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미디어법의 통과를 두고 할말 안할 말을 오프라인에서 다 떠들어댔더니, 사실 온라인에 쓸 말이 그다지 많지가 않다. 게다가 준엄하신 저작권법님의 모든 것을 지켜보시는 눈깔 덕분에 할 말도 다 해선 안되는 것이겠거니 하는 마음도 있고.

최근 미디어법 뿐만이 아니라, 사실은 MB정권이 출현한 이후, 우리가 왜 이렇게 힘든 나날을 보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많은 고민이 여기저기에서 있어왔다. 나 역시 이런 선거의 실패(? 실패는 무슨.. 모두가 뜻한바 대로 투표해 놓고는 말이다)가 왜 우리를 옭죄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은 아니한 바는 아니다. 이 문제의 결론을 부동산에 투표한 대한국민들이라고 조소했던 나로서는 계속 이런 망연자실한 실소로 끝낼 수도 없는 노릇이지요마는, 어찌되었건, 우리의 치질과 변비는 우리를 어떻게 옭아매고 있는지에 대한 현상의 정확한 파악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다.

몇가지 알기 쉽게 예를 들어서 설명해 보자.

우리 회사에는 화장실이 있다. 화장실은 꽤 잘 완비되어있을 정도의 좋은 회사에 다니니 이걸 감사해야 할까? -_-
우리 회사 화장실에는 비데도 설치되어 있다. 사원 복지가 회사의 매출이나 실적에 지대한 영향을 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나 같은 단순한 사회민주주의 내지는 복지우선론자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물론 우리회사가 처음부터 모든 변기에 비데를 설치한 것은 아니었다. 3칸의 해방공간(?)중에 먼저 각 1칸(층별로)에 훌륭한 비데가 설치되었다. 이때부터, 우리 사이에서는 불길한 파라독스가 성립되기 시작했다. 내용인즉슨,

비데의 설치로 인하여 변비와 치질 환자는 증가한다.

는, 실로 현대의학과 생활상식을 뛰어넘는 궤변이 등장한 것이다. 일견 말도 안되는 헛소리인 것 같은 이 논리가 점차 퍼지면서 그 논리적 뒷받침이 될 근거들이 설득력있게 제기되었다.


3개중 1개의 변기에 대한 비데의 설치 --> 비데 사용자의 증가(최소한 화장실 이용자의 1/3(화장실 가서 똥은 안싸고 오줌을 누거나 딴 짓을 하는 자식들은 제외한다. -_- 다만, 여자는 제외 여자화장실에 들어가 본지가 30여년이 넘다보니 여성들의 화장실 이용행태는 모르겠다 -_-) --> 非비데 설치 화장실의 기피현상 발생 --> 모두가 비데 똥간으로! --> 비데화장실의 수요증가와 함께 변기 입구 병목현상 발생 --> 비데가 아니면 쌀 수 없는  신인류 탄생 --> 신인류, 비데 병목현상으로 인한 변비 증상 심화 --> 신인류중 각성자 일부, 기존의 휴지 화장실로 퇴출 --> 비데에서만 맛볼 수 있는 청량함의 상실을 우려하며 지나친 청결화작업으로 항문 마찰 증가 --> 치질 증세 등장 및 심화.....


유치한 논리적 전개일지 모르지만, 이러한 이유로 3개의 변기에 1개의 비데만을 설치했을 때, 우리에게 일어난 변화는 오히려 복지수준의 질적 저하를 가져왔다는 사실은 매우 고무적인 현상이다.
문제는 이 냄새나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있다.

여기 두 가지의 해결방안이 경영진에게 주어졌다.


하나는, 예산을 좀 더 투입하여 나머지 2개의 변기에도 비데를 설치하는 것이다. 물론 예산의 투입이라는 난제가 있으나, 회사 전체의 생산성 향상과 사원 복지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는 이 정도 투자라면 충분이 효과를 얻을 수 있다. 게다가 회사의 입장에서 비데설치에 따른 추가 투자는 그다지 큰 손실이 아니다.

다른 하나는, 비데가 없는 화장실에서의 배변을 촉구하는 것이다. 약간의 홍보로 가능하며 추가적인 금전의 투입은 없다. 기존의 변기에서 상당기간동안 잘 싸왔던 우리들이기 때문에 새로운 환경의 도래로 배변활동의 민주화를 이룩하였으되, 기존의 휴지와의 마찰을 통한 배변 사후처리시대에도 충분한 위생환경을 이룩해 살던 사람들에게 못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문제는 비데로 인해 창달했던 위생수준의 획기적 상승에 대한 기대심리는 위축될 수 밖에 없다.

정상적인 회사라면, 아니, 상식적인 회사라면, 비데 구입과 설치를 위한 예산이 확보될 때까지 두 번째 방식을 잠정적으로 시행하고 비데 예산의 확보와 함께 회사의 모든 화장실에 비데를 설치하는 수준으로 문제를 해결할 것이다. 웬만큼 큰 회사라면, 비데 예산 정도의 확보가 어려운 문제는 아니므로 곧바로 첫번째 방식의 솔루션이 시행될 터다.


하지만, 여기까지.

우리 MB 정부의 문제해결방식은 그렇지 못하고 있고, 그렇지도 않을 것이라는 점이 우리에게 끝없는 변비와 치질의 고통을 배가 시킨다.
MB 정부의 최대 문제중에 하나는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이 매우 독창적(?)이라는 점에서 시작한다.

미디어법의 이번 날치기 무효통과(뭔가 용어가 매우 거시기 하지만 중요한 건 나는 이번 법 개정을 인정안하기로 했고, 따라서 그거 무효라는 말이니까 그냥 넘어가자)에서 보는 것과 같이, MB 정부는 미디어법의 개정이유는 그저 일자리 창출에 있다. 미디어가 가지는 의미와 민주주의적 가치에 대해 따지기 보다는 그들은 일자리 2만개 창출할 수 없는 미디어법의 민생적 수단으로서의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최대 신문 그래서 최악 신문 조선일보의 시장점유율이 10%대를 겨우 넘는 상황에 20%의 제한을 두고는 제한을 뒀으니 괜찮다고 하는 수준이니 뭐 이상할 것도 없지만(이건 마치, 초등학교 운동장에 3학년들 모아두고  100m 달리기 해서 세계신기록 내는 놈은 과자 사준다고 하는 꼴이다) 미디어와 신문 그리고 방송이 왜 우리 사회에 존재하여야 하는가에는 관심이 없거나 자칫하면 속내를 들킬까봐 애써 외면하고 있는 꼴이다.


비데를 안써서 치질이 우려되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변기의 민주적 비데통일 장착이다. 하지만, 비데를 설치했더니 치질과 변비환자가 증가하여 민생을 위해 비데를 치워버리는 것이 사원 복지에 최전선이라고 주장하시는 우리 싸장님 MB.

딱 그꼴인거다.

이 뿐만이 아니다. 저작권법을 피해 한 블로거가 쓴 글을 소개한다. 아돌군님의 글을 보자.
장애인은 낙태해도 된다고 하시던 MB의 정부께서 낙태되지 못하고 이 땅에 태어난 장애인들을 다루는 솜씨를 보라.


