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전두환의 등장

가. 10.26과 전두환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의 총에 죽음을 맞이 했다.
우리 역사상 최초의 대통령 저격 살해 사건으로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씨가 대통령 직무대행을 시작한다. 이후 고건 총리가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당시 대통령 직무대행을 할 때까지 유일무이한 국가원수의 유고사태.(노무현의 경우 "유고"는 아니었다)
정부는 다음날인 79년 10월 27일 공식적으로 박정희의 사망을 인정하고 비상계엄 체계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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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규하 대통령 취임(제10대)




10월 27일 대통령공고 제66호로 발표된 비상계엄은 "대통령의 유고로 대한민국의 안전보장 과 사회질서 그리고 국내치안유지를 도모하기 위하여" 27일 04:00부터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에 비상계엄을 선포하였다. 계엄사령관은 당시 육군참모총장이었던 정승화 육군대장이었다.
계엄사령부는 10.26사태를 수습하기 위하여 당시 육군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을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임명하고 김재규의 체포와 수사를 지시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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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법정에 선 김재규


경상남도 합천 태생(1931)인 전두환(호는 일해, 최근 합천에 일해공원이 새워지는 웃기는 사태(?)도 발생했다)은, 대구공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진학, 육사11기로 임관하였다. 1960년에 5·16 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육사에서 대위로 있던 전두환은 육사 내에서 지지 시위를 주도하여 박정희의 신임을 얻었고,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실의 비서관에 임명됨으로써 권력의 핵심부에 진입할 수 있었다. 소령이던 1962년에 하나회를 조직하여 군부내에 인맥을 형성하고(군대내에서는 사조직(private organization)은 엄격하게 금지된다), 1963년 중앙정보부 인사과장을 거쳐, 1969년 육군본부 수석부관을 지냈다. 이후에는 1970년에는 연대장으로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였고, 1971년 제1공수특전단 단장, 1976년 대통령 경호실 차장보, 1978년 제1사단장을 지낸 후 1979년 국군보안사령관에 임명된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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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편 직전의 전두환



나. 12.12사태

합동수사본부에서 전두환은 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가 정승화 당시 계엄사령관 겸 육군참모총장과 연결되어있음을 알고, 정승화를 제거하기 위한 준비를 하게 된다.

11월 김재규에 대한 합동수사본부의 수사가 종료된 후,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보안사령관 겸 계엄사령부 합동수사본부장은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겸 계엄사령관을 김재규 내란 방조죄라는 죄목으로 체포하고, 전격적으로 군대를 동원, 청와대를 포위했으며, 국방부, 육군본부, 수경사령부를 차례로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이미 체포한 정승화 장군에 대해서는 당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12월 21일에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한다)의 재가가 있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어기고 불법체포를 한 것이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를 중심으로한 이른바 신군부는 최규하에게 압력을 가하여, 정승화 계엄사령관의 연행 재가를 요청했으나 거절 당했던 것이다. 신군부는 당시 국방부장관이던 노재현을 체포, 그를 통해 대통령이 정승화 총장 연행을 재가하도록 설득하는 한편, 13일에는 방송국과 통신사, 신문사 등 모든 언론을 장악하고 최규하에게 계엄사령관의 체포에 대한 사후 승인을 강제로 받아내게 된다.

정승화 총장의 체포가 알려지자, 이건영 3군사령관, 정병주 특전사령관, 장태완 수경사령관은 쿠데타 세력에 반발, 이를 진압하고자 했으나, 미8군 사령관이었던 존 워컴(John Wickam)의 반대와 부하들의 이탈로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쿠데타 세력은 이건영, 정병주, 장태완 등 반란에 반대한 장성들을 강제 예편시키고, 정승화 장군은 내란 방조죄를 적용, 10년형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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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어릴 때, 화장실에 이런 낙서 진짜 많았다.


이로서 전두환은 완벽하게 정권을 장악하고 대통령을 능가하는 실권을 휘두르게 된다. 이후 광주민주화운동을 효과적으로(?) 진압한 전두환은 80년 중장으로 진급하고, 같은해 8월 5일 다시 대장으로 진급하였다.
8월 16일에는 최규하를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게 하고(형식상으로는 자진 사퇴. 즉, 하야 하게 한다), 21일에는 전군 지휘관회의에서 전두환을 국가원수로 추대하기로하는 결의를 끌어내고 다음날인 22일 예편.
이어 27일에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제11대 대통령에 단독 출마하여 총투표자 2,525명 가운데 기권 1명을 제외한 전원의 찬성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부 끝.

다음편은 본격적으로 광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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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면하시기 전의 최규하 전대통령. 사진은 2004년8월 서울대 병원에 입원중에 박근혜의 방문을 받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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뽀나쓰. 두환씨 부인 순자씨.

1980년 최고의 인기곡 조용필의 창밖의 여자.
이 노래로 1979년 발매된 조용필의 1집 앨범은 대한민국 최초의 100만장이라는 판매고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