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의 봄 -

1980년. 79년의 12.12사태 이후 사회는 박정희의 죽음을 딛고, 어느정도 안정을 찾아가는 듯하였다. 그러나 일반 시민의 생활과 달리 정권을 잡은 전두환을 비롯한 신군부는 이미 거의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고 당시 대통령이던 최규하는 벌써 꼭두각시로 전락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사회는 드디어 종식된 박정희 폭력정치의 막을 내리고, 진정한 민주화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우리는 이 시기를 서울의 봄이라고 부른다.
이 때 많은 사람들이 소원하던 민주화 열망은 드디어 절정에 달하고 드디어 우리나라도 민주화된 근대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겨우 정권을 잡은 신군부로서는 박정희류의 억압정치를 통해 사회 각 부분의 역량을 억눌러야만 했던 시기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대중적인 민주화 세력과 야당의 정적을 제거해야 했다.

신군부가 선택한 그 본보기는 바로 광주였다.




1980년 3월에 각급 대학에서 새학기가 시작되자, 박정희 정권 당시 위축되었던 학생운동과 대학의 민주화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는 듯하였다. 각 대학별로 학생회와 평교수회가 부활하고 긴급조치로 학교를 떠났던 해직교수와 제적학생들이 돌아오면서 대학가에 다시 민주화 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노동현장에서도, 노조 민주화, 근로조건 개선을 내세우며 조직 정비에 나서고
가택연금상태에 있던 김대중은 12월 가택연금에서 해제된 데 이어 1980년 2월에는 사면복권되어 정치활동을 다시 시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1980년초의 '서울의 봄' 시기에 김영삼·김종필(김종필은 이미 박정희 당시 부정축재자로 지목되어 숙청을 당한 상태였으나, 신군부에 의해 다시 정치활동을 재게할 수 있게 되었다)

정치활동이 가능해진 민주화 세력은 1980. 5. 14.광화문과 종로 등에 5만여명, 15일에는 서울역 광장에 학생, 시민 20만명이 운집하여 계엄 철폐, 민주화 추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이로써 이른바 '서울의 봄'은 절정에 달하는 듯하였다.

- 계엄 확대 -

신군부는 학생의 시위가 잠시 잠잠해진 틈을 타서, 1980. 5. 17. 비상계엄 전국 확대조치를 선포하였다. 그 이전까지는 제주도를 제외한 계엄이었지만, 5.17의 계엄 확대는 제주도까지 포함하는 확대 선포 였다. 지금까지 민주화세력이 요구한 계엄 철폐에 정면으로 대치되는 조치였고, 이어서 전두환 신군부는 비상계엄 해제와 유신잔당 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면서 전국적으로 벌인 대학생들의 대규모 시위를 빌미로 시위를 배후조종하여 정부를 전복하려 했다는 혐의 등으로,
 고려대 이문영(李文永)명예교수
 언론인 송건호 한겨레신문 고문
 민족사학자 함석헌옹
 민족시인 고 은
 한승헌 전 감사원장
 이해동, 문익환 목사.
 한화갑, 김옥두, 김상현, 이해찬, 김홍일, 설 훈(이후 국회의원이 됨)
 이택돈, 한완상, 송기원, 이 석, 예춘호, 김종완, 이호철,
 윤보선 전 대통령은 물론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을 위한 국민연합' 공동대표였던 김대중 등 26명의 민주인사와 정치인들을
학원, 노사분규 선동과 권력형 부정축재혐의로 전격 체포, 수감하였다.

또한, 모든 정치활동의 중지 및 옥내외 집회 시위의 금지, 언론 출판.보도 및 방송의 사전 검열, 각 대학의 휴교령, 직장 이탈 및 태업.파업의 금지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헌법에 규정된 국회통보 절차도 거치지 않고 계엄군을 동원, 국회를 무력으로 봉쇄한 채 취해진 불법조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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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전명 : 화려한 휴가


- 5.18 -

광주에서는 전북 금마에 주둔하고 있던 7공수부대가 17일 저녁 10시경 광주에 투입되어 전남대, 조선대, 교육대 등에 진주하고 있었다.
18일 일요일 아침 10시 비상계엄의 확대 소식을 들은 대학생 100여 명이 전남대 교문 앞에 모여 시위를 했는데 공수 부대의 무차별적인 진압으로 사상자가 속출하였다. 이에 학생들은 반발하며 광주 도심으로 옮겨가 시위를 계속하였으나 계엄군이 곤봉과 대검으로 학생들과 일반시민을 가리지 않고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당시 공수부대의 작전명은 "화려한 휴가" 최근 영화로 제작되기도 하였다).
이에 분노한 광주의 일반시민까지 학생들의 시위에 합류하기 시작했고, 20일에는 택시 운전사들의 차량 시위가 이어지며 시위대의 규모가 20만 명 이상에 이르렀다.

