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 D-08일

요즘 선거판 보면, 이상하게 돌아간다. 이 기사를 봐도 그렇지만, 예전과 달리 그다지 큰 이슈가 되지 않은 것도 있고(물론 이슈가 되고 있다. 예전의 무게감이 사라졌다는 뜻이다. 아마도 대선 직후 2MB의 열렬한 만행들 덕분이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걱정도 된다.) 선거판 요상스럽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여론을 조작한다는 의혹에 시달리는 언론이 존재하는 것도 변함이 없는데 말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번 총선에서 황당하다거나 분노를 느낀다거나 하는 부정적 이미지를 먼저 떠올리게 하는 사건은 동해/삼척 선거구에서 열심히 달리고 계신 최연희 의원이다.

이 사람이 누군가? 다 알 것이라고 생각되지만, 혹시 까먹은 사람을 위해 잠시 정보를 제공해주기 위해 매우 적절한 "재연 사진"을 하나 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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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가슴 움켜쥠"

최연희 의원은 전(前) 한나라당의 의원으로, 술한잔 걸치고 여기자의 가슴을 움켜쥐어서 문제를 일으켰던 분이다. 위의 재연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최연희 의원께서 몸소 피해자의 역할을 해 주셨다) 불의에 가슴을 습격당한 여기자는 이를 공개하고 최연희 의원은 잠적과 탈당으로 이어지는 수모를 당하셨다.

(최연희 의원의 재판에 관한 내 의견은 여기 참조 - 2007/06/15 - [Daily] - 최연희 의원 판결을 비판한다.)

최 의원의 퇴진운동이 함께 벌어진 것은 당연한데;;;

최근 총선을 맞이한 반갑지 않게도 그의 소식을 들은 것은 동해 삼척 선거구에 그가 또 출마한다는 소식과 함께 였다. 그려려니 하는 마음으로(난 동해삼척과는 별로 관계가 없다) 지켜보기만 했지만, 얼마안가서 나온 지지율 조사는 내 눈과 귀를 의심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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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후보는 완전 듣보잡인가?


이건 뭐 압도적이라고 밖에는 표현이 안되는 수치다.
최연희가 어떤 사람인지는 동해 삼척의 유권자들은 물론이요, 이름그대로의 삼척동자들까지 알게 된 사실인데, 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일까?

정치인에게 중요한 것은 도덕성과 청렴성 그리고 능력과 애국심 등등 여러 덕목이 있다.

이 중에서 어떤 것이 더 중요한 것인가는 보는 사람에 따라 그리고 시기와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기준이 나올 수 있겠지만, 모든 것을 두루 갖춘 사람이야말로 좋은 정치인 그리고 훌륭한 정치인일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다면 다연히 그를 뽑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모든 것이 출중한 사람은 없다. 뭐, 전혀 없겠냐마는, 지금 우리 시대에 국회으원 후보로 나온 사람 중에는 없지 않겠는가 하는 것이 내 생각이다. 후보자님들께서 섭섭해 하실까 덧붙이자면, 모든 것을 두루두루 전부 다 갖춘, 이를테면 세종대왕 같은 성군이 될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다는 뜻이고, 국회의원이 다 쓰레기라는 뜻은 아니니 조금 참으시라.

아무튼 그러다 보니 이제는 차선책으로서 전반적으로 능력이나 기타 덕목들이 조금 떨어지는 사람 중에서 골라야 할 텐데, 문제는 최연희라는 사람이 그 차선책으로서 적당한 사람인가 하는 것이다. 도덕성이라는 측면에서 매우 타락한 '과락'의 점수를 얻어버린 최연희라는 인물이 과연 괜찮은 선택인가 하는 점을 동해삼척 유권자들에게 묻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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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고양이건 흰고양이건, 쥐나 잡으라고?


우문현답이라고, 이 문제에 대한 내 의문은 너무나 쉬운 대답으로 돌아온다.

옆의 사진이 모 방송에 나온, 동해삼척의 유권자를 인터뷰한 화면이다.  글씨가 작아 볼 수 없다면 다시 써 줄 수 있다.