할말은 많은데, 할 말이 없을 정도인 우리 대통령.
젠장, 정말 국민 노릇 못해먹겠다.
2008년의 정치 이슈들, 언론 이야기

6, YTN, KBS 사태 촉발

2008년에 언론계는 핵폭탄을 맞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큼 엄청난 일을 겪었다. 가장 먼저 발생한 일은 물론, 최시중씨의 방송통싱위원히 위원장 취임이었다. 최시중씨는 알려진대로, 이명박 대통령의 "멘토"로 불리던 사람이었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전 정권에서 정보통신부의 일부 기능이 더해진 방송과 통신의 융합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한 기관으로, 우리나라 전체 방송과 통신에 대한 주무부처다. 물론 방송통신위원회는 독립기관으로 대통령 직속기관(다른 정부부처는 국무총리가 통활한다)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행정부를 구성하는 구성원으로서 기능한다.

물론 최시중씨가 어떤 능력을 갖고 있고 그 분야의 전문가인가의 문제에서는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으나, 언론이나 사회에서 문제삼던 것은 그가 이명박의 최측근이라는 점이었다. 물론, 정권을 잡은 쪽에서는 자기편의 사람을 요직에 임명하는 것이 일반적이기는 하나, 최시중씨가 인

YTN 사장 구본홍씨와 노조위언장 노종면씨

수위 시절부터 피력한 언론관이나 방송/통신에 대한 시각 등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우려를 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최시중씨의 인선에 대해서 언론과 방송을 장악하기 위한 첫 시도라고 보고 있었다. 최시중씨의 위원장 취임 후 발 드러난 사건이 바로 구본홍씨의 YTN 사장 임명이었다.

구본홍씨는 MBC의 기자출신의 이명박 대통령의 고려대 후배로, 인수위 시절부터 자문위원으로서 활동해 오다가 정부 출범 후 YTN의 사자으로 내정되었다. 이에 YTN은 보도 중심의 케이블 방송국에 친정권적이고 이른바 정권의 고소영 라인에 속하는 구본홍씨의 사장취임을 극렬하게 반대해왔다. YTN은 민영 방송사이기는 하지만, 오직 뉴스만을 보도한다는 점에서 매우 특이한 특징을 가진다. 이 YTN의 대주주는 한전의 자회사인 KDI, 한국마사회, KT&G 등으로, 대부분 정부가 인사권 등을 실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회사들로, 실질적인 대주주는 정부라고 할 수 있다. YTN사태의 본질은 그러한 특징을 가진 회사의 경영진이 과연 정부에 대해 얼마나 독립적인 온론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우리나라의 정권들이 해 왔던 실태를 고려한다면, 이러한 현상은 정부에 대해 제대로 비판하지 못하는 언론아닌 언론으로 YTN이 전락할 수 있다는 우려를 충분히 할 수 밖에 없다는 문제점을 가지고 오게 된다.

YTN노조는 이에 따라 사장 선임을 위한 주주총회의 저지, 구본홍씨의 출근 저지 투쟁을 계속 해 왔으나, 갑작스럽게 진행된 주주총회에서 주주이기도 한 노동조합의 출입이 저지된 상태에서 구본홍씨는 사장에 취임하고 이어 노조집행부를 대거 해직하고 징계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정부의 정책 등에 대한 비판 기능을 담당하던 돌발영상 등을 담당하던 제작인에 대한 징계를 가함으로서 노조와의 갈등이 깊어지는 결과를 낳았고, 이에 따라 YTN사태는 아직까지도 그 해결의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YTN문제는 순수 정치적인 문제가 이슈가 된 것이라면, 뒤이어 발생한 KBS 사태는 현행법상의 문제점도 가지고 있었다. 당시 KBS의 사장이었던 정연주씨는 노무현 정권에서 임명된 사람이었다. KBS는 공영방송으로, 정부가 출자해 만든 방송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일반 언론사와 같은 기능을 수행한다. 이에 이명박정부에서는 "공영방송은 정부의 입장을 대변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정연주 사장의 퇴임을 종용하였다. 즉, 정권이 바뀌면 정부의 소식을 전하는 언론 역시 정권에 따라변화하여야 한다는 논리였다. 이에 정연주 등 현 KBS는 반발했고, 정연주 사장의 임기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 들어갔다. 하지만, 정권은 현 방송법의 규정을 들어 그를 해임하고자 하였으나, 현 방송법에서는 한국방송공사(KBS)의 사장을 대통령이 "임명(任命)"한다고 되어있어 그 해석이 논란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이를 해임권을 포함하는 임면(任免)으로 해석한데 반

무한도적 제작진도 파업한다고 한다.

해 대다수의 법률학자들은 해임권이 포함된 권한의 경우 이를 임면으로 명시하여야 한다고 함으로서 정연주 사장의 해임절차에 대한 적법성이 논란이 되었다. 이명박 정부는 임면권의 존부에 대한 논란을 피하기 위하여 감사원으로 하여금 KBS를 특별감사토록 하여 정권의 입맛대로 감사원과 정부 소속 공공기관을 움직인다는 비판을 면치 못하였다. 정연주 사장의 퇴임 이후, 시사투나잇 등의 시사프로그램에 대한 정면적인 개편이 이루어지는 등 정권의 필요에 따른 언론 개편이라는 시나리오가 전명적으로 시작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와중에 MBC피디수첩에 대한 탄압이나 EBS 지식채널e 피디의 강제 보직이동 등 정권의 언론 장악을 위한 작업이 진행되기도 했다.

정부의 언론 장악 시도에 대해서는 아직도 그 해결의 기미가 안보이고 있다. 각 언론사 사장을 자기사람으로 임명하여 언론 경영권을 장악한데 이어, 최근에는 방송법을 개정하여 대기업과 조선일보 등 신문사의 방송 겸업을 허용하기 위한 법률의 개정을 시도하자, MBC를 중심으로 방송사의 노조들은 이에 크게 반발하고 총파업을 결의하기도 하였다.



오늘도 이어지는 2008년의 정치계 이모저모

어제 1,2,3번의 사건들이 현제 기득권층의 집권에 따른 권력기반 조성에 관한 사건들이었다면, 오늘 이어질 이야기는 그에 대항하는 反정권적 사건들이 주를 이룰 것이다. 물론, 그 이전에 총선 이야기는 하고 지나가야겠지.

누구나 이번 한해의 최고의 국내 사건으로는 (정치적으로마 본다면) 촛불집회 이야기를 빼 놓을 수 없다. 하지만 그에 못지 않게 이번해에 있었던 총선의 결과는 정말 많은 시사점을 준다.


4. 제18대 총선 - 한나라당의 승리.

4월에 있었던 18대 총선은 매우 기형적인 총선이었다고 기억될 것이다. 여러가지 변수가 많이 있었는데, 여러명의 대선 탈락자-이인제, 권영길, 문국현, 손학규, 박근혜, 이회창, 등등-의 출마도 마찬가지였고, 민노당에서 갈려 나온 진보신당의 원내진출이 가능할지에 대한 여러가지 전망이 나왔다. 무엇보다, 노회찬과 심상정이라는 전국구 스타들을 전면에 내세웠으니 원내진출이 가능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았다. 또한 이른바 대운하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내려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은 물론, 이재오 등 친이명박 계열의 심판은 물론 박근혜의 친박연대라는 희안한 정당의 출연 또한 엄청난 변수로 작용했다.

