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이 "벌써" 보름만을 남겨둔 상태다.

벌써부터 각 포털사이트에서는 올해의 뉴스아 올해의 인물을 뽑아내기 바쁘고, 올해 국내 뉴스 최고의 인물인 이명박 대통령은 별로 명예롭지 못한 방향으로 강만수, 유인촌, 어청수, 공정택 등등의 그 분신들(?)과 함께 상위를 랭크하고 계시고, 노무현, 김연아, 최진실, 박태환, 장미란, 김장훈, 문근영 등등의 인물은 미묘한 차이르 보이면 말 그대로 명예로운 올해의 인물

2009년의 스타들

로 질주하고 계시다.

해외의 인물로는, 단연 미국대통령에 당선된 버락 오바마가 상위권에 랭크되어 있고, 떠나는 부시는 반대쪽의 상위권에서 운행중이시다. 100m육상에서 세계신기록을 수립한 우샤인 볼트, 수영의 神이라고 불린 펠프스 등등 스포츠 스타도 빠짐 없이 거론되고 있고, 자살한 히스 레저, 재기에 성공했는지 아닌지 점점더 궁금해지는 브리트니 스피어스도 올해의 인물로 거론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전체 4,285,619개의 블로그 중에서 61,645등이나 하는 (지난 번 보다 순위 하락 -_-;;) 나도 올해의 뉴스 등을 찾아볼까 했지만, 남이 하는 것을 똑같이 따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다른 것을 해 보기로 했다.

이름하여, "2008년 정치분석 및 2009년 정치 예상"

이런 스타를 원한다!!

사실, 정치라는 것이 여느 유기체 만큼이나 변화무쌍한 것인데다가, 내 주제에 정치적 현안 하나 이해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는 내가 이런 걸 하는게 좀 재미없는 일일 수 있으나, 2008년과 2009년은 이명박 정부의 출범 1년을 지나면서 이 정부와 다음 정권의 성격을 결정 지을 수 있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 전혀 무시할 수 만은 없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의식에서 살펴보는,


"재미로 보는 올해의 정치, 내년의 정치"(제목이 계속 바뀐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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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정치라는 단어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명사]나라를 다스리는 일. 국가의 권력을 획득하고 유지하며 행사하는 활동으로, 국민들이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상호 간의 이해를 조정하며, 사회 질서를 바로잡는 따위의 역할을 한다. (네이버 국어사전)
정치학에서는 정치를 이렇게 정의하고 있다.
정치(政治)에 대해 가장 널리 쓰이고 있는 학문적인 정의는 데이비드 이스턴(David Easton)이 내린 "가치의 권위적 배분(authoritative allocation of values)" 이다. 또는 정치를 국가의 활동에 초점을 맞추어 정의하는 경향도 있는 바, 대표적으로 막스 베버는 정치를 "국가의 운영 또는 이 운영에 영향을 미치는 활동"[1]라고 정의하고 있다. 80년대 이후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으로 정치를 국가의 영역 뿐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에 내재된 권력 관계로 정의하는 경향도 생겼다.[2] 이와 같이 정치는 "배분", "국가 혹은 정부의 활동", "권력 관계" 라는 세가지 측면에서 정의되고 있으며 어느 한 측면도 소흘히 여겨질 수는 없다. 가장 이해하기 쉬운 정치의 정의는 아마도 해롤드 라스웰(Harold Lasswell)이 말한 "누가 무엇을, 언제, 어떻게 갖느냐 (Who gets what, when and how)"라는 것일 것이다. 라스웰 또한 정치를 '배분'의 측면에서 정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키백과 : http://ko.wikipedia.org/wiki/%EC%A0%95%EC%B9%98
네이버에서 서비스 하고 있는 두산백과사전에서는 여러 견해를 소개하면서, "통치와 지배, 이에 대한 복종·협력·저항 등의 사회적 활동의 총칭"이라고 요약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견해들을 합쳐본다면,
정치란,
"국가 또는 사회적 공동운명체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권력의 배분을 통한 활동과 이에 반응하여 복종, 협력 또는 반대로 저항하는 모든 사회 구성원의 활동과 그러한 활동의 상호작용을 통한 권력의 끊임없는 재분배/배치 현상 및 이러한 활동과 현상에 영향을 주거나 주고자 하는 외부의 자극"
을 말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생각해 본다면,

우리가 촛불을 들었던 것도,
우리가 대통령을 욕했던 것도,
학생들이 일제고사를 거부했던 것도,
오바마가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것도,
우리가 인터넷에 악플을 달았던 그 모든 것이 정치적이거나, 정치적 행위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보름만에 얼마가 될지도 모르는 이 시리즈에서 살펴본다는 것은 좀 우매한 만용일지 모르니, 우리는 정치를 좀 더 한정적 개념으로 보자(그 한정의 범위는 말을 풀어나가며 자연스레 압축될 것이다)

이제 살펴본 것은, 좀 더 제한된 범위에서의 올해와 내년의 정치적 사건의 진행 추이에 대한 회고와 전망이 되시겠다.