남자가 술 한잔 먹고 취하면 가슴도 한 번 만질 수도 있는 거지,
성추행을 하든 어디 가서 노략질을 하든 지역구를 위해서 잘만 한다면 무슨 짓을 하든 무슨 상관있어요?
황당해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똑같은 이유로 최의원을 지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제를 보며 생각해 보다 또 하나의 다른 풍운아가 생각났다.

황우석

연구에 있어서의 윤리적 문제로 인해서 연구에 관한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나 이제는 기억속에서도 잊혀져 가는 황우석이지만 여전히 황우석 지지자들은 다음아고라 등을 통해 그의 복권으 꾀하고 있다.


최연희에 대한 지지여론과 황우석 지지세력은 매우 비슷한 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본질적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이를 달성하기 위한 과정
또는
이러한 목적의 달성을 위한 부수적인 행위 도중 발생하는

다소간의

도덕적 결함이 있는 경우
이는 용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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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우석이 남의 가슴 만졌다는 말은 아니다

황우석과 최연희의 문제가 본질적으로 다르다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이 또한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는 말이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현상가 그 상황을 지배한 기본적인 논리는 위의 논의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는다.

최연희건, 황우석이건, 일만 잘 하면 되는 거지, 다른 것은 좀 못해도 또는 드럽고 치사한 파렴치범이라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둘러 왔지만, 우리는 여기서 우리가 바라보는 박정희를 본다. 아니, 나는 본다.

경부고속도로와 그 엄청난(?) 경제발전을 이룩하신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치세동안, 우리는 수많은 아니, 그들의 주장대로라면 다소간의 인권 탄압행위와 약간의 독재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도덕적 결함과 무시할 수 있는 문제 따위는 덮어줄 수 있다는 것이다.

또 88올림픽과 86아시안 게임은 물론 박정희 각하에 버금가는 경제발전을 수립하신 전두환 전 대통령 각하에게 5.18이라는 도덕적, 법적, 정치적 문제가 남아있지만, 그것은 인용할 수 있다는 자세다.


내가 가끔 인용하는 끔찍한 예문이지만, 이런 것이다.


옆집 아저씨를 정부가 와서 아무런 이유없이 죽여버렸지만,

우리는 잘 먹고 잘 사니까 괜찮다.


최연희의 지지율은 어쩌면 그렇게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는 현상일지도 모른다.
역사적인 평가나 이른바 청산의 결과를 한번도 보지못한 불행한 민족의 현실이다.

박정희의 지지자나 전두환의 지지자들은 말한다.
역사의 평가에 맡기자고.

하지만 그들이 지금 그런 말은 하고 있는 그것이 역사라는 사실은 언제쯤 깨닫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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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래서 내가 담배를 못끊는다.




최연희의 낙선을 기대하지만 아무래도 그렇게 되지는 않을 듯하다.
동해 삼척의 모든 유권자가 저 위의 인터뷰 처럼 같은 생각으로 최연희를 지지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최연희의 지금 선전은 우리나라 민주주의가 얼마나 천민자본주의적으로 물들어 세뇌되었는지 보여주는 단면이 아닐까 해서 당혹스럽기 까지 하다.


최연희를 인정하면,
우리는 황우석을 인정하는 것이고,
이것은

박정희와 전두환을 인정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는 그렇게 후퇴할 것이다.

역시 나는 오늘도,

이명박 보다 국민들이 더 무섭다.
전두환이 가려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인질들이 석방된 지금, 물론, 그 전에도 전두환의 아프가니스탄 행은 반드시 국운을 걸고! 막아야 한다.


우리는 기억한다.
전두환이 어떤 사람인지를.



전두환은 분명 "정의 사회 구현"을 모토로 하여 혼란에 빠진 국가의 정권을 휘어잡았다.
그가 정권을 잡을 당시 우리나라에 가장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나라인 미국은 침묵했고, 그의 광주에 대한 살육을 눈감아 주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절대 우리는 그를 보낼 수 없다!




