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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7.10 태아와 사람, 낙태와 살인, 민법과 형법 5
  2. 2007.06.15 최연희 의원 판결을 비판한다. 4

< 누구냐 넌? >

아침부터 중앙일보에서 의미있는 판결이 나왔다고 하길래 가 봤더니 이 기사다. 태아를 어느 시점부터 사람으로 볼 것 이며, 어느 시점부터 태아인가의 문제.

사실, 이 문제가 최근에 문제된 것은 아니다. 이미 로마시대부터 이 문제는 법학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져 왔다. 우리 민법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논의가 있었는데, 현대의 법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각국의 사회문화적 성격에 따라 대부분 정리가 되었고 이에 따라 각국은 확립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국마다 그 기준은 다르지만 충분한 논의가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각국의 다수설과 판례는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민법에서는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제3조)고 정하여 출생과 사망이 사람의 시기(始期)와 종기(終期)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문제는, 그 출생이라는 사실을 어느 시점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이며, 언제부터가 사람이 '죽었다'라고 할 수 있는 시점인가이다.(주의할 점은 사람의 권리의무는 출생신고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주어진다)


기사에서 보다시피, 우리나라는 진통설(분만개시설)이다?

정확하게는 주기진통설이다. 출산을 위한 '주기적인' 진통이 있는 그 순간부터 태아가 아닌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을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법조계에서는 거의 논란도 없는(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기사를 쓴 기자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또 다시 이로인해 불궈질 오해를 염려함이다.

법원이, 대법원이 사람이 무엇인지 여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견해를 밝힌다고 해서 그 사람의 또는 태아의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저 사법 정책상의 문제에 불과하니, 그로 인해 인명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 사람이냐? 아니냐?

태아와 사람을 구분짖는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시점에 관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정자와 난자의 수정시기 - 수정설
  2. 수정난의 자궁 착상시기 - 착상설
  3. 착상 태아의 심장 박동시기 - 박동설
  4. 태아의 독립적 운동 시작시기 - 운동설
  5. 신체기관 형성의 완료시기 - 형성설
  6. 출산 전, 부정기적인 진통의 시작시기 - 부정기진통설
  7. 출산전, 주기적인 진통의 시작시기 - 주기진통설
  8. 출산을 위하여 자궁경부의 확장시기 - 출산개시설
  9. 출산 시작 후 태아의 신체 일부가 산모의 몸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 - 일부노출설
  10. 태아가 산모의 몸 밖으로 완전히 나온 시기 - 전부노출설
  11. 산모 밖으로 적출된 태아가 독립적으로 호흡을 시작하는 시기 - 독립호흡설

이 외에도 세분하면 더 많이 분류될 수 있다.(그건 만들기 나름 아닌가?)

일반적으로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기)진통설이 다수설이며 통설이며 판례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형법에서만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형사사건에서는 진통설을 기준으로 태아와 사람을 구분하지만, 다른 분야, 즉 민사사건에서는 다른 기준으로 이를 결정한다. 그것은 전부노출설이다. 이는 일본의 견해와 우리의 견해가 일치한다.

형법에서 태아완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낙태죄와 살인죄의 구별 실익이 있기 때문이다. 태아를 죽이면 낙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 되는데, 태아이냐 사람이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이른바 죄형법정주의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중앙일보에서 인용된 사진



▶ 왜 하필 진통설?

민법에 비하여 좀더 앞선 시점을 사람으로 보는 형법의 태도는 불필요한 낙태를 회피하고, 태아의 생명을 더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필요에 의한 해석이다. 민법의 경우에서와 같이 전부노출설을 취할 경우 출산중인 태아(산모의 몸 밖으로 일부 노출된 태아)를 상해 또는 살해하는 경우 이는 낙태로 보아야 하고, 낙태죄의 경우에는 과실에 의한 낙태죄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태아의 보호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민법에서 인정하는 범위보다 '적당히' 시기를 앞당길 필요가 있고, 이러한 것의 대략적인 사회적 합의를 주기적 진통이라고 보는 것이다.

