최장기 투옥 언론인으로 신기록 수립할 예정 >

Josh Wolf라는 블로거가 샌프란시스코의 경찰차가 불이 붙는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의심되는(실제 촬영이 되었는지는 기사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 필름을 연방검사에게 제출하지 않고, 연방대배심에도 협력하지 않은 죄목으로 법정 모독이 인정되어 투옥. 미국 역대 최장수의 투옥 언론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고 한다.

얼핏 전혀 연관이 없는 이 두 가지 사실은 2007년, 아니 그 이전부터의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된다.
먼저, '전통적' 언론인이 아닌 블로거가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되었다는 것. 즉 개인 미디어의 언론화를 뜻한다. 제도권에서도 진정한 언론으로서 개인 미디어가 자리잡은 것.

참고할만한 글 - < 블로거에 언론의 지위를 허하라 - John Conyers(美, 민주당 하원의원) >

- 개인의 공공화, 공공의 개인화. 그리고 개인미디어로서의 블로그 (2007.2.8 작성)-

지금 이명박 정부는 언론을 잡기 위해 조중동과 경향, 한겨레로 대표되는 좌우 양익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고, 인터넷에 대해서는 네이버와 다음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포털을 어떻게 콘트롤 할 것인가에 역량을 집궁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통적 시각의 언론관이 이미 용도폐기된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의 블로거 뉴스에서 보는 바와 같이,이미 신문 언론 권력은 인터넷 언론과 지상(紙上)언론으로 양분되었고, 방송언론 역시 MBC, KBS가 아닌 인터넷방송으로 일부 권력이 이동되었다. 인터넷 포털 역시 지금까지 인식되어오던 뉴스 전달자의 개념을 탈피하여 적극적인 Gate Keeper로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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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말해놓고도 뭔가 뿌듯한 두언씨

위에 인용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국이나 일반적인 우리 사회 Net People의 입장에서는 이미 블로거는 언론인이며 그 하나하나의 정보는 언론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고, 또한 자격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명박 정부는 게시판에서 노는 실업자나 할일 없어 돈만 쥐어주면 되는 애들로 치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어떤 언론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조중동이나 경향, 한겨레, MBC, 또는 KBS에서 성공하더라도 이는 반쪽짜리의 성공에 불과하다. 훨씬 더 많은 언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권의 성패는 어쩌면 언론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내었다가 지난 노무현 정권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운 바다. 이명박 정부의 전통적이고 전근대적인 언론관의 개혁은 이명박 정부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은 소문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소문을 증폭할 수는 있고, 괴담도 우표할지 모르지만, 그 괴담을 현실화 할 가상 현실도 가지고 있다. 그저 괴담의 유포자를 잡아넣었다고 해서 언론에 대한 할 바를 다했다는 것은 매우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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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박았다!


이 언론을 장악 하겠다고 하는 정부의 시각이다.

이명박 정부가 가장 실패한 정부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언론에 대한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통제적 권력의 실천에 있다. 그들이 정권의 나팔수 라고 폄하했던 국정홍보처를 폐지하는 바보같은 짓을 하면서도 언론을 장악해서 그 상부구조를 뒤흔들어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결국 진시황과 호해에게 있어서의 환관 조고의 방법만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00만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것 보다, 당연히 이명박 한 명의 귀와 눈을 가리는 것이 쉽다. 언론이 5,000만이 되어버린 오늘의 블로그 시대에 언론의 입을 막고, 국민의 귀를 막는 것은 북한식의 5호담당제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감시체제다. 결국 막을 필요가 있는 언론의 길은 이명박으로 통하는 그 한개의 길이다.

어쩌면 이명박이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헛소리해대는 것은 이렇게 뚫어져 버린 언론의 방파제를 내버려둔 채 이명박으로 통하는 한개의 작은 샘물만을 남겨둔, 정두언의원의 지적이 옳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발언의 의도는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이 절대로 뇌 용량이 2MB밖에 안되는 바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기는 치지도 못했고, 그 많은 재산이 아직 남아있을리도 없다) 하지만 제한된 조건하에서 누구든지 제한된 판단 밖에는 내릴 수 없다. 그 길이 차단된 것이다. 성냥개비 두개만 들고는 아무도 담배를 태울 수 없다. 담배가 없으니까.