강의석이 "또" 우리 시대의 금기에 돌을 던졌다. 아니, 이번에는 확실하게 온몸으로 날로(?) 던졌다.

어제 건군 제60주년 국군의날 기념 퍼레이드에서 강의석씨는 알몸으로(무려!!!) 전차의 앞을 막아서는 퍼포먼스를 보였고 이로 인해 순간 전차가 멈춰서는 헤프닝이 있었다.

이 사진을 보면서 천안문 광장의 그 오래전 영상이 떠오른 건 나 혼자일까?


당연히 강의석씨(예전에는 고등학생이었으니 군이라고 불렀지만, 이제 성인이니 씨라고 불러줘야 할텐데.. 어색하다;;)는 체포되었다.

누군가는 그를 돌아이라 부르고, 누군가는 미친놈이라 부르며, 누군가는 정신병자니, 이상주의자에 사기꾼 도는 영웅이나 신념에 찬 이 시대의 풍운아 등으로 불리운다. 물론 요즘에는 악플이 더 많지만. 나는 지난번 강의석씨가 고등학생일 당시 강의석씨가 벌인 특정종교 강요 반대 단식에서부터 그를 지지했었다. 아니 지지했다기 보다는 그의 행동을 높이 샀다.

강의석의 이번 퍼포먼스 내지 시위는 여러가지 평가와 견해가 많지만, 나는 여전히 강의석의 행동이 우리사회에 필요한 한명의 돈키호테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1. 군대와 전쟁

지난 번의 포스트에서 군가산점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헌법재판소의 판례를 소개한 적이 있다.(2007/07/03 - [Daily] - 군 가산점 문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 (헌재 판결의 모순)) 그 당시의 판례에서 소개하지 않은 부분에 이런 말이 있다.

1. 헌법 제39조 제1항에서 국방의 의무를 국민에게 부과하고 있는 이상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하는 것은 국민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이른바 신성한 의무를 다 하는 것일 뿐,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였다고 하여 이를 특별한 희생으로 보아 일일이 보상하여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헌법 제39조 제2항은 병역의무를 이행한 사람에게 보상조치를 취하거나 특혜를 부여할 의무를 국가에게 지우는 것이 아니라, 법문 그대로 병역의무의 이행을 이유로 불이익한 처우를 하는 것을 금지하고 있을 뿐인데,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 제8조 제1항 및 제3항, 동법시행령 제9조에 의한 가산점제도는 이러한 헌법 제39조 제2항의 범위를 넘어 제대군인에게 일종의 적극적 보상조치를 취하는 제도라고 할 것이므로 이를 헌법 제39조 제2항에 근거한 제도라고 할 수 없고, 제대군인은 헌법 제32조 제6항에 규정된 “국가유공자ㆍ상이군경 및 전몰군경의 유가족”에 해당하지 아니하므로 이 헌법조항도 가산점제도의 근거가 될 수 없으며, 달리 헌법상의 근거를 찾아볼 수 없다.

(1999. 12. 23. 98헌마363 전원재판부)
헌재 1999.12.23, 98헌마363, 판례집 제11권 2집 , 770.

(굵게 표시한 부분은 내가 한 것임)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의무임에 틀림없다. 나는 최소한 그렇게 생각한다. 국가는 국민으로 하여금 국가의 보호아래 최소한의 안전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요구할 권리가 있고, 그러기 위해서 외부의 침략으로부터 보호를 받아야 할 권리가 있다. 그러한 권리의 발현이 바로 군대를 유지하여 외부의 침략과 위험으로부터 국가는 국민을 보호한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분단국가의 현실에 있어서 군대를 유지하기 위한 국민의 국방의 의무는 신성한 천부적으로 부여된 개인들의 인권을 지키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이다.

군대와 전쟁. 어떤 것이 먼저일까?

하지만, 과연 그럴까.

전쟁이 없으면, 군대는 필요없다.
침략이 없다면, 전쟁도 없고, 전쟁이 없다면 군대도 필요없다.

전쟁이 있고 침략이 있으니 군대가 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 보자. 군대가 있어서 침략과 전쟁이 있는 것은 아닌가?

전 세계가 하나의 나라로 국가로 통합된다면 우리에게 과연 군대가 필요할까? 그 때는 과연 어떤 외부의 침략을 위해 군대를 유지해야 할까? 어떤 명분으로? 국가가, 우리를 대적할 국가나 외부세력이 있다면 모를까, 그것이 국가의 내부에서 질서를 혼란시키기 위한 세력이라면, 그것을 진압하기 위한 것은 경찰이지 군대는 아니다.
다른 말로 하면, 군대는 오직(물론 부수적인 다른 역할도 존재하지만) 전쟁의 수행을 위해 존재하는 집단이다.

