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시즘을 향한 변명

Posted 2007. 7. 9. 16:14
몇년전에 읽었던 [우리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이 있었다.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든 파시즘의 잔류와 그로인해 표출되는 광기의 사회, 대한민국.

나는 아직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라는 과거의 증기기관차가 힘겹게 또는 은밀히 앞장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파시즘의 이름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파시즘을 다른 가면 속에 만나고 그것을 일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파시즘은 2차대전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현재의 힘일 수도 있다.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살고있는 이 대한민국일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어쩌면 21세기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강렬한 열정의 폭풍만이 국가의 운명을 돌릴 수 있지만, 그 열정은 그것을 가진 사람만이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 말은,

히틀러가 한 말이다.



파시즘? 파시즘!

파시즘은 쉽게는 독재적인 전체주의를 의미한다. 물론 정치사상으로서 이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상속의 파시즘. 독재적 전체주의 사상이 침투한 우리 일상에서 꽃핀 작은 파시즘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큰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파시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반합리주의(antirationalism)
2. 기본적인 인간평등을 부인
3.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폭력과 기만
4. 엘리트에 의한 정치(government by elite)
5. 생활양식으로서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전체주의
6.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는 불평등과 폭력이라는 파시즘의 기본적인 원리
7. 국제법과 국제질서에의 반대
8. 파시즘의 조직 및 관리 원칙으로서의 협동체국가(協同體國家:corporate state)
일상속의 파시즘이란, 합리주의적 이성에의 호소에 반대하며, 인간 또는 인종의 차별을 인정하고 평등을 무시한다. 인간관계에서 힘의 강역에 따른 계급주의를 인정하고 사회질서의 평등과 힘의 균형을 부인하며 폭력에 의한 질서의 확립을 전제로하는 전체주그이적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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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끝난지 60년이 넘은 지금. 우리에게 파시즘은 어떤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가.

아니 그것을 우리는 그림자라 할 수 있을까?

일상화된 폭력과 차별, 그리고 권위에 대한 근거없는 복종과 타협, 자율적인 균형 회복능력의 상실,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광기의 표출.

우리는 과연 이 시대의 파시즘으로 부터 자유로운가?

남녀평등 - 파시즘의 친위대

파시즘을 말할 때 인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 어쩌면 남녀평등의 문제다. 여자는, 남자는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피상적 나열은 곧 파시즘의 성공적 일상침투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군대를 이야기 하고, 일상적으로 여성부 꼴페미들을 욕한다.

여성부는 존재하여야 하는 문제에 있어 우리는 근거없는 낭설 속에 꼴페미를 덧씌워 그들의 해체와 박멸(?)을 주장한다. 심지어는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페미니스트들 조차 일상적 차별과 언어로 종속된 그들의 일상이 파시즘이라는 기저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조리퐁에 대한 시각적 폭력과 소나타의 헤드라이트로 이어지는 빛나는 페니시즘(penis + ism)은 여성부(정확하게는 여성가족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논리가 되어버렸고, 타워펠리스 속에서 페니스를 보는 안티페니시즘은 남성의 성기를 닮은 폭력으로 페미니스트의 목을 죄어오고 있다.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가 되는 알수 없는 폭력동화적 남성상은 우리 사회의 외곽을 보호하는 군대를 서울시 한복판의 터주로 만들었고, 나 군대 있을 때는 잘 독아가던 군기 확립은 사회에서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엎드려 뻗친 아랫 것들의 개념없는 텅빈 머리속에 있다.

아버지와 엄마로 포장된 언어는 아버지의 권위 속에 엄마를 부엌으로 내 몰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의 사회적 분화가 정착된 이후, 여성성과 남성성의 구별과 차별은 우리 인식의 기저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고, 우리 사회 역시 1980년대 여성의 사회진출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이래 아직까지 그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발전도, 쇠퇴도 하지않은 sex의, gender의 파시즘은 지금 트랜스젠더의 더러운 성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하리수의 여성성을 인정하지만, 그녀의 성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결혼이 이 사회에 던지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생래적이지 못한 탄생을 두 불안정한 남녀의 성기의 결합에 더욱 궁금증을 가진다. 이반으로 불리는 동성애자는 더러운 성도착자에 불과한 사회. 그것이 이 시대 파시즘이 남녀의 평등에서 옮아간 일반과 이반의 파시즘이다.

[필라델피아]라는 영화에서 동성애자인 톰 행크스의 변호를 맡은 덴젤 워싱톤의 대사에 이런 말이 있다.

"이곳은 필라델피아 입니다. 형제애의 도시이며, 자유의 탄생지로서..
  독립선언의 장소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선언문에는....
  '모든 정상인(이성애자)는 평등하다'가 아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쓰여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타워펠리스에서 페니스를 보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안의 파시즘을 보았다. 군대를 무자비한 폭력집단으로 몰아 여자가 갈 수 없는 연약한 피보호대상만을 양산하여 그들은 스스로 파시즘의 보호를 선택했다. 여성을 남성의 객체로서만 인정하고 여성에 대한 일방적 수혜적 정책을 지지함으로서 가부장적 파시즘을 인정하는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군복무에 따른 가산점의 문제나, 간통죄와 혼인빙자간음죄의 폐지와 관련한 문제, 그리고 호주제도의 철폐 등에 있어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gender로서의 사회적 존재들과의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한 공론화된 타협점이 필요했을 뿐이다. 목적의 정당화를 위한 수단의 도외시는 결국 파시즘을 통한 이상주의의 건설에 목을 메는 또 다른 무솔리니의 친위대로 태어날 뿐이다. 누군가의 말 대로, "그러나 여성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권력에 기대어 여론을 외면한 채 급진 페미니즘 편향의 가부장제적 파시즘으로 강제했으며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모순과 갈등만 증폭되어 왔다."