최소한 인터넷만 봐도 이러지는 않는다 라는 말이 너무나 실감나는 요즘

또 하나의 언론, 그리고 이른바 대안언론으로서 이제 블로그가 일어나거나, 이명박이 그리로 내려올 때다.


레고 쌓듯이 컨테이너 몇 개 쌓아올린다고 그 물결이 멈출 것이라 생각한다면, 조중동만을 너무 열독한 결과라고 밖에 몰 수 없다.

이미 언론을 장악하려는 이명박은 실패했다. 아니, 이명박을 얼굴로 내세운 극우 보수주의자들이나 친미 사대주의자들은 이미 20세기에 멈춘 세계관 속에 도태되어버렸다.

이명박,

언론의 소리를 들으라.

오늘 그 언론이 광화문 컨테이너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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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불쌍한 경찰이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조선일보 기사의 사진


이명박의 지지율은 날로 더 떨어져가고 있고, 이명박정부는 드디어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선언했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드디어 이명박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명박이 두려워 하는 것,

그것은 "노무현" 처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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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노무현이 왜 그토록 국민들과 멀어지고 끝끝내는 욕먹은 걸로만쳐도 무병장수 할 수 있을 정도의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건, 그 내용이 어떠헸건 그것이 정당했는가의 여부를 떠나 노무현이 실패했던 것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모두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보에게는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의 참전과 FTA라고 하는 우파와 신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이 진보로 취급되던 노무현에 대한 배신의 의미로서 욕먹어야 하는 대통령이었다면, 보수세력에게 있어서는 반미와 친북이라는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의 수괴로 낙인찍혔으니 사면초가에 아군은 하나도 없는 형국이었고 결국은 '노무현스럽다'라는 신조어에나 등장하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어버렸다(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나는 약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

이명박이 두려운 것은 지금 중고생들이 촛불 들고 나와 한소리 해대는 것이 아니다. 어짜피 그네들이야 입시가 가까와오고 기말고사가 가까와 온다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저 촛불시위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명박씨가 이런 철없는(?) 중삐리 고삐리들 때문에 가던 길 멈춰 불도저 시동 끄실 양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촛불시위에 대해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하다 못해 끝내는 물대포 쏘아가며 정공법이 아닌 신속한 진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조선일보 기사 중에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떴다.

< 취객에도 맞는 경찰 공권력 >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취객 등 경찰 지구대에 끌려온 사람들의 행패에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도, 결국은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당하고 산다는 불쌍한 스토리다. 거기에 덧붙여 외부 전문가의 말을 아래 처럼 빌려 한 것은 이 사실이 얼마나 심각한 현상인지 알려주는 친절한 기사다.

경찰대학교 행정학과 표창원 교수는 "공권력 집행의 약화는 경찰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안녕과 평온의 문제"라며 "공권력이 권위를 잃으면 결국 피해는 법을 지키는 사회적 다수에게 돌아온다"고 말했다.


 얼핏 보면 그냥 경찰공무원의 힘겨운 업무와 그를 걱정하는 신문기사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 기사가 한창 인터넷에 올라온 시간인 2008년 5월 24일 00시 27분에 일어났던 일들과 같이 본다면 이것이 그리 녹녹치 않은 조선일보의 이명박씨에 대한 훈수두기라고 생각된다.

한겨레 신문에 이미 살수차가 동원되어 거리로 진입한 촛불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살수와 연행이 있었다는 기사가 떴고 오후 10시 20분에 드디어(?) 집회 참가자들이 거리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추가되었고,  11시50분에는 살수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결국 새벽에는 폭력사태까지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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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왜 뜬금 없이 "불쌍한 경찰"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갑작스럽게 가져왔을까? 최근에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는 사실들 때문에 경찰이 동정의 대상이 되었던가? 오히려 경찰의 기강해이가 문제되거나 전직경찰의 범죄 가 문제되고, 각종 성희롱, 성추행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경찰의 태도가 문제되긴 했지만, 경찰의 고충에 대해 갑작스럽게 환기시켜 우리를 경찰을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로 몰아넣을 필요는 없던 시기였다.(비록  경찰에겐 안 좋은 소식이지만, 경찰을 탓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생각건데, 이러한 갑작스런 조선일보의 기사는 급조되었다기 보다는 이미 작성되어 때를 기다렸다는 느낌이든다. 이미 오래전 부터 기획된 기사이며, 그저 때를 맞춰 기동취재반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경찰에 대한 폭력을 잠깐 취재했다는 느낌 뿐이다.