하지만, 전쟁이 우선인가 아니면, 군대가 우선인가?
물론, 우리에게 있어서 군대를 없앤다는 사실은 북한을 비롯한 적대적이건 그렇지 않건 모든 외부의 세력이 우리를 침략하거나 우리에 대한 위협을 가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존재한 후에 이루어져야 하는, 어쩌면 결코 불가능한 상황의 도래를 전제로 한 것이기 때문에 강의석의 주장은 현실적 측면에서는 매우 이해하기 힘든 말도 안되는 행위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다른 말로 바꾸어 본다면, 군대는 우리의 평화를 지키기 위해서 존재하는 폭력을 수단으로하는 전쟁준비용 조직이라는 점은 매우 아이러니한 것도 사실이다. 
남들보다 오래 군대에 있었지만, 군대에 있으면서 듣게되는 군대에 관련한 명언들은 매우 역설적인 것이 많다.

- 군대에는 민주주의가 없다. - 맥아더 장군

- 군대는 1회용이다.

- 군대는 전쟁을 없애기 위해 전쟁을 준비하는 조직이다.

- 군대는 단 한번도 실전에 투입되어지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실전을 준비하여야 한다.


전쟁은 반드시 일어나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그 전쟁을 대비하기 위해 군대가 존재한다. 그 전쟁을 막기 위해.
군대가 반드시 필요한 것은, 그리고 그것을 이루는 국방의 의무가 신성한 이유는 바로 전쟁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전쟁을 방지하기 위해 군대가 반드시 필요하다는 아이러니 속에 군대라는 조직은 존재한다.

강의석이 (어쩌면) 질문하고 싶어하는 것은, 우리에게 던지고 싶은 말은 그런 것일지 모른다.

전쟁이 없어야 하기 때문에 군대라고 하는 제도가 존재하는 것인가?
아니면, 군대라 하는 모순적 제도가 여전히 존재하기 때문에 전쟁이 없어지지 않는 것인가?
이 질문에 자유롭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인가.


과연, 군대가 우선인가 아니면 전쟁이 우선인가.



2. 신성한 국방의 의무는 지켜지고 있는가


강의석이 이번 군대 사태에 대해 처음 포문을 연 것은 북경올림픽 메달리스트들에 대한 그 유명한 "태환아 너도 군대 가라"라는 글이었다. 이 글에 대해서는 당시 여러가지 말이 있었지만 대부분 강의석을 까는 글들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물론 아닌 글들도 많았다)

나는 헌법재판소의 위의 결정에 비추어 일응 타당한 결론이라고 생각된다.

국민의 신성한 의무인 국방의 의무로 부터 제외시켜버리는 것이 과연 국민에게 고마운 혜택이 될 수 있는가? 과연 진짜 국방의 의무가 신성하고 고귀한 임무이며 의무라고 한다면 국민의 사랑을 받는 그 금메달리스트들에게서는 그 신성한 자리에 올라서는 것을 왜 배제시키는가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에선 국방의 의무는 결코 신성한 의무가 못된다.
신성한 의무이어야 하지만, 그것이 못되고, 그냥 누구나 가야하지만 재수 좋은 놈은 신성해 질 수 없는, 오히려 많은 사람이 신성해지지 않기를 원하는 의무가 되어버렸다.

금메달은 훌륭하다. 하지만, 그것은 국방의 의무 만큼 "신성한 것"인가?


우리에게 있어서 군대란

신성하여야 하되 신성하지 못하고,

인정받아야 하되 인정받지 못하는 조직이다.



3. 근본의 문제로 돌아가 생각해 보자.

군대에 대한 문제에 있어서 이는 매우 금기로서의 성격이 강한 문제이다.

남자만 가야 하는가 아니면 여자도 가야 하는가
군대를 다녀온 사람에게 가산점을 줄것인가 말것인가
등등 여러 문제에 대해서 많은 논의가 필요함에도 극한의 대립으로 치닫거나 분분한 의견으로 논의조차 힘든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는 더 근본적이고 철학적 차원에서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과연 우리에게, 인류에게 평화가 오지 않는 이유는 군대의 존재 때문인가 아니면 그나마 군대가 존재하기 때문에 이만큼이라도 유지하며 살아갈 수있는가 하는 것.

우리 시대와 사회는 아직 거기까지의 담론을 정립하기에는 이른 것 같다. 그렇기 때문에 강의석의 행동은 매우 황당한 퍼포먼스로 비춰질 수 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전쟁을 완전히 사라지게 하기 위해 군대를 유지하고 사람을 살상할 수 있는 무기들을 계속 개발하여 그 길로 나아가 무력으로 지켜지는 평화를 얻을 것인가 아니면,
군대조차 없어지고 권력은 치안만을 유지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평화를 제 손으로 유지하도록 할 것인가.


이상주의적이기만 하고 현실적이지 못한 생각이라면 그 또한 사실이지만, 우리는 평화와 그것을 추구해 가는 우리의 노력에 대한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으로 우리의 삶을 채워야 할 필요도 있다.

나는 여전히 강의석의 행동을 지켜보겠다.
그리고 강의석이 말하는 소리에도 귀를 기울일 것이다.

비록 황당한 똘아이의 주장이라고 해도,

우리시대에 그가 필요한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