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모양처 신사임당?
Posted 2007. 10. 5. 17:48< 고액화폐 여성모델에 신사임당 선정 반발 >
한국은행의 고액권 화폐 모델 선정작업에서 여성계 인사로 신사임당이 유력해 지고 있다. 이에 여성계가 이에 반발, 그 선정에 반대하고 나섰다고 한다.
여성계가 반대하는 주요 이유는 바로 신사임당이 너무나 현모양처 였다는 사실 때문. 페미니스트 저널 ‘문화미래 이프’(www.onlineif.com)는 2일 성명서를 통해 “신사임당은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부계 혈통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현모양처로 지지되고 있다”며 “신사임당이 새 화폐 여성 초상인물로 선정되는 것에 반대하며 서명운동 등을 통해 이를 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연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일까?
그녀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더 유명하긴 하지만, 여류시인, 화가 등으로도 역시 유명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위인이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그녀의 행적이 과연 그러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과연 현모양처냐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가장 두드러진 유교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초로 가장 조선적인 여성을 신사임당으로 뽑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왜 신사임당은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현모양처였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다지 현모양처는 아닐듯 싶다.
율곡 이이는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에서 출생하여 자랐다. 노년에는 파주의 율곡리에서 생활했으며 사후에는 파주의 자운서원과 강릉의 송담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강원도는, 그리고 오죽헌은
율곡의 외가(外家)였다. 율곡은 웃기게도,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하지 않는다"는 조선시대에 외가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의 아버지인 이원수는 겉보리 서말도 없는 한량에 불과했던 것일까? 전혀.
이원수는 당시 감찰기관이던 사헌부의 감찰을 지낸 고위직 관리였다. 그런데 그가 왜 처가살이를 했던 것일까? 게다가 말년에 율곡이 살았던 파주에는 신사임당의 묘가 있다.
율곡이 살던 조선 중기 선조대에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흔희 "장가(匠家)를 든다"는 말도 이때 생겨난 것인데, 장가(匠家), 즉 장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조선시대 중기는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가 아니라, 남녀의 상하 지위가 혼재하던 시기였다. 남존여지 사상은 후에 조선 후기에 확립된 인습인 것이다. (시집을 간다는 말은 훨씬 후에 생겨났다)
즉, 신사임당은 그다지 현모양처는 아니었다. 게다가 신사임당의 업적은, 시화를 잘하고 뛰어난 문인이며 율곡에 대한 교육을 잘 했던 것이라는 점인데, 그것이 현모양처와 얼마나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게다가 기록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남편인 이원수가 여염집 아낙인 박씨부인과 통정한 것을 알고는(후에 박씨 부인이 신사임당 사후 정실부인이 되었다 한다) 이를 매우 질투해서 화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도 한다. 이른바 칠거지악인 투기를 일삼는 아녀자가 왜 현모양처로 둔갑한 것일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성의 지위가 격하되자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낮아진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이에 조선의 사대부는 여성이 존경하고 따라야 할 인물을 과거에서 찾아내 이를 강요함으로서 여성의 불만을 억제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 때 나타난 것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처가살이를 하는 당시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2~3년에 한번씩은 시댁을 방문해 주는 센스를 가진 그녀. 게다가 조선의 대석학인 이율곡의 모친인 신사임당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제로 현모양처인 신사임당이라면 그 많은 서화와 글들은 과연 언제 다 지었단 것인가? 그 시간에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아들키우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인데 말이다.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소박맞을 짓이 따로 있지, 이런 짓 못한다.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물론 그녀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조선 사대부의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지고 외곡된 부분도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록 신사임당이 현재는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다지 현모양처라 하기에는 조금 어렵지 않은가 한다.
진짜 현모양처들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성씨만 전해내려오는 데 비하여 당호까지 내려오는 여성을 어찌 현모양처라는 세속화된 단어로 때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한 가지 더 첨언 하자면, 그 외의 여성계인사로서 고액권의 모델이 될 여성이 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번 선정 작업에서 유관순 열사가 같이 들어갔다고는 하나,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이라는 단일 사건의 주도적 참여와 옥사라고 하는 짧은 생애와 업적 때문에라도 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조금 떨어진다 하겠다.
고액권 화폐의 여성 할당(?)을 위해 여성계 인사가 몯ㄹ이 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럴만한 인물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친일 행적이 드러난 김활란 여사도 그렇고, 신라의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도 그다지 이렇다할 것은 없다.
그렇다고 황진이를 넣을 수도 없고..... ...............어우동?
이미 만들어진 현모양처의 이미지 때문에 반대할 수는 있다고 본다. 여성계의 반발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조선 후기 남성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현모양처 필수론에 따른 심사임당의 화려한 이미지를 현대 사회에서 탈피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유관순과 신사임당을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한다면 어떠했을까?
한국은행의 고액권 화폐 모델 선정작업에서 여성계 인사로 신사임당이 유력해 지고 있다. 이에 여성계가 이에 반발, 그 선정에 반대하고 나섰다고 한다.
여성계가 반대하는 주요 이유는 바로 신사임당이 너무나 현모양처 였다는 사실 때문. 페미니스트 저널 ‘문화미래 이프’(www.onlineif.com)는 2일 성명서를 통해 “신사임당은 개인으로서의 여성이 아니라 부계 혈통을 성공적으로 계승한 현모양처로 지지되고 있다”며 “신사임당이 새 화폐 여성 초상인물로 선정되는 것에 반대하며 서명운동 등을 통해 이를 저지할 것”이라고 밝혔다.