18대 총선 결과

결과적으로는, 민노당의 반토막, 한나라당의 완승(압승까지는 아니었다고 해도), 민주당의 턱걸이, 진보신당의 참패, 자유선진당의 선전, 친박연대의 반란으로 정리된 총선결과는 매우 암울한 것이었으나, 이방호, 이재오의 낙선과 진보신당이 희망을 잃지 않았다는 점, 친박연대와 창조한국당의 선거자금관련 비리 등의 문제를 안고 출범한 18대 국회는 개원 초부터 삐그덕 거리기 시작했다. 한선교 등 탈당파와 친박연대는 일괄적인 한나라당 복귀를 꿈꾸었고, 당선자 숫자에서 압승이 아닌 완승으로 만족해야 하는 한나라당 역시 그들을 함부로 내 칠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양정례 등 일부 당선자들의 비리까지 안고 가기에는 너무 부담이 크다는 사실 때문에 아직도 이들의 원만한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예상컨대는, 18대 총선선거사범에 대한 사법처리가 완결되는 2009년 1월에는 어느정도 정리된 상태에서 일괄적인 타협이나 정계 재편이 이루어질 것이라 생각된다.

이번 총선의 큰 의미는, '돈선거'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전의 선거에서와 같이, 후보자가 뿌리는 그런 돈선거가 아닌, 다른 의미에서 돈선거의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서울시를 중심으로 나타난 이른바 뉴타운 선거이다. 이 뉴타운 선거의 가장 큰 피해자라고 할 수 있는 노원구의 경우, 정치 신인인 홍정욱씨가 노회찬 진보신당 대표를 근소한 차이로 누르고 당선되었다. 이 외에도 최대 격전지 중의 하나였던 동작구에서 정몽준이 손학규를 낙선시켰고, 서울 이외의 지방에서는 대운하 공약이 어느정도 먹혀들어간 선거라고 생각된다(특히 영남지역의 대운하 후보지에서 더욱 그러한 현상이 두드러졌다).

이른바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사태 이후 어느정도 세계적 경제불황이 점쳐지고, 서브프라임 이후 발생한 이른바 일본 엔화의 엔케리는 경제적 부담감을 증폭시켰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부동산 가격도 점차 하락할 것이라는 전망이 강해졌다. 이에 역대 정부는 겉으로는 부동산 거품의 제거나 부동산값 안정을 항상 경제목표로 제시하여왔으나, 이명박정부는 노골적으로 부동산 가격 하락세의 진정, 그리고 나아가 부동산 경기부양을 통한 경제 성장을 내세웠다. 비록 정책적으로는 그렇지 않더라도, 외연상으로도 확연히 역대 정권과는 반대로 부동산 가격의 거품제거를 위한 노력은 없어졌다.

이러한 경제 분위기 속에서 여전히 부동산 불패의 신화를 믿고 있는 국민들 역시 민주화의 여부나 국가사회의 진보적 가치창출보다는 부동산이나 주식투자 등등의 재테크를 통해 돈을 벌어보고자 하는 욕망이 충만했고, 이러한 결과로 18대 총선은 돈선거라는 평가를 피할 수 없게 되었다.결과적으로는 모두 부동산과 주가에 선거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정도로 집값상승을 주도할 수 있는 후보가 어디서나 유리한 지경이었다. 이 와중에도 계속 종합부동산세에 대한 위헌론이 급부상했으며, 이에 따라 정책 선거가 아닌 부동산 선거로 전락해 버렸다.

이재오와 이방호



18대 총선결과에서 진보 계열의 참패에 대해서는, 김대중-노무현으로 이어진 역대정권에서의 실정을 그 원인으로 찾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우세했다. 10년간의 진보의 집권기동안의 정치실험에서 국민이 만족하지 못했고, 이에 따라 전반적으로 우경화되는 경향을 보였다고 하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하지만, 진보진영일각에서는 이에 대해 "민주화가 진전되고 인권 자유 등의 문제가 많이 해결되면서 유권자들의 관심이 실생활과 관련된 사항으로 옮아간 것이지 국민 대다수가 보수화됐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개인적인 평가로는, 10년동안의 정치실험에서도 바꾸지 못한 보수진영의 확고한 기득권지향성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그들의 생존력의 결과였다고 본다. 또한 앞서 계속 설명한 바와 같이, 남들 집값은 다 떨어져도 내 집값은 올라야 한다는 개인적인 욕망의 분출이 낳은 기형적인 총선결과였다.


5. 촛불문화제에서 촛불집회로, 그리고 촛불시위로.

2008년 대한민국의 최대 사건은 역시 5월과 6월로 이어지는 촛불집회였다. 특히 6월 10일 광화문을 비롯한 전국에서 발생한 6.10항쟁 기념일의 촛불집회는 연인원 100만명에 달하는 시민이 참여하며 최대의 정치세력으로서의 시민의 재탄생을 가져오는 성과를 낳았다.

5월 초, 몇명의 여고생들이 처음 시작했다고 알려진 촛불집회는 이른바 광우병 쇠고기 수입 결정에 따른 반발에 따라 일어났다. 대통령 취임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한 이명박 대통령은, 30개월이상의 미국산 소를 수입하기로 미국측과 합의하면서, '값싸고 질좋은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말해 큰 파문을 일으켰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광우병에 걸렸을 수 있는 위험한 쇠고기를 국민에게 값이 싸다는 이유만으로 수입이 결정되자, 정치권은 물론 사회 각 분야의 반박이 이어졌고, 이에 대선에서는 선거권 조차 없었던 어린 학생들을 중심으로 청계천에서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하게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초기에는 어린 고등학생이나 청년을 중심으로 시작된 촛불집히는 날이 거듭될수록 많은 인원이 모이기 시작했다. 이에 당황한 경찰은 강경진압을 통해 이를 진압하려 하였으나, 이미 새로운 시위아닌 시위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21세기형 web2.0세대인 젊은 학

6월10일 등장한 "명박산성"

생을 감당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강제적인 동원이나 선동이 아닌 자발적인 참여로 이루어진 촛불 시위대는 그 중심세력이나 배후 조종 단체 없이 움직인 것이었으므로 경찰의 입장에서는 매우 통제하기 어려운 세력이었다. 더군다나, 쇠고기 이후 얻어진 힘을 바탕으로 시민들은 각 분야에 대한 새로운 이슈들을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정부조직개편이나 인권위원회의 축소 등 정부변혁에 대한 불만은 물론, 대운하와 747 및 FTA 등 대통령의 핵심 선거공약에 대한 반대의견이 자유롭게 쏟아져 나왔고, 결찰의 강경한 반인권적 시위진압에 관한 불만도 함께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첨단의 인터넷 환경은 시위현장을 생중계로 전국에 내보내며 생생한 목소리를 주류언론이 아닌 개인언론의 힘을 빌어 전달하기 시작했고, 각종 포털 사이트는 이들의 토론장으로 변해갔다. 이러한 와중에 특히 다음의 아고라는 이른바 토론의 성지로 급부상했고, 급기야는 국회 청문회자리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는 주류 토론장으로 급부상했다. 지난 대선 당시 네이버는 평정되었다는 한나라당의 발언 영향도 있었던 만큼, 이번에는 다음이 네이버를 누르고 인터넷 토론 메카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러한 현상은 촛불집회 이후에도 계속 이어져 아고라의 미네르바가 등장하고 성장할 수 있는 토양이 되었다.

촛불집회는 비록 가시적인 성과(쇠고기 수입저지)를 이끌어내지는 못한 것이 사실이나,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고 할 것이다.