지금 아프가니스탄의 상황은 어떠한가?

정부는 힘을 잃고 헤매고 있으며,
미군의 점령과 외국군의 주둔으로 온 국민이 상처받고 있다.

어떤가?

1970년대말과 1980년의 우리와 너무나 흡사하지 않은가?


특수훈련을 받고 정치자금이 마르지 않는 29만원짜리 통장을 가지고 있는 그가 아프간에 간다면 그 다음에는 어떻게 될 것인가?

그의 가공할만한 충정훈련의 결과로 이어질 아프간정권 장악과 이에 반대하는 아프간 국민의 대량학살이 이어질 것이 뻔하다.

결정적으로 미군은 이에 대해 침묵하고 그의 또 한번의 홀로코스트를 묵인할 것이다.

탈레반은 반정부 테러단체이니까 그렇다고 치지만, 아프간 정부는, 그리고 아프간의 죄없는 국민들은 어쩔텐가?


우리는 세계평화를 위해서 우리 손으로 전두환을 거시기 해야 한다.

아프간에 보낼 수 없다!


나는 아프가니스탄을 제2의 광주로 만드는 것에 결사 반대한다!

전두환은 우리 손으로!
< 전두환의 화려한 휴가 >

전두환씨가 가려했었다고 한다.
29만원(정확하게는 29만1천원)밖에 없으면서도 나라를 구하겠다는 구국의 일념으로 아프간 가려고했었다고 한다.
비서관들은 그를 보고 돌았다고 했단다.

의외로 그의 곁에도 정신차린 사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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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지만, 납치되었던 피해자들이 욕먹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기사를 보면서, 전두환이라는 이 작자가 끝까지 국민과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개념 밥말아 먹은 생각을 끊임없이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어쩌면 두 명의 희생자에 대한 모욕적 발언이나 다름 없다.

그가 죽어주는 방법이 어디 아프간 가는 방법 뿐이었겠냐만은.
제발 저 인간의 입을 닫아주는 정치인은 없을 것인가?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어 살인귀를 국가 원로랍시고 찾아가 인사하는 것은 이명박이 대통령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을 또 한번 일깨워 주었다.

전직대통령이 아닌 총칼로 권력을 잡은 반역자라는 이름이 더 적당한 전두환에게 인사하는 정치인 치고 제대로 된 놈을 본 적이 없다.

- 서울의 봄 -

1980년. 79년의 12.12사태 이후 사회는 박정희의 죽음을 딛고,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일반 시민의 생활과 달리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이미 거의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대통령이던 최규하는 벌써 꼭두각시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드디어 종식된 박정희 폭력정치의 막을 내리고, 진정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우리는 이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고 부른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소원하던 민주화 열망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드디어 우리나라도 민주화된 근대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정권을 잡은 신군부로서는 박정희류의 억압정치를 통해 사회 각 부분의 역량을 억눌러야만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대중적인 민주화 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신군부가 선택한 그 본보기는 바로 광주였다.




1980년 3월에 각급 대학에서 새학기가 시작되자, 박정희 정권 당시 위축되었던 학생운동과 대학의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듯하였다. 각 대학별로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하고 긴급조치로 학교를 떠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돌아오면서 대학가에 다시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노동현장에서도, 노조 민주화, 근로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조직 정비에 나서고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김대중은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에는 사면복권되어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김종필(김종필은 이미 박정희 당시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숙청을 당한 상태였으나, 신군부에 의해 다시 정치활동을 재게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활동이 가능해진 민주화 세력은 1980. 5. 14.광화문과 종로 등에 5만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명이 운집하여 계엄 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로써 이른바 '서울의 봄'은 절정에 달하는 듯하였다.