과연
신사임당은 현모양처일까?
그녀는 율곡 이이의 어머니로서 더 유명하긴 하지만, 여류시인, 화가 등으로도 역시 유명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여성 위인이다. 내가 제기하고 싶은 그녀의 행적이 과연 그러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그녀가 과연 현모양처냐 하는 것이다.
조선시대는 가장 두드러진 유교사회로 알려져 있다. 이를 기초로 가장 조선적인 여성을 신사임당으로 뽑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긴 하다. 하지만, 왜 신사임당은 조선 최고의 여성으로 추앙받을 수 있었던 것일까?
그녀가 현모양처였기 때문에?
하지만 지금까지 밝혀진 바에 따르면 그다지 현모양처는 아닐듯 싶다.
율곡 이이는 강원도 강릉의 오죽헌에서 출생하여 자랐다. 노년에는 파주의 율곡리에서 생활했으며 사후에는 파주의 자운서원과 강릉의 송담서원 등에 배향되었다.
강원도는, 그리고 오죽헌은
율곡의 외가(外家)였다. 율곡은 웃기게도, "겉보리 서말만 있어도 처가살이 하지 않는다"는 조선시대에 외가에서 살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의 아버지인 이원수는 겉보리 서말도 없는 한량에 불과했던 것일까? 전혀.
이원수는 당시 감찰기관이던 사헌부의 감찰을 지낸 고위직 관리였다. 그런데 그가 왜 처가살이를 했던 것일까? 게다가 말년에 율곡이 살았던 파주에는 신사임당의 묘가 있다.
율곡이 살던 조선 중기 선조대에는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흔희 "장가(匠家)를 든다"는 말도 이때 생겨난 것인데, 장가(匠家), 즉 장인의 집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듯 조선시대 중기는 남존여비 사상이 지배하던 시기가 아니라, 남녀의 상하 지위가 혼재하던 시기였다. 남존여지 사상은 후에 조선 후기에 확립된 인습인 것이다. (시집을 간다는 말은 훨씬 후에 생겨났다)
즉, 신사임당은 그다지 현모양처는 아니었다. 게다가 신사임당의 업적은, 시화를 잘하고 뛰어난 문인이며 율곡에 대한 교육을 잘 했던 것이라는 점인데, 그것이 현모양처와 얼마나 관계가 있다는 것일까? 게다가 기록에 의하면, 신사임당은 남편인 이원수가 여염집 아낙인 박씨부인과 통정한 것을 알고는(후에 박씨 부인이 신사임당 사후 정실부인이 되었다 한다) 이를 매우 질투해서 화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었다고도 한다. 이른바 칠거지악인 투기를 일삼는 아녀자가 왜 현모양처로 둔갑한 것일까?
조선 후기에 이르러 여성의 지위가 격하되자 여성들은 과거에 비해 낮아진 자신들의 지위에 대한 불만이 많았다. 이에 조선의 사대부는 여성이 존경하고 따라야 할 인물을 과거에서 찾아내 이를 강요함으로서 여성의 불만을 억제하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할 필요를 느끼게 된다. 이 때 나타난 것이 바로 신사임당이다.
처가살이를 하는 당시의 전통에도 불구하고 2~3년에 한번씩은 시댁을 방문해 주는 센스를 가진 그녀. 게다가 조선의 대석학인 이율곡의 모친인 신사임당이 필요했던 것이다. 실제로 현모양처인 신사임당이라면 그 많은 서화와 글들은 과연 언제 다 지었단 것인가? 그 시간에 남편 뒷바라지 하고, 아들키우느라 정신이 없었을 것인데 말이다.
웬만한 강심장 아니면 소박맞을 짓이 따로 있지, 이런 짓 못한다.
신사임당의 이미지는 (물론 그녀가 훌륭한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지만,) 조선 사대부의 시대적 필요성에 따라 만들어지고 외곡된 부분도 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비록 신사임당이 현재는 현모양처의 표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이미 알려진 바에 따르면 그다지 현모양처라 하기에는 조금 어렵지 않은가 한다.
진짜 현모양처들은 이름도 알려지지 않고 성씨만 전해내려오는 데 비하여 당호까지 내려오는 여성을 어찌 현모양처라는 세속화된 단어로 때울 수 있겠는가 말이다.
한 가지 더 첨언 하자면, 그 외의 여성계인사로서 고액권의 모델이 될 여성이 누가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번 선정 작업에서 유관순 열사가 같이 들어갔다고는 하나, 유관순 열사는 3.1운동이라는 단일 사건의 주도적 참여와 옥사라고 하는 짧은 생애와 업적 때문에라도 전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부분은 조금 떨어진다 하겠다.
고액권 화폐의 여성 할당(?)을 위해 여성계 인사가 몯ㄹ이 되는 것은 환영할 만한 일이지만, 불행하게도 그럴만한 인물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고액권에 들어갈 황진이? *-_-*
친일 행적이 드러난 김활란 여사도 그렇고, 신라의 선덕여왕이나 진덕여왕도 그다지 이렇다할 것은 없다.
그렇다고 황진이를 넣을 수도 없고..... ...............어우동?
이미 만들어진 현모양처의 이미지 때문에 반대할 수는 있다고 본다. 여성계의 반발은 충분히 이해할만하다. 조선 후기 남성들의 필요에 따라 만들어진 현모양처 필수론에 따른 심사임당의 화려한 이미지를 현대 사회에서 탈피할 필요는 있다. 하지만, 그 이전에 유관순과 신사임당을 뛰어넘는 대안을 제시한다면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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