첫째, 선거권이 없거나 정치에 무관심한 어린 학생들의 자발적인 참여에 의하여 시작되고, 정치와는 무관하다고 알려진 이른바 아줌마 부대와 각종 쓰레기들의 집합처라고만 인식되어져 왔던 네티즌들의 참여를 적극적으로 이끌어내어 시민으로부터의 계몽이 이루어졌다는 점이다. 기존의 시위와 20여년 전의 6월 항쟁은 일부의 엘리트와 그의 생각에 동의하는 여러 무리들이 시민의 침묵과 지지 속에 이루어낸 민주화라면, 2008

광화문에 운집한 시민들

년 촛불집회는 다수 민중의 각성에서 부터 시작된 이른바 "생활정치"로서의 민주화에 대한 시발점을 형성했다. 정치권의 행동이나 정권의 변화가 가져오는 생활의 변화에 둔감했던 것이 20여년 전의 민중이었다면, 쇠고기로부터 시작된 촛불시위는 그러한 작은 사건에 대한 민중 스스로의 자각과 반성에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노무현정권에서부터 학습된 정권에 대한 반대 진영의 자유와 권리 그리고 시민으로서의 자유와 권리를 실생활에서 적용하고 이를 실천할 수 있는 힘의 탄생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자발적인 정화의 시도였다. 기존의 시위에서 탈피하여 수십개의 구심점이 존재한 이번 촛불집회에서는 민중이 스스로 자성하고 질서를 유지하며 더 한층 성숙된 정치의식가 함께 자정의 노력이 결실을 맺은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에서는 끊임없는 토론이 이루어지며 스스로 그목소리의 방향성과 행동의 지향점을 설정하고 이를 위하여 자제와 협력을 통한 공공선(共同善)의 구현을 위한 양보화 타협이 이루어졌다. 첫번째의 성과가 시민적 합의의 도출방식으로서의 하부계몽과 상향식의 의견표출이었다면, 이 두번째의 성

경찰의 과잉진압으로 부상자가 속출했다.

과는 그러한 공동선의 실현에서의 샐활로서의 민주주의의 현실화라고 할 수 있다. 비록 구심점이나 중심된 조직은 없었다고 하나, 이러한 점이 민주적 합의와 행동의 다양화를 가속시키는 촉발제가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나름대로의 판단과 논리로 무장한 시민세력은 새로운 정치세력으로 부상하며 계속된 마찰속에서도 나름대로의 조화를 이끌어내며 상생의 길을 찾아갔다. 이러한 현상은 특히 인터넷에서 두드러졌다. 촛불집회 어디에서건 "토론의 성지 아고라"의 깃발이 나부끼며 사람들을 인도했고, 아고라를 비롯한 인터넷은 토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수행했다. 이 와중에 많은 악플이나 악의적 글들도 올라왔으나, 시민사회의 주류는 이러한 악플에 휩쓸리지 않고 스스로 정화하며 민주주의의 참 가치를 실현하는데 주력했다.
세번째로는 언론 운동의 새로운 변화다. 촛불집회의 막바지에 나타난 조중동 등 기존의 보수언론에 반대하는 시민세력은 스스로 언론이 되어 블로그를 통한 사실의 추적과 분석을 효과적으로 이룩했다. 90년대 말과 2000년대 초부터 시작된 미니홈피와 블로그는 더 이상 개인적인 일기장이나 고백의 공간이 아닌 개인을 중심으로한 독립언론의 형태로 발전하며 기존 언론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다음의 블로거 뉴스나 올블로그, 블로그코리아 등 메타들로그를 통하여 새로운 언론으로서의 개인언론이 탄생하고 기존의 언론이 하지 못한 언론의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성과 이외에도 많은 이슈들이 촛불집회를 통해서 토론되며 이룩되어졌고 이러한 현상은 2008년의 대한민국을 정의하는 중요한 이슈가 되었다. 촛불집회의 가장 큰 성과는, 첫째, 아래로부터의 자각과, 둘째, 생활정치인의 등장, 셋째는 21세기형 언론기능의 완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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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광화문 사거리에는 위의 사진에서 보는 것처럼, 대형컨테이너 20개가 길을 막고 있다. 나 역시 오늘 아침에 출근 중에 보고는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면서, 정부종합청사와 미국대사관이 있는 이 길에 저렇게 큰 대형컨테이너가 20개나 들어와 있다는 것도 놀랍지만, 저 컨테이너의 용도가 '국민의 진입을 막기위함'이라는 사실은 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이명박 정부 100일. 그 100일의 의미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 하고, 행동하며, 부르짖기 때문에, 나 하나쯤이야(?) 하는 생각으로 웬만하면 이명박 정부의 현재와 앞으로의 나아갈 방향성, 그리고 전망에 대한 이야기나 정부를 성토하는 질타성 글을 올리는 것을 최대한 자제(?)했던 것도 사실이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비슷한 목소리를 내는 상황에서 똑같이 정부를 욕하는 목소리 하나 더 보태는 것 보다는 행동하고 인식하며 기다리는 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한 단순 논리였다. 하지만, 오늘의 사태를 보면서는 (이 정도 가지고 사태라고 할만 하겠냐마는, 이건 사태다.) 침묵하는 다수니 하는 웃기는 소리 보다는 한 마디라도 더 보태는 것이 중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명박 정부와 언론의 달라진 현실-

누군가에게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현재 이명박 정부는 인터넷의 힘을 간과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인터넷에 퍼지는 말들, 그것이 괴담이건 아니건, 그것을 control 하거나 monitoring할 수 있는 어떠한 힘이나 조직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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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향 못잡는 시중씨



(사실 이 말은 모 기관장이 퇴임 후 어느 강연회 자리에서 한 말이다)

인터넷에 떠도는 그 흔한 괴담들을 말하는 것이라 치부하며 우습게 볼지는 몰라도, 이제 이 것이 이명박 정부의 현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한가지일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출범 초기 부터 언론에 대한 장악을 매우 중요한 정치적 의제로 설정했다. 이는 방통위원장으로 최시중이라는 최측근을 전면 배치한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다. 최시중이 어떤 인물이고, 그 자리에 적합한 인물이냐를 판단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그가 이명박에게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또는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열쇠였으니, 이러한 이명박정부에 대한 언론관의 평가는 과히 틀린 것은 아닐 것이다.

뿐만 아니라, 네이버는 평정, 다음은 폭탄이라는 이명박 정부의 내부의 은밀한 목소리가 밖으로 퍼지기는 했지만, 인터넷에 대한 심각한 개입을 시사하기는 했지만, 너무 많이 중심의 인터넷과는 괴리되어버렸다.
 
이 점에서 전에 썼던 글에서 한 내용을 인용해 보자.

< 투옥된 블로거, 최장기 투옥 언론인으로 신기록 수립할 예정 >

Josh Wolf라는 블로거가 샌프란시스코의 경찰차가 불이 붙는 장면이 촬영되었다고 의심되는(실제 촬영이 되었는지는 기사만으로는 알 길이 없다) 필름을 연방검사에게 제출하지 않고, 연방대배심에도 협력하지 않은 죄목으로 법정 모독이 인정되어 투옥. 미국 역대 최장수의 투옥 언론인으로 기록될 수 있다고 한다.

얼핏 전혀 연관이 없는 이 두 가지 사실은 2007년, 아니 그 이전부터의 현대사회의 가장 큰 변화라고 생각된다.
먼저, '전통적' 언론인이 아닌 블로거가 언론인의 한 사람으로서 인정되었다는 것. 즉 개인 미디어의 언론화를 뜻한다. 제도권에서도 진정한 언론으로서 개인 미디어가 자리잡은 것.