파시즘의 폭력 정점과 복수

인간은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여야 한다.

하지만, 인권은 타인의 인권을 존중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권은, 단지 그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더라도 그에게 인정해야 할 것은 인권이다.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인정해야 할 마지막은 바로 인권이다. 인권은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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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대가로서 주어진다면, 그것은 사회의 합의나, 타인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호혜적(互惠的) 관점이거나, 국가의 시혜적 은총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파시즘에 대한 투쟁으로 주어지는 대가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타인의 인권에 대한 대가로서 가지는 인권은 호혜적이라기 보다는 복수적이다. 나에게 인정된 인권은 타인에게도 그 만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일상적인 복수와 폭력을 불러오는 바로 그 우리의 일상이 바로 파시즘이다. 술집에서 얻어맞은 아들을 위하여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결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사형제도를 이야기하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당해봐야만 안다는 끊임없는 저주와 사형당해 마땅한 자(?)들에 대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인권이 사라진 정죄는 어쩌면 우리 일상의 파시즘이 가장 극렬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서적 호소는 있으되, 사형당하는 자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주홍글씨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는 형성되어서는 안된다. 죽어도 싼, 죽어 마땅한 주장에 불과한 철없는 이론가로 전락해 버린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권은 Zero Sum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인권을 위한 사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해자를 벌하는 것은 피해자의 인권을 위함이 아니요,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발전의 의미로서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무한반복이 사법체계 내에서 일어난다. 나를 죽임으로서 누군가의 한과 인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상은 결국 축소된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사람을 살해하거나, 어린이를 강간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인권이 없다는 생각은 나와 너는 다르며 내가 널 죽일 수 있다는 파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파시즘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유고에서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현대사를 기록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반드시 죽어야 했던 사람은 오직 예수 뿐이었다.


피부속의 파시즘

신나찌들의 동양인에 대한 이유없는 폭력보다, 우리에게는 이미 일상화 되어버린, 관념화되고 고착되어버린 일상의 차별과 멸시, 그리고 하얀 탈색인종을 향한 이유없는 사대주의는 더 국제적 수준의 범죄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남아를 이야기하며 웃고 즐기는 우리, 파키스탄을 이야기하며 즐기는 우리는 이미 파시즘의 민족주의에 빠진 파시스트 집단에 불과하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며 그들을 차별하는 우리는 그들보다 과연 우수한 종자인가? 백인들에게 길들여진 참담한 사육견이 백인의 살가운 피부색에 현혹되어 검은 대륙과 뜨거운 동남아시아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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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워도 인도인 영문학자보다는 백인의 범죄자에게 배우는 것이 좋을까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답 따위는 필요없는 정리가 되어버린 문제다. 조선족은 이미 우리의 피용자로서 어눌한 한국어 발음에 사로잡힌 열등한 족속으로 치부하고 있다. 우리에게 과연 그들의 피부색과 어눌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한 일상적인 차별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것 역시 피부색 속에 파묻혀 버린 파시즘은 아닌가.

백인에게는 영어로 다가가 굽실거리는 주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검은 피부의 동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노동자에게 채찍을 가하고 더러운 것이 묻을까봐 그들을 박해한다. 그들의 음성화된 폭력과 범죄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그들을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서 얼마나 대우해 왔는지 돌아봐야 한다. 조선족의 범죄와 일탈을 이야기 하기 전에 국적도 없이 중국에 동화되어 오다가 대한민국에 의해 전혀 외국동포로서의 지위는 갖지 못한 채 다시 외국의 이주노동자로 전락해 버린 조선족의 황당한 피해자적 지위를 왜 말 못하는 것일까.

외국의 한국인 차별에는 분노하면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들을 차별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얼굴이 검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열등한 인종으로 더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일 뿐이지만, 반대로 하얀 얼굴의 미국과 유럽인에게 우리는 충실한 황인종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문화를 습득하고 그들의 언어를 위하 영어마을을 세우고, 그들을 위해 우리의 이름은 흔쾌히 성(姓)을 뒤로 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결국은 우리에게 돌아올 우편물을 위해서 우리는 번지부터 시작해서 Seoul로 끝나는 주소 하나쯤은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만연화된 파시즘 속에 피어나는 향기로운 사대주의가 빛을 발한다.

우리보다 하얗지 않은 모든 자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은 물론, 같은 조선족에 대한 파렴치한 배타적 위계의식은 우리를 파시즘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파시즘을 향한 변명

우리에겐 근대도, 현대도, 보수도, 진보도, 자유도 없다.
더럽고 치졸한 파시즘의 역사.
그것이 우리에게 파시즘이 남겨준 유산이다. 아무것도 없음의 유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