- 계엄 확대 -

신군부는 학생의 시위가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서, 1980.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선포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이었지만, 5.17의 계엄 확대는 제주도까지 포함하는 확대 선포 였다. 지금까지 민주화세력이 요구한 계엄 철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조치였고, 이어서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 해제와 유신잔당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전국적으로 벌인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빌미로 시위를 배후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 등으로,
 고려대 이문영(李文永)명예교수
 언론인 송건호 한겨레신문 고문
 민족사학자 함석헌옹
 민족시인 고 은
 한승헌 전 감사원장
 이해동, 문익환 목사.
 한화갑, 김옥두, 김상현, 이해찬, 김홍일, 설 훈(이후 국회의원이 됨)
 이택돈, 한완상, 송기원, 이 석, 예춘호, 김종완, 이호철,
 윤보선 전 대통령은 물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대표였던 김대중 등 26명의 민주인사와 정치인들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전격 체포, 수감하였다.

또한,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 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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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 화려한 휴가


- 5.18 -

광주에서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고 있었다.
18일 일요일 아침 10시 비상계엄의 확대 소식을 들은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했는데 공수 부대의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들과 일반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당시 공수부대의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 최근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시민까지 학생들의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20일에는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지며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민주화요구 시위를 신군부의 거짓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불순 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조작해 보도한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또한 21일에는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하면서 계엄군에 대항한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시민군은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한 틈을 타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민주화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민군대표를 조직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무정부상태였던 이 기간동안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민주항쟁당시 광주를 시민들의 자치가 실시된 빠리 꼬뮌당시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새벽,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대부분 살해하고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당시 정부 발표로는 사망 191명 부상자는 852명이었다.(군인 사망자는 22명, 경찰은 4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9명은 군인간 오인사격으로 사망. 정확한 통계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www.518.org/main.html?TM18MF=A030106 참조)

광주항쟁 일지

  • 5월 17일 토요일 21:40 -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 5월 17일 토요일 24:00 -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 5월 18일 일요일 09:40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 5월 18일 일요일 10:00 - 전남대 주둔 계엄군과 전남대생 간 첫번째 충돌 및 부상자 발생
  • 5월 18일 일요일 10:20 -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
  • 5월 18일 일요일 15:40 - 금남로에 계엄군 및 시위진압 전투경찰대 배치. 시위대 강제 진압
  • 5월 19일 월요일 03:00 -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
  • 5월 19일 월요일 16:30 - 게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 5월 19일 월요일 20:00 -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 5월 20일 화요일 10:20 -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은 채 마구잡이 구타 당함.
  • 5월 20일 화요일 18:40 - 택시 및 버스 200여대가 차량 경적 시위.
  • 5월 20일 화요일 20:10 - 시위대, 도청으로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 5월 20일 화요일 21:05 -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 5월 20일 화요일 21:50 -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보도한 광주MBC 방화
  • 5월 20일 화요일 23:00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2명 사망
  • 5월 21일 수요일 13:00 - 도청앞 광장에서 계엄군 공식 발포 개시.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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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금남로



    임을 위한 행진곡. 지금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불리워 지는 그 노래.

  • 2. 전두환의 등장

    가. 10.26과 전두환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음을 맞이 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저격 살해 사건으로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가 대통령 직무대행을 시작한다. 이후 고건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대통령 직무대행을 할 때까지 유일무이한 국가원수의 유고사태.(노무현의 경우 "유고"는 아니었다)
    정부는 다음날인 79년 10월 27일 공식적으로 박정희의 사망을 인정하고 비상계엄 체계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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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규하 대통령 취임(제10대)




    10월 27일 대통령공고 제66호로 발표된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유고로 대한민국의 안전보장 과 사회질서 그리고 국내치안유지를 도모하기 위하여" 27일 04:00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계엄사령관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육군대장이었다.
    계엄사령부는 10.26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고 김재규의 체포와 수사를 지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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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군사법정에 선 김재규


    경상남도 합천 태생(1931)인 전두환(호는 일해, 최근 합천에 일해공원이 새워지는 웃기는 사태(?)도 발생했다)은,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육사11기로 임관하였다. 1960년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사에서 대위로 있던 전두환은 육사 내에서 지지 시위를 주도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소령이던 1962년에 하나회를 조직하여 군부내에 인맥을 형성하고(군대내에서는 사조직(private organization)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이후에는 1970년에는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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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편 직전의 전두환