참고할만한 글 - < 블로거에 언론의 지위를 허하라 - John Conyers(美, 민주당 하원의원) >

- 개인의 공공화, 공공의 개인화. 그리고 개인미디어로서의 블로그 (2007.2.8 작성)-

지금 이명박 정부는 언론을 잡기 위해 조중동과 경향, 한겨레로 대표되는 좌우 양익을 어떻게 잡을 것인가에 골몰하고 있고, 인터넷에 대해서는 네이버와 다음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포털을 어떻게 콘트롤 할 것인가에 역량을 집궁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전통적 시각의 언론관이 이미 용도폐기된 것이라는 점이다. 다음의 블로거 뉴스에서 보는 바와 같이,이미 신문 언론 권력은 인터넷 언론과 지상(紙上)언론으로 양분되었고, 방송언론 역시 MBC, KBS가 아닌 인터넷방송으로 일부 권력이 이동되었다. 인터넷 포털 역시 지금까지 인식되어오던 뉴스 전달자의 개념을 탈피하여 적극적인 Gate Keeper로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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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가 말해놓고도 뭔가 뿌듯한 두언씨

위에 인용 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외국이나 일반적인 우리 사회 Net People의 입장에서는 이미 블로거는 언론인이며 그 하나하나의 정보는 언론의 기능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고, 또한 자격도 갖추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이명박 정부는 게시판에서 노는 실업자나 할일 없어 돈만 쥐어주면 되는 애들로 치부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 인식에서 어떤 언론 정책도 성공할 수 없다. 비록 그것이 조중동이나 경향, 한겨레, MBC, 또는 KBS에서 성공하더라도 이는 반쪽짜리의 성공에 불과하다. 훨씬 더 많은 언론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정권의 성패는 어쩌면 언론의 선택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그 언론이 여론을 만들어내었다가 지난 노무현 정권의 모습에서 우리가 배운 바다. 이명박 정부의 전통적이고 전근대적인 언론관의 개혁은 이명박 정부에게 가장 시급한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은 소문을 만들어내지는 못하더라도 소문을 증폭할 수는 있고, 괴담도 우표할지 모르지만, 그 괴담을 현실화 할 가상 현실도 가지고 있다. 그저 괴담의 유포자를 잡아넣었다고 해서 언론에 대한 할 바를 다했다는 것은 매우 큰 착각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더 위험한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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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로 박았다!


이 언론을 장악 하겠다고 하는 정부의 시각이다.

이명박 정부가 가장 실패한 정부가 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언론에 대한 광우병보다 더 무서운 통제적 권력의 실천에 있다. 그들이 정권의 나팔수 라고 폄하했던 국정홍보처를 폐지하는 바보같은 짓을 하면서도 언론을 장악해서 그 상부구조를 뒤흔들어 통제하겠다는 생각은 결국 진시황과 호해에게 있어서의 환관 조고의 방법만을 제시할 수 있기 때문이다.

5,000만 국민의 눈과 귀를 막는 것 보다, 당연히 이명박 한 명의 귀와 눈을 가리는 것이 쉽다. 언론이 5,000만이 되어버린 오늘의 블로그 시대에 언론의 입을 막고, 국민의 귀를 막는 것은 북한식의 5호담당제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한 감시체제다. 결국 막을 필요가 있는 언론의 길은 이명박으로 통하는 그 한개의 길이다.

어쩌면 이명박이 아직까지 정신 못차리고 헛소리해대는 것은 이렇게 뚫어져 버린 언론의 방파제를 내버려둔 채 이명박으로 통하는 한개의 작은 샘물만을 남겨둔, 정두언의원의 지적이 옳을 수도 있다. (물론 이러한 발언의 의도는 그리 순수해 보이지 않는다)

이명박이 절대로 뇌 용량이 2MB밖에 안되는 바보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그 많은 사기는 치지도 못했고, 그 많은 재산이 아직 남아있을리도 없다) 하지만 제한된 조건하에서 누구든지 제한된 판단 밖에는 내릴 수 없다. 그 길이 차단된 것이다. 성냥개비 두개만 들고는 아무도 담배를 태울 수 없다. 담배가 없으니까.

최소한 인터넷만 봐도 이러지는 않는다 라는 말이 너무나 실감나는 요즘

또 하나의 언론, 그리고 이른바 대안언론으로서 이제 블로그가 일어나거나, 이명박이 그리로 내려올 때다.


레고 쌓듯이 컨테이너 몇 개 쌓아올린다고 그 물결이 멈출 것이라 생각한다면, 조중동만을 너무 열독한 결과라고 밖에 몰 수 없다.

이미 언론을 장악하려는 이명박은 실패했다. 아니, 이명박을 얼굴로 내세운 극우 보수주의자들이나 친미 사대주의자들은 이미 20세기에 멈춘 세계관 속에 도태되어버렸다.

이명박,

언론의 소리를 들으라.

오늘 그 언론이 광화문 컨테이너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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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불쌍한 경찰이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조선일보 기사의 사진


이명박의 지지율은 날로 더 떨어져가고 있고, 이명박정부는 드디어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선언했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드디어 이명박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명박이 두려워 하는 것,

그것은 "노무현" 처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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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노무현이 왜 그토록 국민들과 멀어지고 끝끝내는 욕먹은 걸로만쳐도 무병장수 할 수 있을 정도의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건, 그 내용이 어떠헸건 그것이 정당했는가의 여부를 떠나 노무현이 실패했던 것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모두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보에게는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의 참전과 FTA라고 하는 우파와 신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이 진보로 취급되던 노무현에 대한 배신의 의미로서 욕먹어야 하는 대통령이었다면, 보수세력에게 있어서는 반미와 친북이라는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의 수괴로 낙인찍혔으니 사면초가에 아군은 하나도 없는 형국이었고 결국은 '노무현스럽다'라는 신조어에나 등장하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어버렸다(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나는 약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

이명박이 두려운 것은 지금 중고생들이 촛불 들고 나와 한소리 해대는 것이 아니다. 어짜피 그네들이야 입시가 가까와오고 기말고사가 가까와 온다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저 촛불시위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명박씨가 이런 철없는(?) 중삐리 고삐리들 때문에 가던 길 멈춰 불도저 시동 끄실 양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촛불시위에 대해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하다 못해 끝내는 물대포 쏘아가며 정공법이 아닌 신속한 진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조선일보 기사 중에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떴다.

< 취객에도 맞는 경찰 공권력 >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취객 등 경찰 지구대에 끌려온 사람들의 행패에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도, 결국은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당하고 산다는 불쌍한 스토리다. 거기에 덧붙여 외부 전문가의 말을 아래 처럼 빌려 한 것은 이 사실이 얼마나 심각한 현상인지 알려주는 친절한 기사다.

경찰대학교 행정학과 표창원 교수는 "공권력 집행의 약화는 경찰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안녕과 평온의 문제"라며 "공권력이 권위를 잃으면 결국 피해는 법을 지키는 사회적 다수에게 돌아온다"고 말했다.


 얼핏 보면 그냥 경찰공무원의 힘겨운 업무와 그를 걱정하는 신문기사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 기사가 한창 인터넷에 올라온 시간인 2008년 5월 24일 00시 27분에 일어났던 일들과 같이 본다면 이것이 그리 녹녹치 않은 조선일보의 이명박씨에 대한 훈수두기라고 생각된다.