경찰에 대해 조선일보가 연민의 정을 느꼈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이지만 이 기사는 오직 한명을 위한 기사인 듯 하다. 명박씨, 잘 보고 있는가?


조선일보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는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명박아, 그것밖에 못하니?
좀 더 쎄게.




이명박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노무현 처럼 되는 것이라면, 노무현처럼 진보로부터도, 보수로부터도 똑같이 욕을 먹어 끝내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어 '명박스럽다'라는 단어가 또 한 가지의 뜻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이라면, 노무현 처럼 이렇게 조선일보가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지금은 진보세력과 아이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불굴의 소시민들 나부랭이(?) 들이 나와 겨우 촛불 들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고 조선일보 앞의 시위대가 끊임없이 이어지면, 조선일보는 강경하게 나올 수 있다는 소리다.

경찰, 뭐하니, 화끈하게 밟아버려!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순간, 어느샌가 낮에는 시청광장을 중심으로한 보수단체들이 나와 빨갱이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우리 중, 고삐리들을 걱정하며 타도 이명박을 외칠 것이고, 밤이 되면 적색 빨갱이와 그 사주를 받은 시민들이 광화문에 모여 불을 지펴 그의 퇴진을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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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존나 말리고 싶은 정갑씨



우리에게 중도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명박을 지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니 중도에 서서 "글쎄..."라고 말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낮과 밤을 양분한 보수파와 진보를 가장한 유사진보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있을때 한번 더 이야기 해 보자)가 과정은 다르더라도 결국은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면 이명박은 욕하면서 배우는 어린 자식 처럼 노무현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보수도 그를 물러나라 하고, 진보도 그를 떠나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명박이 진짜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래도 병신 저래도 병신 소리듣는 것은 이골이 난 상태니 상관 없지만, 보수도, 진보도, 그리고 군부와 조선일보까지 등을 돌리게 되면 이명박 정부는 더이상 지지기반 없이 떠나야 하는 아쉬운 옛 연인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전에도 잠시 얘기를 했지만 조선일보는 단순히 기사만 싣지 않는다. 그들은 고도의 편집권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찌라시다. 그들이 뱉어내는 기사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보수가 어떻게 우리의 입을, 머리를 귀를 마비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최상의 교과서다.

이명박은 토요일 한밤중에 한마디의 육중한 경고를 들은 것이다.

이명박이 움직여 저 빨갱이를 소탕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안녕과 평온의 문제"는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조갑제와 같은 평화와 진리의 사수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진보와 보수는 결코 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이 두려워 하는 것은 그들이 끝내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같이 결론을 내는 것은 단 하나,

이명박 퇴진 이다.


이명박에게 있어서 보수파는 어쩔 수 없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일 수 밖에 없다. 서정갑의 예비역 대령연합회나 재향군인회 등 군부에서 파생된 보수주의 단체는 군대 미필자인 이명박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계속 거두지 않고 있는 실정에서 기독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아직 남긴 남았지만, 그들도 혼란하고 빨갱이의 마수에  죽어가며 도탄에 빠진 가련한 백성들이 시끄럽게 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엄정한 법집행을 시급하 시행하지 않는다면, 6.25때 어떤 고지의 전투처럼 낮과 밤이 바뀐채로 우리는 진보와 보수의 끊임없는 퇴진 소리를 들어줘야한다.


이명박은 아마 이번 시위에서 계속적으로 과격하지만 조용하게 진압을 시도할 것이다. 물론 수 많은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고 어쩌면 한 두명의 치명적인 희생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물타기 역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그것은 양쪽으로 부터 비난을 받는 노무현과 같은 존재로 전락할 자신을 참을 수 있는 용기가 이명박에겐 없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막내로 전락해 버린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서 이슈가 되었다.