    나. 12.12사태

    합동수사본부에서 전두환은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과 연결되어있음을 알고,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11월 김재규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가 종료된 후,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김재규 내란 방조죄라는 죄목으로 체포하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동원, 청와대를 포위했으며, 국방부, 육군본부, 수경사령부를 차례로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체포한 정승화 장군에 대해서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12월 21일에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다)의 재가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고 불법체포를 한 것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를 중심으로한 이른바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 재가를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던 것이다. 신군부는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노재현을 체포, 그를 통해 대통령이 정승화 총장 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13일에는 방송국과 통신사, 신문사 등 모든 언론을 장악하고 최규하에게 계엄사령관의 체포에 대한 사후 승인을 강제로 받아내게 된다.

    정승화 총장의 체포가 알려지자, 이건영 3군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쿠데타 세력에 반발, 이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미8군 사령관이었던 존 워컴(John Wickam)의 반대와 부하들의 이탈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쿠데타 세력은 이건영, 정병주, 장태완 등 반란에 반대한 장성들을 강제 예편시키고, 정승화 장군은 내란 방조죄를 적용, 10년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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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 어릴 때, 화장실에 이런 낙서 진짜 많았다.


    이로서 전두환은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을 휘두르게 된다.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한 전두환은 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같은해 8월 5일 다시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8월 16일에는 최규하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형식상으로는 자진 사퇴. 즉, 하야 하게 한다), 21일에는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하는 결의를 끌어내고 다음날인 22일 예편.
    이어 27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단독 출마하여 총투표자 2,525명 가운데 기권 1명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부 끝.

    다음편은 본격적으로 광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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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면하시기 전의 최규하 전대통령. 사진은 2004년8월 서울대 병원에 입원중에 박근혜의 방문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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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뽀나쓰. 두환씨 부인 순자씨.

    1980년 최고의 인기곡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이 노래로 1979년 발매된 조용필의 1집 앨범은 대한민국 최초의 10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다.

    1. 광주 항쟁의 배경

    가. 박정희의 집권과 민주화 운동의 전개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63년 반공을 국시로 하는 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대통령을 취임한다. 당시까지 경제적으로 대동소이했던 북한과의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주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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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 박종규소령, 이낙선소령, 차지철대위


    박정희 정권의 군사 개발 독재 체제 하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여러 민주화 운동 세력은 반정부 세력을 이어오고 언론과 경제계를 장악했던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 운동에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군부 내 반대세력을 대부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자신과 함께 쿠데타를 이끌었던 김종필을 무력화시킴으로써 1인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독재에 대한 야당과 시민들의 비판이 나날이 증가하고 특히,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 등 노동계의 반발이 거세지는 등 사회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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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나. 10월 유신의 단행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한 박정희 정권은 이후 72년의 10월 유신을 통하여 장기 집권의 준비에 돌입한다.
    1969년 미국의 아시아로부터의 후퇴를 암시하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국과 중국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등 변화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게 된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추적을 당하자 박정희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일인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한다.
    국가 개혁을 계속 추진하여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장기집권의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서구민주주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유신(維新)을 추진하기 위해 1972년 10월 26일 비상조치를 발표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민주주의 제도를 정지시키고, 유신체제 구축에 들어갔다. 유신체제는 결국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대통령의 간선제, 언론탄압, 시민의 언행권 탄압, 의회의 권한 제한, 민간인 무고 학살 등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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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월 유신 헌법 개정 투표장 표어







    나. 10.26의 발발

    1979년초부터 야당과 대학생을 중심으로한 민주화 시위는 거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어 반정부 투쟁은 힘을 얻고 있었고, 여야의 대립은 점차 첨예해져 갔다.
    그러던 중, 8월. 이른바 YH사건이 발생한다.


    YH사건 이후, 김영삼의 의원직이 박탈되자, 신민당 국회의원들은 이에 반발, 집단적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게 된다(이 당시 김영삼이 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신민당의원들의 집단 사퇴에 박정희는 선별적인 사퇴서 수리라고 하는 초강수를 두게되고,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다시 시위를 벌인다.

