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가 당선되었다.
미국은 역사상 첫 흑인대통령의 탄생에 기대반 걱정반... 이 아니라 새로운 희망을 보고 있다. 물론 우리도 얼마전에 그런 경험이 있다. 당시엔 우리가 뭘 몰라서 그랬던 거니 용서하자 -_-


오바마의 당선에 가장 웃기지도 않는 반응을 보이며 米합중국 코리아 스테이트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시는 두어분의 인생인지 뭔지를 소개해 보자.

사실 오늘 아무 말 않고 지나치려 했는데 참을 수가 없다.

1. 우리나라의 대통령

오바마의 비젼과 자신의 비젼이 비슷하다고 생각하는 대통령.
곧 우리 대통령께서 일개 주지사가 되시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앞선다.

정반대의 길로 가신다는 점에서만 비슷하다고 생각되는데,  거기서 유사점을 찾아내시는 대통령, 아니 주지사 후보께 존경심만 우러날 따름.
보수적 성격의 언론 조차도 마찰이 불가피하다는데, 혼자 저렇게 분석하시니 뭐 할말이 없다


2. 조갑제옹

16년간 5만7천번 애널서킹을 해오신 달인

아직도 살아계시는 조갑제 옹.
진보와 보수에 대한 새로운 정의와 함께 오바마를 끌어안는 용기를 보여주시다.
좌파가 자유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 루즈벨트는 친소련적 인사를 기용했지만 좌파는 아니라는 점, 등등 우리가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리버럴(매우 고무적인 단어가 아닐 수 없다)한 견해를 뿜으며 또 한소리 하셨다.

그렇다, 조갑제 옹의 말대로, "우리의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고 역설하시며, 우리의 운명이 미국의 애널서킹이라는 점을 다시 환기시키셨다.




3. 보수언론사들


뉴시스의 비교기사는 도대체 이들의 상상력이 어느수준인가를 보여주는 역작.
SBS는 역시 시방새라는 이름에 걸맞는 훌륭한 기사로 응답
노회찬 전의원을 따돌리고 국회에 입성한 내가 가장 젊은 사기꾼으로 분류해 드린 한나라당의 홍정욱 의원이 경영하던 헤럴드 역시 멋진 기사로 보답하고 있다.

내가 웃는게 웃는게 아니야

물론 아직 정신 못차린 언론사들은, 탐욕스런 전라도 깽깽이들과 비교해 버리는 만행을 저지르긴 했다.






아,
내가 사회적 지위도 있는데, 욕은 할 수 없으니, 장관급의 고급 언어로 표현하자면,

씨X, 성질이 뻗쳐서 정말.
찍지마, 찍지마! 씨X 성질이 뻗쳐서 정말..


앞으로 한나라당과 그 일당들, 선거때 찍지마 제발.




< 어제 시사 투나잇 - 숙경미 "18대 총선은 뉴타운 선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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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어떤 블로거가 < 가난한 사람들은 왜 부자를 위해 투표하나 > 라는 글을 올렸다.

사실, 이 내용은 그리 생소한 것이 아니라, 이미 2006년에 출간된 미국의 인지언어학자인 조지 레이코프(언어학자로 우리에게 많이 알려진 노암 촘스키의 제자로, 인지언어학의 창시자라고 한다.)의 [ 코끼리는 생각하지마 ]라는 책에 충분히 언급되어있는 내용을 우리식으로 재구성한 내용에 지나지 않는다. 다른 점이 있다면, '머리로 이해되는 진보의 상식과 언어'와 '가슴으로 이해되는 보수의 상식과 언어'라는 상반된 개념으로 조지 레이코프의 '자상한 부모'와 '엄격한 아버지'를 치환하고 있다는 것 정도. 언어가 가지는 '프레임'에 대한 쉬운 해설이 가미된 글이었다.

하지만, 난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얼마나 적용될 수 있는 '프레임'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을 가지게 되었다. 미국이라고 하는 초강대국의 가난한 자들이 미국의 국민으로서 가지는 언어의 프레임과 우리의 그것과는 다를 수 밖에 없고, '세금 구제'와 같은 모순된 언어의 오류가 우리에게 얼마나 빈번하게 사용되는가 또는, 대통령의 한마디 한마디를 통제하고 분석하는 행위가 우리 언어에서 영어만큼 이루어질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서는 다른 분석이 필요하다.