< 함부로 '삽질'하다 허리망친다 >

동아일보도 걱정이 되었나 보다.


이명박 무엇이 두려우랴!!!
덤벼라.


하지만, 이것은 알아두셔야 한다.

우리가 쪽수가 더 많다. 유남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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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조선일보


주말 내내 시위로 몸살을 앓았다는 서울은, 월요일 아침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평온을 되찾았다. 항상 그렇지만. 주말에 외출했던 시민들은 불편했다고 한다. 시위 때문에. 휴일은 시위로 몸살을 앓고, 교통은 막히고....

언제나 그랬지만 시민들은 분노 했다. 시위 때문에 교통이 막힌다고.

시위를 왜 하냐, 시위를 좀 조용히 하면 안되겠느냐, 불법시위 근절하라. 건전한 시위문화의 정착..... 언제나 언론과 공권력이 이야기 하는 것이고 우리(나는 빼고)들도 원하는 것이지만 지켜지지 않는다. 왜일까. 시위는 왜 하는 것이고, 데모 때문에 불편한 이 생활은 언제까지 해야 할까.

시위란 뭘까. 네이버 백과사전에서 검색해 봤다. 시위라는 항목에는 없고, 데먼스트레이션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데먼스트레이션(demonstration)

요약 : 특정한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하여 다수인이 벌이는 집단행동

본문 :
약칭하여 데모라고도 하며, 시위 ·시위운동 ·시위행동이라고 번역한다. 개인이나 조직의 위력을 보이는 모든 시위행동을 통틀어 일컫는 말이지만 시위를 위한 행진 자체를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요구사항을 적은 플래카드를 들고 슬로건을 외치면서 공개적으로 의사를 표시하고 위력을 지배자에게 과시하는 한편, 여론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행해진다. 요컨대, 데모는 집단의사의 형성과 표현 및 그것의 전달과 실현 등의 기능을 지닌다.


시위는 개인 또는 조직이 위력으로서 자신의 입장과 요구사항을 관철시키기 위한 행위로 정의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시위가 타인의 교통 또는 생활을 방해한다는데에 있다.


왜 시위는 우리를 방해하는가?

현대사회의 발전에 따라 개인과 집단의 국가권력에 대한 요구와 투쟁은 증가한다. 그러한 요구가 정형화 된 것이 바로 민원이다. 이러한 민원은 단순한 증명서 등의 발급부터 각종 인허가의 요청 등으로 세분화되고 이러한 민원은 일정한 법률행위 또는 사실행위로 표현되어서 행정청에 전달되고 행정청의 행정행위에 따라 그 신청 또는 신고에 대한 일정한 효과가 발생한다. 그러나 각종 민원의 처리에 대해 불만을 가지거나 민원의 대상이 되지 않는 정치적 의사의 요구 또는 주장 그리고 일반적 또는 특정의 국가정책에 대한 반대의 의사표시 등에 관하여는 행정청의 민원으로 해결되지 않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이러한 의사표시의 표출방법과 그 요구의 주장방법이 바로 시위이다.

시위는 타인으로 하여금 위력을, 세력을 과시함으로서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관철시키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그러기 위해서는 1인의 위력 또는 세력보다는 다수, 군중의 위력으로서 이를 행사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것은 시위의 기본적인 속성에 속한다. 특히 사회의 기득권층이 아닌 소외계층 또는 소수자들의 경우 최대한의 인원을 동원하여 그들의 주장을 표시함으로서 다수의 권력을 가진 집권세력 또는 기득권으로 하여금 그들을 무시하는 것이 옳지 못함을 인정케 하여 이를 관철시키는 것은 시위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며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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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시위를 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다음의 몇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정당한 주장과 목적
2. 최대 다수의 동원
3. 집권층 또는 권력층에 대한 최대한의 위협
4. 주장되는 의견과 정책의 현실반영

이 4가지 는 시위의 목적이며 수단 또 동시에 목적으로서 기능한다.

이 중에서 2번의 경우 자신의 위력을 보임을 목적으로 하고, 3번의 경우 이 위협의 효율적인 작용을 목적으로 한다. 문제는 이른바 이러한 과정에서 일어나는 교통의 혼잡 등 여러 타인의 불편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찌보면 필수불가결한 시위의 목적이 된다.