민법의 경우에는 권리의무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시작시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전부노출설을 취한다. 일반적으로 태아의 신체가 산모의 몸 밖에서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이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의무의 주체로 보는 것이 구별의 편이를 위해 좋기 때문이다. 민법에서 사람의 시기와 종기가 중요한 것은 상속(태중에 있을 때 부친이 사망하는 경우) 또는 손해배상(태중에 타인의 상해로 인하여 장애가 발생하는 경우 등)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해 다루지는 않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루기로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법률 관계를 열거하여 이에 대해서만 출생한 것으로 간주하는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고 있다)

 
▶ 종교계의 주장은 무시된 걸까?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대법원이 사람이 언제부터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 생명의 소중함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과학적인 상태 또는 지위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해석은 법률관계를 명확히 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행위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법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사람의 시작과 마지막을 나누는 것이 종교계가 말하는 것처럼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덧붙여, "가톨릭의대 이동익(신부) 교수는 "나라마다 배아 혹은 태아를 생명체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다르지만 '태아는 사람이 아니다'고 단정짓지는 않는다"며 "충격적인 판결"이라고 밝혔다. "고 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태아는 법률적으로는 사람이 아니다. 태아를 뜻하는 embryo, fetus 등의 단어는 분명히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고 있는모든 나라의 판례는 태아가 사람이 아니므로 권리의무의 주체가 되지 않는 다고 하고 있다.(독일, 일본, 프랑스 등이 우리와 같은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고 있다)

의학계와 종교계에서는 어떻게 이를 해석하는지 자세한 기사는 나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대법원의 태도는 법조계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것이다.

종교계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보호의 대상에 대한 착각이라고 본다. 법률은 보호의 대상이 사람과 태아를 모두 보호하도록 하고 있는 현재의 태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형법과 민법은 태아와 사람을 동일하게 보호한다. 하지만 형법의 입법목적상,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신중할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양자에 대한 평가를 달리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구별은 보호의 수준을 달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자에 대한 대우를 달리하겠다는 것이다. 피의자 처우에 관한 것과 피해(예정)자에 대한 보호수준의 차이로 이를 나눌 것은 아니다.

▶ 사족

중앙일보의 이 기사는 법학에서 논의되던 것을 판례의 예를 통해 밝힌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민사와 형사의 다른 관점에 대한 소개가 없어 아쉽다. 또 종교계의 이러한 반발과 법학계의 주장 등 상호간의 평가에 대한 논쟁은 도외시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한 한두번의 인터뷰로만 기사를 작성했다는 의혹(?)을 버릴 수가 없다. 기자가 쓴 내용의 대부분은 이제 갖 법대에 입학한 신입생도 쓸 수 있는 내용이다(태아의 법적지위는 민법총칙에서 배우고, 민법총칙은 법학통론 또는 법학일반론 이후에 가장 먼저 또는 그와 함께 배우는 첫 법학과목이다).

간만에 눈에 띠는 기사가 이토록 부실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

최연희 의원 판결을 비판한다.

Posted 2007. 6. 15. 18:56
< 최연희 사건의 결론 >

그것이 옳건 그르건 사건은 결론이 났다.....................................고 할수가 없잖은가!!!

서울고법은, 최연희 의원의 성추행(? 판결에 의하면 이거 성추행인가 여부가 참으로 거시기 하다) 사건에 대해 벌금 500만원의 선고유예 판결을 내렸다. 사실상 최연희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이로서 최연희는 계속 국회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고, 게다가 선고유예이기 때문에 사실상의 무죄판결이나 다름 없다.


나는 이번 재판이 '정치적'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돈도 잘 버시는 고등법원 고의영 판사께서 돈을 먹었다고도 생각하지 않는다. 내가 문제 삼고자 하는 것은 그 판결의 내용이다. 이것을 정치적으로 트집을 잡거나 반박하는 것은 자칫 사법부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질 수 있고, 사법부의 판결은 어디까지나 법적인 판단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우선 이 사건에서 최연희에게 어떤 죄가 있는지 보자.

 
형법

제298조 (강제추행)
폭행 또는 협박으로 사람에 대하여 추행을 한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5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제300조 (미수범) 전3조의 미수범은 처벌한다.