하지웅씨는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는 이렇게 이야기 한다.
가난한 사람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 정당을 지지하는 이유는, 그들이 부자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부유함이나 풍요로움 같은 부자의 가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틀린 말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어제의 시사투나잇에서 보는 것 처럼, 부자에게 투표한 가난한 자들은 "뉴타운"이라는 신포도를 먹기위해 표를 던졌다. 정확하게는 땅값이 올라가고 집값이 올라가길 바라며 표를 던졌다. 물론 모두 속아버렸지만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에,
 
또한 그와 함께 수반돼 연상되는 보수적 언어를 ‘옳은 것’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누가 혹은 어떤 정당이 서민을 대변하고 말고는 고려 대상이 아니다.
라고, 약간은 엉뚱하게 변해 버린 것은 조금 이해되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우리의 언어는 미국의 그것처럼 다의적이거나 중의적인 경우가 많지 않다. '언어'를 가슴으로 또는 '머리'로 인식한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우리 선거의 결과를 보면, 그리고 우리 시대의 가난한 자들이 부자를 위한 정책과 부자를 위해 투표하는 것은, 매우, 불행하게도, "위선적"이다. 그들은 정의와 도덕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런 것 따위는 우리 서민이나 중산층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들은 항상 도덕과 정의를 말하지만, 그것이 가지는 어떠한 정치적 가중치도 그들에겐 필요없다. 오직 이미 가해진 정치적 결단에 대한 잘 꾸며진 포장지로만 기능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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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박의 당선, 최연희의 당선, 이상득의 당선에서 보는 바와 같이 그들에게 판단 기준이 되는 것은 도덕이 아니라, 이른바 능력으로 표현되는 '나에게 안겨줄 이익'이다. '우리'에게 안겨줄 이익이 아니라, "나"에게.

이번 뉴타운 헤프닝을 보더라도(이것이 헤프닝일 수 밖에 없는 것은, 말도 안되는 공양을 가지고 당선된 자들이 수없이 많지만, 아무도 그로 인한 선관위나 유권자들의 제재를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누가 어떠한 가치와 어떠한 이념을 가지고 왔는지에 대해 고민하고 걱정하며 그 지향점을 찾아가는 사람은 소수다. 이번 총선에서 민노당과 진보신당의 득표율이나 당선율을 보아도 마찬가지다. 강기갑의원의 재선은 물론 축하할 일이나, 그 또한 낙후된 농업 도시인 사천에서 농사를 짓는 대부분의 농민에 대한 수익적 공감대의 형성 이외에는 어떤 의미도 없다. 이방호 보다는 강기갑이 농업의 발전을 위해서 사천 주민들에게 더 이익이었다는 의미 외엔 없다. (물론 사천의 투표성향과 서울의 투표성향을 일률적 기준으로 분석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본다. 이미 발전할만큼 발전된 서울과 앞으로의 발전도 중요한, 하지만 소외된 사천의 평행비교는 말이 안된다. 사천 주민의 '생존'을 위한 이익 추구와 서울 주민의 '탐욕적'인 이익추구를 같이 볼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나라에서 보수와 진보의 이념은 남북문제를 제외하고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문제는 대운하, 의료보험 민영화, 그리고 삼성의 문제에 있어서 극명하게 나타난다. 대다수의 사람은 (과연 대다수일까 하는 의문이 있다) 대운하의 문제점에 대해 충분히 들어왔고, 의료보험이 만들어줄 황당한 의료현실을 식코를 통해 알아왔으며, 삼성 특검의 봐주기 수사가 얼마나 웃기는 짓인지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들이 가져올 경제적 이익에 집착한다.

한국의 보수와 진보가 나뉘는 것은 (비록 그 의미는 남북문제 밖에 없다고 하긴 했지만) 이익의 추구와 가치의 추구라는 추구 대상의 상이성에 있다. 그 사이가 좁혀지지 않는 것도 이러한 이유가 아닐까 한다. 보수는 이익을 위해서라면 남북의 오랜 분단상황도 인정할 수 있고, 미국의 속국이 되어버릴 것만 같은 영어몰입교육도 인정할 수 있다. 하지만 진보는 통일의 가치, 민족의 화합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그에 따른 이익을 희생해서라도 옳은 가치를 추구한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에 있어서 이 나라 민중의 이념과 사상은, 어쩌면 회복불능, 어쩌면 좀 많이 멀리 있을 뿐이다. 우리 사회는 이익을 추구하고 경쟁을 정당화 하며, 진보로 치장된 이익추구집단의 홍수에 살고 있다.

