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오후는 간만에 조갑제의 갑작스런 등장 덕에 각 포털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기자가 찾아낸(?) 갑제씨 홈페이지의 글이 오늘 오후의 정치관련 화두로 등장했다.

조갑제 같은 인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의 말 처럼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너무 민감한 것은 아닌가 하고 가끔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진중권 교수는 지만원씨에 대해 한 말이지만, 이런 사람들에 대해 그저 '노인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역시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논외 이지만, 최근 지만원씨가 2007년 대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소속 정당은 시스템미래당)

아무튼, 오늘은 동아일보도 그다지 조갑제의 편은 아닌 것 같다. 같은 보수로서 평생을 같이 할 것 같았던 지만원씨와도 결별한지 오래인 조갑제씨의 불쌍하고 힘 없는 행보가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이런 점에서 우리 복지 예산의 늘려야 한다는 필요성은 강하게 느껴진다. 한나라당은 왜 복지 예산을 자꾸 줄이려는 것일까?

문제의 글의 제목은 위의 링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왜 富者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가?" 이다. 사실, 이 제목을 봤을 때만 해도 별로 이에 대한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비판할 것이 뻔하고, 또 조갑제라는 사람의 글은 전형적인 저널리즘도 아닌, 일종의 선동적 언어로 가득찬 글이라서 반박이나 논평을 위한 근거도 미약하고,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족을 좀 달자면, 조갑제의 글은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는 추천하기 매우 곤란한 글이다. 논술로서의 기본적인 요건을 거의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분한 군중을 향한 호통이 대부분인데 뭘 읽는단 말인가?)

조갑제의 글을 오래간만에 읽은 이유는 글의 첫머리 때문이었다. "예수는 위대한 시장경제론자". 나름 30년 넘게 교회를 다녔고 친가 외가 모두 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집안의 후예(?)로서 매년 선거때만 되면 되살아나던 반공과 시장경제에 앞선 기독교 꼬드겨 표 끌어내는 작태가 아닌가 싶어 자세히 읽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의 반공과 시장경제에 대한 왜곡된 충성심만 모아도 충분히 승산있는 것이 김영삼 이후의 우리 선거 풍토가 아니던가.

각설하고,

조갑제씨의 논리는 이러하다.

  1. 부자는 우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신뢰성이 강하므로 부자가 되었다.
  2. 가난한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신용이 떨어진다.
  3. 정상적으로 돈을 벌고 좋은 곳에 그 돈을 쓰는 것이 가장 큰 도덕이다.
  4. 따라서 부자가 더 도덕적이다.
사실,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조갑제 나름의 논리는 마지막 10여줄이 대부분이다. 상당부분은 예수의 에피소드를 인용하여 그에 대한 이야기만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다지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다. 조갑제씨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구절은 이른바 '달란트의 비유'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하기로 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보면 비유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해석에 의하면, 당시 로마는 유대인의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하고 있었고,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던 예수는 이에 대한 박해를 피하고자 비유로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도 하고, 또 일각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도록 함으로서 자율적인 신앙을 싹트게 함이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열달란트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신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능력을 주셨는데(달란트는 돈을 세는 단위이며, 후에 탤런트의 어원이 되었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전, 이 능력과 은사를 충분히 활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께 능력과 은사를 충분히 받은 사람들의 책임"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조갑제씨는 이상한 논리로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고 있다.
그는 이 비유를 자본주의 윤리의 핵심이라는 전제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1. 예수는 商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자를 받는 행위도 부정하지 않는다.
  2. 예수는 공짜심리를 대단히 경멸한다.
  3. 예수는 자본주의의 큰 동력인 모험을 찬양한다.
  4. 예수는 게으른 것을 惡으로 본다. 무능과 무지를 無産계급의 미덕으로 선전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억지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5. 예수는 열심히 잘 하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효율의 논리에 충실하다.
  6. 예수는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인류 문명의 짐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
  7. 악하고 게으른 자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은 아편이 되었다.
  8. 예수의 자본주의 윤리를 계승한 서양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데 쓰는 것이 善이라는 淸富의 윤리를 가졌다
  9. 자본주의의 씨앗이 도저히 자랄 수 없는 척박한 토양에서 세계적인 경제대국과 대기업을 키워낸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같은 사람들은 요사이도 욕을 더 많이 먹고 있다.

30년 넘게 교회를 다니다보면, 이른바 이러한 사회적 문제와 해석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론이 무의식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예수와 상행위 또는 청빈과 청부라고 하는 신조어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무의식 중에 답을 낼 수 있을 정도의 학습이 이루어진다(이것은 비단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부자를 근본적으로 또는 기본적으로 선하게 보았는가?

아니다. 조갑제씨가 간과하고 있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매우 유명한 것이니 그도 읽었으리라.

어떤 "도덕적인"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성경에는 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다. 이를 본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태복음 19:23-24)
(주 : 약대는 낙타를 말한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있는 글자 그대로만 해석한다거나, 일부만을 떼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방법은 수많은 이단을 낳았고, 이러한 좋은 예들이 JMS정명석, 영생교, 그리고 최근에 문제된 신천지 등이다.

기독교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수많은 해석본은 기독교 교리와 해석에 매우 많은 다양성을 부여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잘못된 해석은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몇년전 휴거 소동이나,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등이 좋은 예라고 하겠다.

성경의 일부 구절을 전체적인 조화속에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매우 금기시 하는 것이다.
조갑제씨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같은 마태복음의 19장에 나오는 더 유명한 말은 왜 빼먹었는지 모르지만, 조갑제식의 해석은 기성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성경은, 그리고 예수는 모든 부자가 악하다고 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가 모두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누가복음 21장에서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중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고 있지는 않다.(사도행전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라는 초대교회의 생활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초기 공산주의사회와 유사하다)

예수가 부자와 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어려워 보일지는 몰라도 자세히 보면 매우 명확하다.

돈이 많은 부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부자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매우 강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즉, 부자가 됨으로서 가지게 되는 자만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 그리고 그 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탐욕의 무한한 증가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에 대해 끊임없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갑제가 예수의 말을 끌어들여 공연히 어떤 후보를 지지하고자 하는지 알만하다만, 단순히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도덕점수를 몇 점 더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따위의 이런 성경의 해석은 절대로 옳지 않다. 이런 식으로 이명박의 도덕성 논쟁을 무마하려는 논리는 치졸할 뿐이다.

조갑제의 성경 해석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경계하여야 할, 이단의 논리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사도행전 20:30)
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11:15)
그가 좋아하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