한겨레 신문에 이미 살수차가 동원되어 거리로 진입한 촛불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살수와 연행이 있었다는 기사가 떴고 오후 10시 20분에 드디어(?) 집회 참가자들이 거리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추가되었고,  11시50분에는 살수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결국 새벽에는 폭력사태까지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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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왜 뜬금 없이 "불쌍한 경찰"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갑작스럽게 가져왔을까? 최근에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는 사실들 때문에 경찰이 동정의 대상이 되었던가? 오히려 경찰의 기강해이가 문제되거나 전직경찰의 범죄 가 문제되고, 각종 성희롱, 성추행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경찰의 태도가 문제되긴 했지만, 경찰의 고충에 대해 갑작스럽게 환기시켜 우리를 경찰을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로 몰아넣을 필요는 없던 시기였다.(비록  경찰에겐 안 좋은 소식이지만, 경찰을 탓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생각건데, 이러한 갑작스런 조선일보의 기사는 급조되었다기 보다는 이미 작성되어 때를 기다렸다는 느낌이든다. 이미 오래전 부터 기획된 기사이며, 그저 때를 맞춰 기동취재반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경찰에 대한 폭력을 잠깐 취재했다는 느낌 뿐이다.

경찰에 대해 조선일보가 연민의 정을 느꼈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이지만 이 기사는 오직 한명을 위한 기사인 듯 하다. 명박씨, 잘 보고 있는가?


조선일보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는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명박아, 그것밖에 못하니?
좀 더 쎄게.




이명박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노무현 처럼 되는 것이라면, 노무현처럼 진보로부터도, 보수로부터도 똑같이 욕을 먹어 끝내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어 '명박스럽다'라는 단어가 또 한 가지의 뜻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이라면, 노무현 처럼 이렇게 조선일보가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지금은 진보세력과 아이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불굴의 소시민들 나부랭이(?) 들이 나와 겨우 촛불 들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고 조선일보 앞의 시위대가 끊임없이 이어지면, 조선일보는 강경하게 나올 수 있다는 소리다.

경찰, 뭐하니, 화끈하게 밟아버려!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순간, 어느샌가 낮에는 시청광장을 중심으로한 보수단체들이 나와 빨갱이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우리 중, 고삐리들을 걱정하며 타도 이명박을 외칠 것이고, 밤이 되면 적색 빨갱이와 그 사주를 받은 시민들이 광화문에 모여 불을 지펴 그의 퇴진을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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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존나 말리고 싶은 정갑씨



우리에게 중도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명박을 지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니 중도에 서서 "글쎄..."라고 말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낮과 밤을 양분한 보수파와 진보를 가장한 유사진보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있을때 한번 더 이야기 해 보자)가 과정은 다르더라도 결국은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면 이명박은 욕하면서 배우는 어린 자식 처럼 노무현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보수도 그를 물러나라 하고, 진보도 그를 떠나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명박이 진짜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래도 병신 저래도 병신 소리듣는 것은 이골이 난 상태니 상관 없지만, 보수도, 진보도, 그리고 군부와 조선일보까지 등을 돌리게 되면 이명박 정부는 더이상 지지기반 없이 떠나야 하는 아쉬운 옛 연인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전에도 잠시 얘기를 했지만 조선일보는 단순히 기사만 싣지 않는다. 그들은 고도의 편집권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찌라시다. 그들이 뱉어내는 기사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보수가 어떻게 우리의 입을, 머리를 귀를 마비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최상의 교과서다.

이명박은 토요일 한밤중에 한마디의 육중한 경고를 들은 것이다.

이명박이 움직여 저 빨갱이를 소탕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안녕과 평온의 문제"는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조갑제와 같은 평화와 진리의 사수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진보와 보수는 결코 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이 두려워 하는 것은 그들이 끝내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같이 결론을 내는 것은 단 하나,

이명박 퇴진 이다.


이명박에게 있어서 보수파는 어쩔 수 없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일 수 밖에 없다. 서정갑의 예비역 대령연합회나 재향군인회 등 군부에서 파생된 보수주의 단체는 군대 미필자인 이명박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계속 거두지 않고 있는 실정에서 기독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아직 남긴 남았지만, 그들도 혼란하고 빨갱이의 마수에  죽어가며 도탄에 빠진 가련한 백성들이 시끄럽게 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엄정한 법집행을 시급하 시행하지 않는다면, 6.25때 어떤 고지의 전투처럼 낮과 밤이 바뀐채로 우리는 진보와 보수의 끊임없는 퇴진 소리를 들어줘야한다.


이명박은 아마 이번 시위에서 계속적으로 과격하지만 조용하게 진압을 시도할 것이다. 물론 수 많은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고 어쩌면 한 두명의 치명적인 희생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물타기 역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그것은 양쪽으로 부터 비난을 받는 노무현과 같은 존재로 전락할 자신을 참을 수 있는 용기가 이명박에겐 없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막내로 전락해 버린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서 이슈가 되었다.

< 함부로 '삽질'하다 허리망친다 >

동아일보도 걱정이 되었나 보다.


이명박 무엇이 두려우랴!!!
덤벼라.


하지만, 이것은 알아두셔야 한다.

우리가 쪽수가 더 많다. 유남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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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큐 430?



요즘 PD 수첩 방영 이후로, 허경영에 대해서는 짜증난다와 알게뭐냐 그만 좀 울궈먹어라 등등 그다지 아름답지 못한 반응이 계속되는데, 허경영을 바라보는 비이성적인 시각과 냉정한 눈으로 보면,


허경영이 아니라, 이명박의 아이큐가 430일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 비록 옆의 사진 처럼 선캡하나 제대로 못쓰는 위인이긴 하지만, 이명박의 말을 들어보면, 그리고 그의 오른팔이 되어버린 인수위에서 발표하는 것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우리가 대통령으로 아이큐 430짜리를 뽑아놨나 하는 생각이 든다.

경제성도 없고, 환경만 좆될 것 같은 대운하도 그렇고, 장학금을 받아야 하는 대학 입시정책도 그렇고, 전화받을 때도 돈 내야 하는 핸드폰 요금 정책도 그렇고, 여성부가 복지부에 흡수되는데 여성부가 힘이 더 커지는 정부조직개편안도 그렇고..

전혀 아이큐 100짜리인 나로서는 이해가 안되는 정책들만 나오고 있으니, 우리가 아이큐430짜리 뽑았다고 해도 별로 이상할 것은 아닌 것 같다.


문제는 그냥 웃어넘길 430 논란이 아니다. 진짜 문제는 이번 대선에서 허경영 후보에게 표를 던진 대부분의 사람이 장난으로, 심심해서, 등등 말도 안되는 이유에서 였다면, 이번 대선에서 이명박에게 표를 던진 사람들도, 허경영에게 표를 던진 사람과 비슷한 생각이거나 수준이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 도 있는 위험한 상황이 지금 인수위를 비롯한 대통령당선자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다는 반증에서 부터 비롯되는 국민 바보 프로젝트 아니겠는가?

이명박의 아이큐가 100에서 왔다갔다 하는 수준일지는 모르지만, 중요한것은 우리가 말하는 어떤 것도 이명박의 귀에는 안들리는데다가, 언젠간 운하 공사도 시작될 것이고, 경제는 도 다시 재벌과 있는 놈들 중심으로 돌아가게 될 것이 뻔하기 때문에, 이번 대선 후유증의 가장 큰 문제점인 국민바보프로젝트는 어찌되었건 시작될 것이고 성과가 어느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점이다.