앞서 정리한 몇 가지 사실을 종합해 보면 다수의 위력으로서 권력에 대한 최대한의 위협을 이끌어내고 이를 반영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시위의 계속이 사회혼란과 국론 분열로 연결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권력의 자각을 요구한다.

권력의 자각. 즉 시위대의 주장과 요구가 소수로서의 주장과 요구가 아닌 듣고 이를 반영할 가치있는 주장이라는 사실을 자각케 하여 기득권의 불편을 감수하고 이를 반영해야할 현실적 필요를 깨닫게 하는 것이 시위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위는 그 요구 관철의 수단으로서 반드시 타인의 불편을 전제로 한다.


즉, 시위란, 타인을 불편하게 하여 그 불편한 상태를 지속시킴으로서 일반대중 및 권력으로 하여금 이 시위의 정당성 및 시위대의 주장에 귀를 기울이게 하고 이를 위하여 타인의 불편을 초래하는 것을 그 수단으로 한다. 현대 사회에서 교통과 물류의 정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는데 있어서 가장 유용한 수단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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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 시위는 당연히 시민의 불편을 초래한다.

시위에 있어 시민의 불편은 당연하고, 이는 시위가 가져야할 당연한 수단이며, 시위의 목적 또한 이러한 불편을 담보로 한 것이다.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하는 시위는 아이러니 하지만, 현재의 불편을 담보하여야 한다.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시위는 수단을 상실한 목소리에 불과한 것이다.


물론, 1인 시위 등 시민의 불편을 최대한 적게하는 시위도 있을 수는 있다. 그러나 시위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가장 유용한 수단은 시위대가 시민들로 하여금 그 시위를 통한 불편을 느끼도록 하고 이를 통하여 시위대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도록 하는데에 그 목적이 있다.


시위를 통한 교통불편을 강조하여 시민들로 하여금 그 시위의 내용과 목적으로부터 괴리되게 하고 단지 불편을 주기위한 악의적인 행위로 매도하여 시위대의 주장따위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는 민주적이지 못한 시민들을 만들어낸 지금의 시위문화를 만들어낸 권력과 언론이 과연 우리에게 건전한 시위문화를 위하여 붑법시위를 엄단한다는 말을 할 자격이 있을까?

시위대의 악의적 행동은 물론 시민들의 반발을 일으킨다. 그러나, 시위대의 시위 목적의 관철을 위한 시위 본질적 행위인 교통불편의 초래를 악의적으로 보도하여 시위대와 시민을 분리, 이간시키는 권력과 언론은 시위문화의 건전화에는 전혀 기여하지 못한다.

시위는 발전한다.

그러나 시위에 의한 불편은 발전하지 않는다. 아니, 발전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시위에 의한 불편은 시위의 목적달성을 위한 기본적인 수단이다. 시위는 당연히 우리의 불편을 수단으로 하고 그것이야 말로 시위의 가장 큰 힘이다.


시위때문에 불편하다면,

왜 그 시위가 일어났는지를 생각하여 그것이 옳은 주장인지, 그렇지 않은 주장인지를 따지고 그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한 방법으로서 어떠한 수단이 존재하는지를 고려하여 현재의 시위상태가 올바른 요구의 주장방법인지가 시위의 불법성을 따지는 근거가 되어야 하며, 이 시위가 주는 불편은 시민이 짊어져야 할 당연한 민주주의의 대가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대중에게 부과된 민주주의를 향한 숙제는 그들의 피가 아니라, 그들의 인내와 참여다.

민주주의는 누군가의 피를 요구하지만, 그건 우리 같은 민초 또는 시민들에게는 과분한 영웅의 칭호일 뿐이다. 우리에게 지워진 숙제는, 누군가 민주주의를 위해 피를 흘릴 때 이를 인내하고 바라보며 우리의 불편이 민주주의를 향한 피의 길에 도움이 될 수 있는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이번 주말동안 언론은 역시, 주말내내 이어진 시위에 대한 불평불만의 성토장이었다.

시위는 당신에게 불편을 요구한다. 그것은 당연하다.

건전한 시위문화에는 원활한 교통정책 따위는 없다.


시위하고 데모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