제306조 (고소) 제297조 내지 제300조와 제302조 내지 제305조의 죄는 고소가 있어야 공소를 제기할 수 있다.


형법상 강제추행에 대한 조문은 위의 3개 조문이다. 가운데 미수범의 처벌규정은 별개로 하자.

이 사건에서 쟁점이 된 것은 두 가지라고 할 수 있다.

1. 어느정도의 '폭행'이 있었느냐의 문제이다.
2. 친고죄에 있어서 고소의 정도와 내용 또는 고소의 취하에 관한 문제이다.


1. '폭행'의 존재, 강약 여부

재판부는 이번 사건에 대해서 "피고인이 당초부터 가해의사를 가졌다고 보기 어렵고 사건 내용도 신체를 손으로 움켜쥔 것으로 폭행이나 협박이 심한 정도가 아니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어느정도의 폭행이 있어야 강제추행이 인정될 것인가?
즉, 강제추행이 되려면 어느정도의 '심한' 폭행이 있어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우리나라 대법원은 이에 대해 엄청나게 많은 판례를 가지고 있다. 대법원판례를 보면,

"강제추행죄는 상대방에 대하여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여 항거를 곤란하게 한 뒤에 추행행위를 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폭행행위 자체가 추행행위라고 인정되는 경우도 포함되는 것이며, 이 경우에 있어서의 폭행은 반드시 상대방의 의사를 억압할 정도의 것임을 요하지 않고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는 유형력의 행사가 있는 이상 그 힘의 대소강약을 불문한다.(대판 2002. 4. 26. 선고 2001도2417 판결, 1992. 2. 28. 선고 91도3182 판결, 1994. 8. 23. 선고 94도630 판결 등)"

"상대방에 대하여 폭행 또는 협박을 가하여 추행행위를 하는 경우에 강제추행죄가 성립하려면 그 폭행 또는 협박이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일 것을 요하고, 그 폭행·협박이 피해자의 항거를 곤란하게 할 정도의 것이었는지 여부 역시 그 폭행·협박의 내용과 정도는 물론, 유형력을 행사하게 된 경위, 피해자와의 관계, 추행 당시와 그 후의 정황 등 모든 사정을 종합하여 판단하여야 한다"(대판 2007.1.25. 선고 2006도5979 판결)
일견 달라보이는 두 판례이지만, 사실 따져보면 그 실체적인 내용에서는 같다고 할 수 있다.
즉, 폭행이라고 한다면, 그 전후 사정과 피해자와의 관계 등 여러가지를 따져서 종합적으로 판단할 것이며, 이에 대해서 단순히 폭행에 있어서의 힘의 강약을 판단하는 것은 무의미하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것은 위의 2001도2417 판결의 내용인데, 이 내용중에 재미있는 부분을 보면 다음과 같다.

"피고인은 피고인의 처가 경영하는 식당의 지하실에서 종업원들인 피해자(35세의 유부녀이다.) 및 홍영숙과 노래를 부르며 놀던 중 홍영숙이 노래를 부르는 동안 피해자를 뒤에서 껴안고 부루스를 추면서 피해자의 유방을 만졌다는 것인바, 위 인정 사실과 더불어 기록상 인정되는 피고인과 피해자의 관계, 위 행위에 이르게 된 경위와 당시의 상황 등을 고려하여 보면, 피고인의 위 행위가 순간적인 행위에 불과하더라도 피해자의 의사에 반하여 행하여진 유형력의 행사에 해당하고 피해자의 성적 자유를 침해할 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입장에서도 추행행위라고 평가될 수 있는 것으로서, 앞서 설시한 법리에 따르면 폭행행위 자체가 추행행위라고 인정되어 강제추행죄가 성립될 수 있는 경우이며, 나아가 추행행위의 행태와 당시의 정황 등에 비추어 볼 때 피고인의 범의도 넉넉히 인정할 수 있다."

이거 뭐 그냥 음란 소설 같지만, 어쩌면 이렇게 똑같을 수가 있을까?