이명박의 아이큐와 상관없이,

이명박정권의 좆대월드는 2월 25일이면 개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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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Q가 100정도라 미안했을 노 대통령


이렇게 이야기 하는 나도 사실 이명박의 아이큐보다 더 궁금한 것은, 그동한 노무현을 까대던 조중동과 그 일당들(나머지 그 아류작들은 찌라시 수준도 안되니 말할 것도 없고)이다.

"그래 너 잘났다" 면서 까대던,
"대통령이 말을 너무 막한다"고 까대던,
"권위가 없다"고 까대던

그 언론이라는 것들 말이다.

딸이 3이나 있으니 여성정책 걱정하지 말라는 쳐죽일 소리나 해대는 돌발영상을 보면서 얼마나 황당했던지.
아들 얻으려고 애를 4명이나 낳은(저 당시에는 아들딸 구별말고 2만 낳아 잘 기르자던 시대였다는 사실...) 애물단지 같은 고추없는 딸년들 3명이나 낳은게 자랑이라고 저런 소리를 하는데, 듣고 있자니 부아가 치밀 정도다.

외국인들과 만나서 함부로 외국어로 지껄여대는 줒대없는 사대주의적 외교적 수준이라니... 도대체 어느나라의 대통령이, 지도자가, 외국인에게 자랑스러운 우리말과 우리문자를 가지고 있는 한 국가의 수장이 외국어를 지껄인단 말인가? 함부로 말이다. 아무리 지가 잘났더라도, 아무리 우리나라가 좆같아도, 함부로 영어를 지껄인다는 것은 굴욕적이다.


이런 수준의 이명박 당선자에게, 침묵하는 조중동의 5년이 궁금하다.





물론, 대운하의 물살에 살아남기라도 해야 한마디 하겠지만.

오늘 오후는 간만에 조갑제의 갑작스런 등장 덕에 각 포털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기자가 찾아낸(?) 갑제씨 홈페이지의 글이 오늘 오후의 정치관련 화두로 등장했다.

조갑제 같은 인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의 말 처럼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너무 민감한 것은 아닌가 하고 가끔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진중권 교수는 지만원씨에 대해 한 말이지만, 이런 사람들에 대해 그저 '노인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역시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논외 이지만, 최근 지만원씨가 2007년 대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소속 정당은 시스템미래당)

아무튼, 오늘은 동아일보도 그다지 조갑제의 편은 아닌 것 같다. 같은 보수로서 평생을 같이 할 것 같았던 지만원씨와도 결별한지 오래인 조갑제씨의 불쌍하고 힘 없는 행보가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이런 점에서 우리 복지 예산의 늘려야 한다는 필요성은 강하게 느껴진다. 한나라당은 왜 복지 예산을 자꾸 줄이려는 것일까?

문제의 글의 제목은 위의 링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왜 富者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가?" 이다. 사실, 이 제목을 봤을 때만 해도 별로 이에 대한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비판할 것이 뻔하고, 또 조갑제라는 사람의 글은 전형적인 저널리즘도 아닌, 일종의 선동적 언어로 가득찬 글이라서 반박이나 논평을 위한 근거도 미약하고,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족을 좀 달자면, 조갑제의 글은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는 추천하기 매우 곤란한 글이다. 논술로서의 기본적인 요건을 거의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분한 군중을 향한 호통이 대부분인데 뭘 읽는단 말인가?)

조갑제의 글을 오래간만에 읽은 이유는 글의 첫머리 때문이었다. "예수는 위대한 시장경제론자". 나름 30년 넘게 교회를 다녔고 친가 외가 모두 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집안의 후예(?)로서 매년 선거때만 되면 되살아나던 반공과 시장경제에 앞선 기독교 꼬드겨 표 끌어내는 작태가 아닌가 싶어 자세히 읽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의 반공과 시장경제에 대한 왜곡된 충성심만 모아도 충분히 승산있는 것이 김영삼 이후의 우리 선거 풍토가 아니던가.

각설하고,

조갑제씨의 논리는 이러하다.

  1. 부자는 우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신뢰성이 강하므로 부자가 되었다.
  2. 가난한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신용이 떨어진다.
  3. 정상적으로 돈을 벌고 좋은 곳에 그 돈을 쓰는 것이 가장 큰 도덕이다.
  4. 따라서 부자가 더 도덕적이다.
사실,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조갑제 나름의 논리는 마지막 10여줄이 대부분이다. 상당부분은 예수의 에피소드를 인용하여 그에 대한 이야기만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다지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다. 조갑제씨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구절은 이른바 '달란트의 비유'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하기로 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보면 비유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해석에 의하면, 당시 로마는 유대인의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하고 있었고,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던 예수는 이에 대한 박해를 피하고자 비유로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도 하고, 또 일각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도록 함으로서 자율적인 신앙을 싹트게 함이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열달란트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신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능력을 주셨는데(달란트는 돈을 세는 단위이며, 후에 탤런트의 어원이 되었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전, 이 능력과 은사를 충분히 활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께 능력과 은사를 충분히 받은 사람들의 책임"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조갑제씨는 이상한 논리로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고 있다.
그는 이 비유를 자본주의 윤리의 핵심이라는 전제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1. 예수는 商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자를 받는 행위도 부정하지 않는다.
  2. 예수는 공짜심리를 대단히 경멸한다.
  3. 예수는 자본주의의 큰 동력인 모험을 찬양한다.
  4. 예수는 게으른 것을 惡으로 본다. 무능과 무지를 無産계급의 미덕으로 선전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억지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5. 예수는 열심히 잘 하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효율의 논리에 충실하다.
  6. 예수는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인류 문명의 짐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
  7. 악하고 게으른 자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은 아편이 되었다.
  8. 예수의 자본주의 윤리를 계승한 서양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데 쓰는 것이 善이라는 淸富의 윤리를 가졌다
  9. 자본주의의 씨앗이 도저히 자랄 수 없는 척박한 토양에서 세계적인 경제대국과 대기업을 키워낸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같은 사람들은 요사이도 욕을 더 많이 먹고 있다.

30년 넘게 교회를 다니다보면, 이른바 이러한 사회적 문제와 해석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론이 무의식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예수와 상행위 또는 청빈과 청부라고 하는 신조어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무의식 중에 답을 낼 수 있을 정도의 학습이 이루어진다(이것은 비단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부자를 근본적으로 또는 기본적으로 선하게 보았는가?

아니다. 조갑제씨가 간과하고 있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매우 유명한 것이니 그도 읽었으리라.

어떤 "도덕적인"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성경에는 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다. 이를 본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태복음 19:23-24)
(주 : 약대는 낙타를 말한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있는 글자 그대로만 해석한다거나, 일부만을 떼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방법은 수많은 이단을 낳았고, 이러한 좋은 예들이 JMS정명석, 영생교, 그리고 최근에 문제된 신천지 등이다.

기독교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수많은 해석본은 기독교 교리와 해석에 매우 많은 다양성을 부여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잘못된 해석은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몇년전 휴거 소동이나,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등이 좋은 예라고 하겠다.

성경의 일부 구절을 전체적인 조화속에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매우 금기시 하는 것이다.
조갑제씨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같은 마태복음의 19장에 나오는 더 유명한 말은 왜 빼먹었는지 모르지만, 조갑제식의 해석은 기성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성경은, 그리고 예수는 모든 부자가 악하다고 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가 모두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누가복음 21장에서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중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고 있지는 않다.(사도행전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라는 초대교회의 생활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초기 공산주의사회와 유사하다)

예수가 부자와 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어려워 보일지는 몰라도 자세히 보면 매우 명확하다.