이러한 이유가 수도권, 특히 서울의 투표성향이 전국의 그것과 비교했을 때 더 우경화 되어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보수니 진보니 하는 이념에서 자유롭다고 하는 자들도 마찬가지다. 이들 중에서 보수의 손을 들어주는 자는 이익과 가치를 혼동하고 가치가 아닌 이익을 택한다. 물론 진보를 표방하거나 끝끝내 진보의 손을 들어주는 자는 그 반대라는 점만 다를 뿐이다. 자신이 서초구민이라고 밝힌 한 네티즌의 글은 이러한 현상을 가장 쉽게 설명할 수 있는 글이리라.

물론, 이런 글을 쓰는 것은 매우 슬픈 일이다. 우리가 선거하고 투표했던 것들이, 결국은 우리의 사적 이익을 쫓아 이루어진 지극히 이기적인 계산행위요 공공의 선(善)과 옳은 가치와는 전혀 상관없는 행위였다는 사실을 고백하기란 쉽지 않다. 한가지 위안이 있다면 이렇게 우리가 속물적인 위선자로 살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박정희와 전두환을 거치면서 형성된 한국인의 생존 전략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당신의 경쟁상대는 누구입니까 하며 수없이 외쳐대며, 승자가 독식하는 사회구조에서 민중은 절망과 절망을 거듭하다 끝내는 그들과(부자들과) 자신을 동일시하며 끝끝내 마약같은 카타르시스를 느껴야 했으니 이렇게 속물로 가득찬 세상이 된 것을 탓한 핑계거리는 있겠다 하겠지만, 그것이 끝끝내 우리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보수의 논리와 진보의 논리에 대해 우리가 수없이 많은 토론을 거치고, 보수와 진보의 싸움을 평생 지켜보지만, 우리의 선택은 이제, 확고한 "부동산과 주가"다.

한나라당도 없고, 진보신당도 없다. '부동산'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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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선거에서 진보세력이 어떤 전략을 가지고 나올지, 보수파는 어떻게 싸울지 아직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 때까지 우리사회의 부동산 만능주의와 사리사욕에 눈이 어두운 탐욕스런 돼지들만 여전히 살고 있다면, 그것이 진보이건, 보수이건, 여러분의 부동산을 강남처럼 높여드리겠습니다라는 한마디가 바로 당선과 집권의 길이 될 것이다.  
예외도 있겠지만, 결국은 부동산이나 돈. 그것이 표심이다.

진보의 언어로 세상을 바꿀 수 있을지는 몰라도, 진보의 언어가 부동산 가격을 올려주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말이다.


이제 진보가 할 수 있는 일은,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돼지를 사람으로 돌려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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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흑묘, 백묘는, 집값을 올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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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딩박은 이명박이나 박근혜랑은 무관합니다.


홍길동.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여 호부호형(呼父呼兄)을 허락받았으나,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총선의 결과를 보고 그 이후에 터져나오는 한 많은 사연들을 보니 이번 총선 사태(?)는 홍길동이라 아니할 수 없다. 이제 더 이상 민심이 천심이라 할 수 없으니, 민심능 천심이라 하지 못하는 국민을 호부호형 못하는 홍길동과 무엇이 다르단 걸까.


1. 홍길동이 진짜 도둑인줄 알았다는 사람들.

< 정청래 vs 문화일보 >

홍길동이 물건을 훔치지 않았다는 소리는 한 적이 없다. 물론 물건을 훔치기는 했다. 그러나 홍길동은 탐관오리가 '부당하게' 취득한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려 했을 뿐이다. 물론 그 와중에 불법적인 주거침입은 있었을지 모르겠다.

정청래 의원의 행동이 모두 적절했다고 판단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정청래의 행동에 앞서 그 배경과 실체(fact)에 대한 문화일보와 조선일보의 보도 태도는 악의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그 기사로 인한 인터넷 댓글만 보아도, 언론이 어떻게 홍길동을 도둑으로 몰아갔는지 알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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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청래의원(아직은 현역 의원이다)은, 국회에 남아있던 386의원들 중에서 몇 안되는 정확하고 탄탄한 논리로 토론을 주도하던 사람이었다. 지금 당선된 통합민주당의 인사들을 보면, 과연 정 의원 만큼 한나라당의 우익정치에 날카로운 지적과 견제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의심스러운데, 이런 상황에서 말도 안되는 비방과 악의적인 선전으로 희생된 정의원의 빈자리가 크게 느껴진다.

기자회견을 하면서 울먹이던 정청래 의원.
4년 후에는 돌아온 홍길동이 될 수 있을까?


