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광주 항쟁의 배경

가. 박정희의 집권과 민주화 운동의 전개

1961년 5.16 군사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63년 반공을 국시로 하는 3공화국의 출범과 함께 대통령을 취임한다. 당시까지 경제적으로 대동소이했던 북한과의 경쟁에 승리하기 위해 경제성장에 주력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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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박종규소령, 이낙선소령, 차지철대위


박정희 정권의 군사 개발 독재 체제 하에서 김대중을 비롯한 여러 민주화 운동 세력은 반정부 세력을 이어오고 언론과 경제계를 장악했던 박정희 정권은 민주화 운동에대한 강경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었다.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는 군부 내 반대세력을 대부분 제거하였을 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자신과 함께 쿠데타를 이끌었던 김종필을 무력화시킴으로써 1인장기집권의 기반을 다졌다. 하지만, 독재에 대한 야당과 시민들의 비판이 나날이 증가하고 특히, 1970년 11월 전태일 열사의 분신사건 등 노동계의 반발이 거세지는 등 사회경제적으로 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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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나. 10월 유신의 단행

1인 독재체제를 확립한 박정희 정권은 이후 72년의 10월 유신을 통하여 장기 집권의 준비에 돌입한다.
1969년 미국의 아시아로부터의 후퇴를 암시하는 닉슨독트린이 발표되고, 미국과 중국의 화해가 이루어지는 등 변화의 시대가 오고 있음을 알게 된 박정희 정권은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후보에게 근소한 표차로 추적을 당하자 박정희는 반대세력을 제거하고 일인독재체제를 수립하기 위하여 비상조치를 발표하고 10월 유신을 단행한다.
국가 개혁을 계속 추진하여야 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장기집권의 수순에 들어간 것이다. 국가재건을 위해서는 서구민주주의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한국적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이른바 유신(維新)을 추진하기 위해 1972년 10월 26일 비상조치를 발표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민주주의 제도를 정지시키고, 유신체제 구축에 들어갔다. 유신체제는 결국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미명하에 장기집권을 위한 독재체제를 구축하였다. 대통령의 간선제, 언론탄압, 시민의 언행권 탄압, 의회의 권한 제한, 민간인 무고 학살 등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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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유신 헌법 개정 투표장 표어







나. 10.26의 발발

1979년초부터 야당과 대학생을 중심으로한 민주화 시위는 거의 정점으로 치닫고 있었다.
그해 5월 김영삼은 신민당 총재로 선출되어 반정부 투쟁은 힘을 얻고 있었고, 여야의 대립은 점차 첨예해져 갔다.
그러던 중, 8월. 이른바 YH사건이 발생한다.


YH사건 이후, 김영삼의 의원직이 박탈되자, 신민당 국회의원들은 이에 반발, 집단적으로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게 된다(이 당시 김영삼이 한 말이 바로 그 유명한 "닭의 모가지를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신민당의원들의 집단 사퇴에 박정희는 선별적인 사퇴서 수리라고 하는 초강수를 두게되고, 이에 격분한 시민들은 부산과 마산을 중심으로 다시 시위를 벌인다.

79년 10월 15일 부산대에서 민주선언문이 작성, 배포되고, 16일에는 5,000여 명의 학생들이 시위를 주도하여 시민들이 합세하면서 대규모의 시위가 전개되었다. 시위대는 16일과 17일 이틀 동안 정치탄압 중단과 유신정권 타도 등을 외치며 파출소·경찰서·도청·세무서·방송국 등을 파괴하였고, 18일과 19일에는 마산 및 창원 지역으로 시위가 확산되었다. 이에 정부는 18일 0시 부산 지역에 비상명령을 선포하고 1,058명을 연행, 66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였으며, 20일 정오 마산 및 창원 일원에 위수령(衛戍令 - 계엄령보다 한단계 아래의 대통령 명령. 육군 부대가 한 지역에 계속 주둔하면서 그 지역의 경비, 군대의 질서 및 군기 감시와 시설물을 보호하기 위하여 제정된 대통령령)을 발동하고 군을 출동시켜 505명을 연행하고 59명을 군사재판에 회부하고 시위는 진정되었다.

79년 10월 26일. 궁정동 안전가옥
3명의 남자가 술을 마시고 있었다.
박정희, 차지철(당시 대통령 경호실장), 김재규(당시 중앙정보부장, 중앙정보부는 이후 국가안전지획부(안기부), 국가정보원(현 국정원)으로 이름을 바꾸게 된다)가 그들이었다.
차지철과 말다툼을 벌이던 김재규는 갑자기 총을 꺼내서 차지철과 박정희를 사살하였다. 당시 그 자리에 있었던 가수 심수봉과 이화여대생 신씨(이름은 알려지지 않았다)는 무사하였으나 사상 초유의 대통령 유고(사고, 질병으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상태) 사태에 따라 당시 국무총리였던 최규하(외교관 출신)가 대통령 직무대행을 하게 된다.

10.26 사건의 수사를 위해 당시 보안사령관이었던 전두환이 정치의 전면에 등장한다.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사건을 수사하면서 김재규와 그 일당들을 체포하여 사형에 처하게 된다.

이로서 1961년부터 이어져온 박정희의 시대가 끝나고 이른바 신군부로 불리던 전두환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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