돈이 많은 부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부자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매우 강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즉, 부자가 됨으로서 가지게 되는 자만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 그리고 그 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탐욕의 무한한 증가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에 대해 끊임없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갑제가 예수의 말을 끌어들여 공연히 어떤 후보를 지지하고자 하는지 알만하다만, 단순히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도덕점수를 몇 점 더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따위의 이런 성경의 해석은 절대로 옳지 않다. 이런 식으로 이명박의 도덕성 논쟁을 무마하려는 논리는 치졸할 뿐이다.

조갑제의 성경 해석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경계하여야 할, 이단의 논리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사도행전 20:30)
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11:15)
그가 좋아하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모두가 중앙일보의 촌철살인의 기사에 정신이 팔려있는 동안,

우리의 트로이카 조중동의 막내(? 물론 지들은 막내가 아니라 맏형이고 싶겠지요마는) 동아일보가 연타석으로 안타를 쳐주셨다.

동아일보는, 중앙일보가 가히 네티즌에 대한 폭탄테러 수준의 기사를 써갈겨 댄 것을 보고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가 보다. 기껏해야 1965년 창간되어 이제 겨우 40살 갖넘긴 초짜가, 1920년 부터 일제시대, 6.25, 미군정을 온통 몸으로 느끼며(조낸 야한 놈들 *-_-*) 살아온 동아일보의 가는길을 앞질러 가려는 것을 보며 얼마나 안타까웠을까?

그러나, 역시 동아일보는 조선보다 덜 무모하고, 젊은 혈기에 팍팍 무릎팍 까대며 달리는 중앙보다 교활하다.

선관위의 노고에 감사하며, 선관위의 나아갈 바를 밝혀 선관위의 앞날에 큰 영광을 바라마지 않는 기사를 써서 선관위에 하사하심으로서 그 이름을 만방에 떨치..................................................................................려는 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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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수치려고 하는데 말이지;;;



딱걸렸어 -_-+



온 네티즌이 선관위의 말도 안되는 황당 쇼에 혀둘러대며 거품 물고 쓰러지던 그 시간,

아무튼 잘 봐줄래도 도대체가 동아일보 수준에서는 철없는 젊은 놈들 싸가지 없이 난리치는데다가, 박정희 때라면 상상도 못할 짓거리 하는 꼴 보니까 이 나라의 미래가 걱정걱정걱정되던 그 시간인

2007년 6월 23일 새벽 3시 1분(시간도 절묘하다. 동아일보는 이 기사 쓴 기자한테 야근 수당 팍팍 써라)

선관위의 외로운 심판을 찬양하며 누군가는 글을 휘날렸다.

< 선관위의 끊임없는 투쟁의 역사 >

"부침이 있었지만 큰 트렌드로 보면 선관위는 강자를 억제하고 약자를 보호해 공정한 경쟁을 만드는 역사를 만들어 왔다. 여당의 힘을 억제하는 쪽으로 갈 수밖에 없었다. 끊임없는 싸움이었다"는 선관위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가면서 네티즌에게 몰매 맞고 있는 선관위와 그 새벽에 껴안고 뒹굴;;;;;;; -_- 이건 아닌가;;;

22일부터 시작된 선관위의 단속과 그에 따른 네티즌들의 만발을 몰랐을리 없는 동아일보가 왜 요 따우로 이쁘장한 기사를 내놓았을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니들이 알고, 내가 알까? -_-+


게다가 한 방에 모든 네티즌을 날려버린 중앙일보에 뒤쳐질까봐 후속타도 한개 내놓으셨다.

물론 똑! 같은 시간에.

이것이 바로 강호에서 1 갑자 이상의 내공을 가진 고수들만이 할 수 있다는 바로 그 일타 쌍피!!!!!!!!!!!!

< 외국의 선거관리 >
어찌 아름답다 하지 않을쏘냐.

뭐 별로 내용도 없는 두번째 기사는 화려한 인테리어로만 공허한 울림이 될 뻔 하였으나, 첫번째 기사를 만나 그 날개를 온 천하에 펼치게 되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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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둘 수 없;;;;-_-+



사실, 이번 사태와는 거의 관계 없어보이는 두 개의 기사에 대해 내가 흥분하는 이유는,

동아일보가 모처럼 동아일보다운 3중꺽기급의 좌돌려우돌려막꼬아 에둘러 지원하기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점이다.
중앙일보처럼 노무현 탓이네로 밀어버리기에는 사안이 거시기 하지만, 그럼에도 선관위 힘실어주기에 가만 있으면 나중에 누구한테 혼날까봐 동아일보의 80년 묵은 특기인 측면 지원의 전형적인 모습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중심이 아닌 권력 그 자체인 조선일보보다는 멀리 떨어진 듯 하지만, 매운탕과 추어탕의 마지막 맛을 내는 산초가루 처럼, 안들어가면 맛이 콱 죽어버리는 결정적 양념의 제왕 동아일보 다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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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상상하건, 그 이상을 보도해 주시는 동아일보



중앙일보가 온 몸으로 선관위를 보호하고 있을 그 무렵,


동아일보는

혼자 울고 있던 선관위 아가씨를 저 아늑한 방으로 데려가,
달콤한 말로 그 눈물 닦아주고는,
그 드넓은 어깨로 감싸 안고,
한손으로 등을 토닥거려 어루만지며,
ㅇ다른 한 손으로는 허벅지를 쓰다듬...
이윽고 분위기가 무르익자,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에 ....
옷고름이 스르르.....;;;;


쿨럭;;



나는 선관위가 말한대로,

선거에 영향을 주기 위하여 특정정당을, 특정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하지 않는다만,



나는 확실히

동아일보에 반대한다.

동아일보가 은근히 지지하는 후보나 특정정당, 대놓고 지지하는 특정정당과 특정후보에 반대한다.

참고로, 현행법상 특정의 언론사가 특정의 후보를 지지하거나 반대할 수 없다.
만약 내가 이렇게 말하는 것이 선거법 위반이라면,



그것은 동아일보가 선거법을 위반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동아일보, 같이 죽자!!!...........................................................................................는건 아니고, 나는 살아야겠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동아일보는....................................................................


자격이 없다

Posted 2007. 5. 16. 17:01
< 장애인이 죽어야 나라가 산다 >

기독교인으로서, 장로로서, 정치인으로서, 대통령예비후보로서,
그 의도가 무엇이건, 이 정도의 발언을 하는 사람은 한 나라의 공직자가 될 자격이 없다. 그것이 무엇이건.

그것이 지 머리속에 들어있는 생각과 다르더라도, 그것은 머리속으로만 생각하고 말 일이다.



이명박의 저 발언은,

'누군가'는 1941년에 반드시 낙태를 했었어야 했다는 사실만을 우리에게 깨닫게 해줄뿐이다.

이명박은 1941년 12월생이다.


요즘 이명박을 대통령 만들어 또 한번 정권을 잡아보고자 하는 조선일보에는 당연히 이따위 기사는 없다.
< 검색결과 보기 >

더 재미있는 것은 포털의 작태.
< 다음의 쇼 >


네이버에서 "이명박 낙태"로 검색하면,

뉴시스, 오마이뉴스, 서프라이즈, 한겨레, 머니투데이, 프레시안, 연합뉴스, 노컷뉴스, YTN 등등 몇개의 기사들만 검색될 뿐이다.

조중동은 침묵. 줄서기 라는 것을 벌써부터 한다는 것이 사실인가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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