    79년 10월 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이 작성, 배포되고, 16일에는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여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대규모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 - 계엄령보다 한단계 아래의 대통령 명령. 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된 대통령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시위는 진정되었다.

    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전가옥
    3명의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박정희, 차지철(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 중앙정보부는 이후 국가안전지획부(안기부), 국가정보원(현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가 그들이었다.
    차지철과 말다툼을 벌이던 김재규는 갑자기 총을 꺼내서 차지철과 박정희를 사살하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과 이화여대생 신씨(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무사하였으나 사상 초유의 대통령 유고(사고, 질병으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 사태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외교관 출신)가 대통령 직무대행을 하게 된다.

    10.26 사건의 수사를 위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사건을 수사하면서 김재규와 그 일당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게 된다.

    이로서 1961년부터 이어져온 박정희의 시대가 끝나고 이른바 신군부로 불리던 전두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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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 사람의 호텔생활 >


    이 나라에서 살기 싫은 진짜 몇 안되는 이유.

    대한민국에 전직 대통령이 몇명이나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승만 - 재선 이후부터는 좀 우습긴 했지만, 첫 취임은 정당한 절차를 거쳤으므로 전직 대통령이 맞다.

    윤보선 - 말할 것도 없이 전직 대통령

    김대중 - 직선제에 의한 대통령

    노무현 - 현직 대통령이니, 전직 대통령은 아니다.




    박통 - 헌정질서를 파괴하고, 정당하지 않은 방법으로 헌정 질서를 재편했다.
              따라서 그 헌법 질서와 그에 따른 정권 창출은 전혀 민주적이지 않으며,
              그것을 근거로 취임한 대통령은 대통령으로 인정할 수 없다.

    최규하 - 박통이 죽고 그를 이었으니, 당연히 정통성 없는 정부 수반일뿐.
                박통이 대통령이 아니었고, 그를 이었으니 당연히 아니지.

    전통 - 말할 것도 없음. 쿠데타로 잡은 체육관 대통령일뿐. 전직대통령이 절대 아님

    노태우 - 약간 논란이 있을 수는 있다.(아무튼 이 친구는 직선제 아닌가)
                하지만, 쿠데타 세력의 연장. 그를 통한 외곡된 정치가 뭐. 얼마나 정통성이 있겠는가.

    김영삼 - 삼당야합. 그 하나 만으로도 쿠데타 세력과 정치적으로 통합.
                전통과 노태우의 정통성을 이었으므로 역시 정통성 없음.


    사실, 노태우와 김영삼은 논란이 있을 수 있지만.


    전직 대통령이 아닌 전직 권력자들이 TV건, 신문이건 대가리 들이밀고 나올 때마다 아주 죽고싶을 만큼 내가 이 나라 국민인게 싫어진다.



    도대체, 누가 저들을 대통령이라 하는가!

    밤늦게 돌발영상 보다가 아주 분노에 휩싸여 버렸다.




    솔직하게 말하면,
    다음 대통령이 이명박이 되면 더 싫어질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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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직 좀 이르긴 하지만 광주

    Posted 2007. 4. 9. 17:47



    최소한,

    우리 세대만이라도,
    평생 짊어져야 할 숙제.
    그리고 부담.
    그리고 역사.
    그리고
    우리 세대에서만큼은 모든 것을 밝혀 부끄럽지 않아야 할 광주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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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결전의 날이 다가오고 있다!!

    Posted 2007. 2. 10. 02:25
    < 전두환 고향에선 '현대사 바로알기' 불가? >

    이제 곧, 합천에서 전두환 대통령각하배 쟁탈 단체 이종격투기가 벌어질 예정이시다.
    합천 군민들의 면면을 볼 수 있으리라 기대.
    참고로 미성년자 관람가. "아이들과 함께 합천에 놀러가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합천의 군민들께서는 광주사태를 싫어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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