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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15 외롭다는 그 즐거움

외롭다는 그 즐거움

Posted 2007. 5. 15. 16: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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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랜스젠더 그룹 '레이디'



<
외톨이로서의 자유 >

소수자, 그 외로운 이름에 자유를.


결혼을 하지 않고 사는 이미나씨(36)
자전거로 먼 거리 통근을 하는 손상혁씨(39)
휴대폰을 던져버린 이아무개 교수(45)
채식주의자 박하재홍씨(30)
주민등록증 없는 윤현식씨(39)

우리는 소수자에 대해 어떤 시각을 가지고 있을까? 이른바, 다수자로서.

소수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라고 한다.
보건대, 서양의 그것보다도 더 어려울지 모른다.

최근 몇년간 유행(?)했던 이른바, '아시아적 가치'에 입각해서 본다면, 정말 어려운일이 아닐 수 없다. 아시아적 가치를 폄하하는 사람들이 부르는 묻어가기에 전혀 상반되는 행위가 바로 이 소수자로서 살아가기이다.
유교나 불교적 생할관에 비추어, 타인에게 지적받지 않고 조용히 평범한 일상을 영위하는 것을 덕목으로 치는 우리 사회에서 소수자라 함은 아직 인정받지도 못하고 앞으로도 인정받기 어려운 괴짜일 뿐이다.

단순하게 결혼만 안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 나이 먹도록 결혼도 못한 칠칠맞은 패배자이기도 하고,

건강과 환경을 생각하는 멋진 현대인이 아니라,
편하게 출근하지 않고 자전거나 타고 다니는 나이값 못하는 아저씨 이기도 하고,

휴대폰의 공해에서 벗어난 자유인이 아니라,
그 몇푼하는 요금이 아까운 노랭이 교수이며,

채식의 아름다움 보다는
같이 회식할 수 없는 까탈스런 입맛의 소유자 이면서,

세뇌된 인권침해에 대항하는 자보다는
그까짓 주민증이 뭐 그리 중요한 거라고 까칠하게 사는 반체제 좌파인사에 불과할 수도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는 그런 의미가 더 강한 소수자들이기도 하다.

소수란 무엇이고 소수집단이 가지는 그 의미는 뭘까.

그리고,


우리는 왜 그들을 바라보며 함께 나아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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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옆의 약자




소수자 그리고 그러한 자들이 모인 소수자들에 대한 보호와 인권증진은
국가의 정치적, 사회적 안정에 기여한다.

우리와 다르기 때문에 보호하여야 하고, 우리가 그들보다 우월할 만큼의 수(數)적 구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들을 보호하여야 한다.

전체를 위한 소수의 희생, 그것이 바로 파시즘이다.
사회의 다양한 발전을 해하고, 우리의 생각을 획일화 하고, 미움과 질투 그리고 억압과 폭력에 굴하게 된 소수자들이 바로 우리 사회의 건강한 성장의 척도다.

우리의 소수자중에는 물론, 우리와 아무 상관 없지만, 단순히 보기 싫기도 하고 전혀 이해해 줄 수 없는 소수자들도 있을 수 있다. 아마도, 최근에 많이 논의되었던 동성애자들이 그렇지 않을까.

우리가 동성애자를 우리 사회의 공통된, 또는 합의된 그리고 보편화된 합의를 넘어서는 수준까지 보호하여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소수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우리가 용납할 수 있는 범위 그리고 우리가 사회적으로 용인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나 더 한층 강화된 보호의 장막을 그들에세 선사해야 할까. 우리가 합의하고 우리가 용납할 수 있는 그 수준까지만 인정하면 되지 않을까? 서로에게 피해를 주지 않을 수 있도록 인정된 최소한의 범위를 그들에게 사회가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가?


우리가 합의한, 우리 다수자들이 합의한 그 곳에 들어온 소수자들은 그 합의의 범위안에서 이미 소수자가 아니다. 그런 것은 강요된, 극단에 치우친 이미 다수의 반열에 들어선 "유사 소수자"일 뿐이다.

우리가 그들에게 우리가 인정할 수 없는 보호와 똘레랑스를 보여주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을 소수자로서 보호하고자 함이지, 우리가 받아들인 또다른 이름의 다수자를 보호하기 위함은 아닌 것이다.
다수란 이름의 권력이 선을 그은 바로 그곳에서만 생활하도록 사육된 소수자를 우리는 뭐라고 불러야 할까? 그들은 다수와 타협한 다수의 한쪽 끝 방어선에 불과하다. 우리가 다수자임을 안심시켜줄 시금석에 불과하고, 우리는 그들을 다수라는 권력으로 길들여버린 이미 사회와 함께 늙어버린 어린왕자가 되어버릴 것이다.

사회는 인정하고 받아들인 자들에게 소수자란 이름을 허하지는 않는다.

나와 다르기 때문에 그들은 보호받아야 하고,

나와 다른 점이 보호 받아야 하고,

나는 그들이 아니기 때문에 그들의 보호는 나의 상상을 넘어서야 한다.

그것이 바로 미래에 우리를 지켜줄, 소수자가 지배하는 세상의 다수자에게 내려진 반사적 은혜일 것이다.


소수의 즐거움이 아니라,

소수자로서의 다수를 이루는 세상.

소수자들의 사회.


나 역시 보호받는 소수자로서 살아감이 즐거운 외로운 21세기를 희망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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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도 우리처럼.




개인적으로 윤현식씨와는 개인정보보호법 제정과정에서 같이 일을 한 적이 있는데, 소수자로서의 당당함보다는 신념을 지키는 평범한 청년(?) 이었다. 다만 신념이 그가 지키는 신념이 나와, 사회와 다른 것이었지만, 그 신념을 지키는 것을 끝까지 지켜볼 용의가 있다.

예비적 범죄자가 아닌 자유인의 모습으로 살아가 주시길.
아, 물론 나보다 형뻘이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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