즉, 대법원의 판단은,

'순간적 행동이라면 이에 대한 항거가 가능하지만 그것 역시 폭행으로 볼 수 있다"는 점과,
'사장의 남편이라는 지위에 있기 때문에 항거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정황'
(식당 주인의 권력이 이럴진대, 국회의원이야....)
'이런 짓은 일반적으로 강제추행이라고 인정된다는 점'
'앞뒤 사정을 볼 때 이건 확실히 고의 행위라는 것'

이다. 결국, 이번 최연희 사건에서는 이러한 대법원의 기존 판례를 무시한 점이 없지 않은가 하는 의문이 있다. 최연희 사건에 대해 이미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러한 고의성과 폭행성을 인정할 수 없다거나 그 대소강약을 따지는 재판부의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2. 고소의 취하여부

이번 사건에서 의문점은, 왜 그 여지가는 고소를 취하하는 듯한 의사표시를 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피해자가 용서한다는 의사를 표시한 이상 친고죄의 처벌조건이 약화 혹은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라고 하는 것으로 보아, 피해자인 여기자는 왜 한 밑천 두둑히 벌 수 있는 기회를 이렇게 날려버렸....쿨럭.. 이건 아니고,

친고죄에서의 고소는 요식행위이다. 즉, 고소는 소추·처벌을 요구하는 적극적 의사표시이어야 하며, 단순한 범죄피해신고 또는 전말서의 제출 등은 고소가 아니다. 형사소송법에 의하면, 고소는 서면 또는 구술로써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에게 하여야 하고, 이를 접수한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조서를 작성하여야 한다.(제237조) 고소를 하는 자는 범죄사실을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에게 알린다는 명확한 인식과 함께 그 처벌을 구한다는 의사표시를 하여 고소하여야 한다.(조서의 작성은 일종의 형식상 그 증명의 보존에 불과하기 때문에 요건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고소의 취하는 어떠한가?

형사소송법 제239조는 고소의 취소에 대해서도 이를 준용한다고 하고 있다. 따라서 고소의 취하 역시 고소의 방식과 같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고소한 사건에 대하여 고소를 하지 아니한다는 의사를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고, 이러한 고소의 취하가 당해 피의자의 처벌을 불가능하게 하는 요건임을 인지하고 이를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에게 전달하여야 한다. 또한 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은 조서를 작성하여야 한다.

그런데, 용서는 없다. 용서는 고소 취하의 요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소는 당해 범죄의 처벌 요건인 고소를 취하한다는 의사표시만으로 족하며 피해자 또는 고소인이 피고소인을 용서한다는 의사표시 등을 할 필요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고소 취소에 대한 판단 역시 그 피해자 또는 고소인이 피고소인을 용서했는가의 여부로 판단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피해자가 용서한다는 의사표시가 있다는 이유로 친고죄의 공소요건인 고소 여부를 판단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또한, 고소라는 처벌조건이 약화 혹은 소멸되었다고 하는 표현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다.

한개의 범죄사실에 대하여 일부의 고소 또는 약화된 고소라는 것이 개념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사과를 100개 훔친 피의자에 대하여 사과 30개 절도로만 고소할 수 있을까? 생각건대 사과를 100개 훔치고 가게를 부숴 버렸다면, 절도죄와 재물손괴죄로 나뉘어 수개의 범죄에 대해서는 각각의 고소가 있을 수 있다고 보여지나, 동일한 1개의 범죄에 대하여 이를 분리하여 고소한다고 하게 될 경우, 30개의 절도죄가 인정된 뒤 나머지 70개 사과의 절도에 대해 다시 고소할 수 있게 함으로서 형법상 일사부재리의 원칙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라고 할 것이다. 이런 면에서 고소의 분리 또는 약화는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재판부는 "약화"라는 용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다.

만약 이와 같은 용서의 의사표시가 고소의 약화가 아닌 소멸이라고 본다면, 재판부는 '공소권 없음'의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러나 재판부는 '선고유예'의 판결을 내림으로서 이것이 명백하게 고소의 취소는 아니라고 해버리는 모순을 낳은 것이다.



즉,


이번 판결은, 친고죄에 있어서의 고소의 의미와 방식, 그리고 고소의 불가분성을 오해한 재판부의 오류라고 생각된다.

대법원에서 현명한 판결이 이루어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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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 움켜쥠'을 당하고 있는 최연희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