수세에 몰린 계엄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으나, 시위대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민주화요구 시위를 신군부의 거짓주장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불순 분자와 폭도들의 난동으로 조작해 보도한데 격분한 시위대는 광주MBC 방송국에 불을 지르고, 광주 시청을 점거했다. 또한 21일에는 예비군 부대의 무기고를 열어 총을 들고 무장하면서 계엄군에 대항한 시민군이 결성되었다.

시민군은 계엄군이 외곽으로 철수한 틈을 타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했다. 계엄군에 의해 외부와의 통신과 교통이 차단된 상황에서 이들은 계속해서 계엄의 해제와 민주화요구 인사 석방을 요구하면서 시민군대표를 조직하여 계엄군과 협상에 나서는 한편, 시민군 자체적으로 도시의 치안을 담당했다. 무정부상태였던 이 기간동안 광주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질서를 지켜나갔으며 대치 상태는 26일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래서 일부 지식인들은 광주민주항쟁당시 광주를 시민들의 자치가 실시된 빠리 꼬뮌당시 파리에 비유하기도 한다.

27일 새벽 군인 25,000명을 투입한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되었다. 광주 시내로 들어온 계엄군은 27일 새벽, 끝까지 남아 항전하던 시민군을 대부분 살해하고 전라남도 도청을 점령하면서 진압 작전을 마무리했다. 당시 정부 발표로는 사망 191명 부상자는 852명이었다.(군인 사망자는 22명, 경찰은 4명으로 알려져 있다. 이중 9명은 군인간 오인사격으로 사망. 정확한 통계는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재단 홈페이지 http://www.518.org/main.html?TM18MF=A030106 참조)

광주항쟁 일지

  • 5월 17일 토요일 21:40 - 비상국무회의에서 비상계엄 전국 확대 의결
  • 5월 17일 토요일 24:00 - 광주 시내 각 대학에 계엄군 진주 (7 공수여단 33대대, 35대대 등)
  • 5월 18일 일요일 09:40 - 계엄군에 의해 전남대생 50여명이 교문 앞에서 등교 저지 당함.
  • 5월 18일 일요일 10:00 - 전남대 주둔 계엄군과 전남대생 간 첫번째 충돌 및 부상자 발생
  • 5월 18일 일요일 10:20 - 학생들이 금남로로 이동
  • 5월 18일 일요일 15:40 - 금남로에 계엄군 및 시위진압 전투경찰대 배치. 시위대 강제 진압
  • 5월 19일 월요일 03:00 - 11 공수여단이 증원군으로 광주 도착.
  • 5월 19일 월요일 16:30 - 게림 파출소 근처에서 조대부고 고등학생 김영찬이 총격 부상을 당함(최초의 실탄 사격)
  • 5월 19일 월요일 20:00 - 시민들이 시위대 합류
  • 5월 20일 화요일 10:20 - 가톨릭 센터 앞에서 남녀 30여명이 속옷만 입은 채 마구잡이 구타 당함.
  • 5월 20일 화요일 18:40 - 택시 및 버스 200여대가 차량 경적 시위.
  • 5월 20일 화요일 20:10 - 시위대, 도청으로 이동. 금남로, 충장로 등에서 공수부대 및 경찰과 대치
  • 5월 20일 화요일 21:05 - 노동청 쪽에서 시위대 버스가 경찰 저지선으로 돌진하여 경찰 4명 사망
  • 5월 20일 화요일 21:50 - 광주민주화운동을 왜곡보도한 광주MBC 방화
  • 5월 20일 화요일 23:00 - 광주역 광장에서 계엄군 발포. 시민 2명 사망
  • 5월 21일 수요일 13:00 - 도청앞 광장에서 계엄군 공식 발포 개시. 이후 시위대는 무장하기 시작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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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주, 금남로



    임을 위한 행진곡. 지금도 광주민주화운동 기념식장에서 불리워 지는 그 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