2. 진짜 홍길동 처럼 나타난 사람

< 아가씨's coming to town >

특별히, 조선일보의 기사를 골라봤다. 오죽하면 조선까지라는 말이 나올 정도다.
이제 약관(약관이라는 단어는 사실 남자나이 20세를 뜻하는 말이지만, '사회생활을 시작하거나 시작한지 얼마 안된 젊은 사람'이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주길)의 젊은 아가씨가 도대체 얼마나 많은 돈이 있어서 특별당비를 내고 비례대표 1번을 꿰찾는지 모르겠다.

이른바 특별당비란, 국회의원선거 또는 대선에 있어서 당의 선거자금의 급조달을 위한 당비이니 만큼 특별한 액수가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억대 이상이며 일반적으로는 십억대 이상의 액수를 말함이 옳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겨우 복지관의 연구관이나 복지시설의 간사 정도만 하던 젊은 여성이 그런 돈이 어디서 났을까에 대한 의혹은 버릴 수가 없다. 굴지..까지는 아니더라도 돈 많은 어머니를 두고 있다고는 하나, 어머니의 돈을 자신의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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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라도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으로 특별당비조로 내려 한다면 그 사이에 있었던 증여행위에 대한 세금은 납부하셨는지도 의문이다.

그게 아니라면?

만약 이렇게 그들이 열심히 해명하고 있는 일이 사실이 아니라면 우리는 어떤 예상을 할 수 있을 것인가?

그녀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젊은 아가씨에 불과하다. 그다지 화려하지 못한 배움의 정도 때문인지 취직은 잘 되지 않고, 어머니가 설립한 기관에서 열심히(?) 일을 한다. 그리고 여러 언론에서 언급하고 걱정하며 지적한 바 처럼, 어머니가 들어갔어야 할 자리에 치명적인 결함을 안고 있는 어머니를 대신해서 들어갔을 것이라는 예상도 가능하다(물론 그녀를 비난함도 아니고, 어디까지나 예상이다).

도대체 홍길동 같은 그녀는 어디서 나타난 것일까?

도대체 친박연대를 위하여 정당투표를 던진 박근혜의 팬클럽들은, 과연 그녀의 얼굴이나 선전벽보에서라도 한번은 보고 찍은걸까?

홍길동이 엄마의 치마를 휘두르며 나타났다는 소리는 허준도 몰랐던 이야기.



3. 정말로 아버지를 아버지라 못부른 홍길동

홍정욱.

우리나라 조기유학의 첫번째 성공 케이스
그에 관한 사항은 이미 많이 알려져 있다. 올블로그 상위에 랭크된 글을 링크 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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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학교 선배다. 하지만 그는 위선자다.



< 홍정욱 바로알기 >

무엇보다 용서할 수 없는 것은, 노회찬의원을 '노동귀족'이라고 칭함이다.

위선자.

그가 살았던 현대 아파트 75동은 내가 잘 안다(한때 내가 그 뒷동인 73동에 살았다).
그 집은 80평짜리,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던(지금은 아니다) 아파트였다. 같은 현대아파트에서도 그 집에 살면 모든 친구들의 부러움을 샀던 곳이다.(집에서 축구한다는 소리까지 했었다. 참고로 73동은 48평)

자신의 입으로 자신이 서민이라고 이야기 한다는 것은,
위선이고 파렴치다.

노 의원은 고등학교 1학년인 1973년부터 민주화 투쟁을 해오던 인물이다.
감히 홍정욱 따위가 말할 수준이 아닌 것이다.

그는 자신이 '서민배우의 아들' 이라고 말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미남배우(이제는 내게 자식교육 못시킨 불쌍한 아버지로 기억될 것이다)였던 남궁원씨는 결코 서민이 아니다. 정몽준 의원의 조카사위인 그도, 서민이었던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가 서민이 뭔지나 알고 말했는지 의심스럽다.

자신의 아버지를 똑바로 부자 아버지라 말하지 못한 그. 홍정욱은 홍길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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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회찬의 모습을 국회에서 다시 볼 수 있기를 빈다.







물론 더 할말은 많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끝내도록 하자.

이번 총선이 홍길동이었다면,

이제 국민이 활빈당이 되어 탐관오리들을 응징할 일만 남은 것이다.
옷갖 위선과, 악의적 보도와 음해와 그리고 밀실공천이 존재하는 곳 국회.

이제 그곳으로 홍길동들이 간다.

"도탄에 빠진 백성들"은 이제 누구에게 돌을 던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