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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나 불쌍한 경찰이라는 제목이 어울리는 조선일보 기사의 사진


이명박의 지지율은 날로 더 떨어져가고 있고, 이명박정부는 드디어 촛불시위에 대한 강경 진압을 선언했다.
물론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지만, 이러한 일련의 사태가 보여주는 것은 드디어 이명박이 무엇을 두려워하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이명박이 두려워 하는 것,

그것은 "노무현" 처럼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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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노무현이 왜 그토록 국민들과 멀어지고 끝끝내는 욕먹은 걸로만쳐도 무병장수 할 수 있을 정도의 대통령이 되었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건, 그 내용이 어떠헸건 그것이 정당했는가의 여부를 떠나 노무현이 실패했던 것은 진보와 보수 양쪽에서 모두 지탄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진보에게는 이라크전, 아프가니스탄전의 참전과 FTA라고 하는 우파와 신자유주의 세력과 함께 같은 목소리를 내었다는 것이 진보로 취급되던 노무현에 대한 배신의 의미로서 욕먹어야 하는 대통령이었다면, 보수세력에게 있어서는 반미와 친북이라는 도저히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는 원수의 수괴로 낙인찍혔으니 사면초가에 아군은 하나도 없는 형국이었고 결국은 '노무현스럽다'라는 신조어에나 등장하는 실패한 대통령이 되어버렸다(이러한 평가에 대해서는 나는 약간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여기서 중요한 것이 아니니 그냥 넘어가기로 하자. )

이명박이 두려운 것은 지금 중고생들이 촛불 들고 나와 한소리 해대는 것이 아니다. 어짜피 그네들이야 입시가 가까와오고 기말고사가 가까와 온다면 하고 싶어도 못하는 것이 저 촛불시위고, 그렇지 않다고 해도 명박씨가 이런 철없는(?) 중삐리 고삐리들 때문에 가던 길 멈춰 불도저 시동 끄실 양반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촛불시위에 대해 대국민 담화까지 발표하다 못해 끝내는 물대포 쏘아가며 정공법이 아닌 신속한 진압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일까.

최근 조선일보 기사 중에 매우 흥미로운 기사가 하나 떴다.

< 취객에도 맞는 경찰 공권력 >

기사의 내용을 요약하자면, 취객 등 경찰 지구대에 끌려온 사람들의 행패에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도, 결국은 싫은 소리 한번 못하고 당하고 산다는 불쌍한 스토리다. 거기에 덧붙여 외부 전문가의 말을 아래 처럼 빌려 한 것은 이 사실이 얼마나 심각한 현상인지 알려주는 친절한 기사다.

경찰대학교 행정학과 표창원 교수는 "공권력 집행의 약화는 경찰의 문제가 아니라 국민들의 안녕과 평온의 문제"라며 "공권력이 권위를 잃으면 결국 피해는 법을 지키는 사회적 다수에게 돌아온다"고 말했다.


 얼핏 보면 그냥 경찰공무원의 힘겨운 업무와 그를 걱정하는 신문기사로 밖에 보이지 않지만, 이 기사가 한창 인터넷에 올라온 시간인 2008년 5월 24일 00시 27분에 일어났던 일들과 같이 본다면 이것이 그리 녹녹치 않은 조선일보의 이명박씨에 대한 훈수두기라고 생각된다.

한겨레 신문에 이미 살수차가 동원되어 거리로 진입한 촛불집회 참가자들에 대한 살수와 연행이 있었다는 기사가 떴고 오후 10시 20분에 드디어(?) 집회 참가자들이 거리로 진입했다는 소식이 추가되었고,  11시50분에는 살수가 있을 것이라는 경고가 있었다. 결국 새벽에는 폭력사태까지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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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

이러한 상황에서 조선일보는 왜 뜬금 없이 "불쌍한 경찰"이라는 주제로 기사를 갑작스럽게 가져왔을까? 최근에 경찰이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다는 사실들 때문에 경찰이 동정의 대상이 되었던가? 오히려 경찰의 기강해이가 문제되거나 전직경찰의 범죄 가 문제되고, 각종 성희롱, 성추행 사건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경찰의 태도가 문제되긴 했지만, 경찰의 고충에 대해 갑작스럽게 환기시켜 우리를 경찰을 보호하는 막중한 임무로 몰아넣을 필요는 없던 시기였다.(비록  경찰에겐 안 좋은 소식이지만, 경찰을 탓하려는 의도는 아니다)

생각건데, 이러한 갑작스런 조선일보의 기사는 급조되었다기 보다는 이미 작성되어 때를 기다렸다는 느낌이든다. 이미 오래전 부터 기획된 기사이며, 그저 때를 맞춰 기동취재반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우리 사회에 만연한(?) 경찰에 대한 폭력을 잠깐 취재했다는 느낌 뿐이다.

경찰에 대해 조선일보가 연민의 정을 느꼈다면 지나가던 개가 웃을 것이지만 이 기사는 오직 한명을 위한 기사인 듯 하다. 명박씨, 잘 보고 있는가?


조선일보가 말하고자 한 이야기는 그것이었는지 모른다.


명박아, 그것밖에 못하니?
좀 더 쎄게.




이명박이 가장 두려워 하는 것이 노무현 처럼 되는 것이라면, 노무현처럼 진보로부터도, 보수로부터도 똑같이 욕을 먹어 끝내는 고립무원의 신세가 되어 '명박스럽다'라는 단어가 또 한 가지의 뜻을 가지게 되는 그 순간이라면, 노무현 처럼 이렇게 조선일보가 등을 돌릴 수 있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다.

지금은 진보세력과 아이들의 건강을 걱정하는 불굴의 소시민들 나부랭이(?) 들이 나와 겨우 촛불 들고 있지만, 이러한 상황이 계속되고 조선일보 앞의 시위대가 끊임없이 이어지면, 조선일보는 강경하게 나올 수 있다는 소리다.

경찰, 뭐하니, 화끈하게 밟아버려!

그렇게 되지 못하는 순간, 어느샌가 낮에는 시청광장을 중심으로한 보수단체들이 나와 빨갱이들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우리 중, 고삐리들을 걱정하며 타도 이명박을 외칠 것이고, 밤이 되면 적색 빨갱이와 그 사주를 받은 시민들이 광화문에 모여 불을 지펴 그의 퇴진을 외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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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존나 말리고 싶은 정갑씨



우리에게 중도란 그리 많지 않다. 우리에게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이명박을 지지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의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니 중도에 서서 "글쎄..."라고 말해줄 이는 아무도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낮과 밤을 양분한 보수파와 진보를 가장한 유사진보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시간있을때 한번 더 이야기 해 보자)가 과정은 다르더라도 결국은 같은 목소리를 내게 된다면 이명박은 욕하면서 배우는 어린 자식 처럼 노무현의 뒤를 따라갈 수 밖에 없게 된다.

즉, 보수도 그를 물러나라 하고, 진보도 그를 떠나라 하는 상황이 되어버린다. 이명박이 진짜 두려워 하는 것은 바로 그것일 것이다. 이래도 병신 저래도 병신 소리듣는 것은 이골이 난 상태니 상관 없지만, 보수도, 진보도, 그리고 군부와 조선일보까지 등을 돌리게 되면 이명박 정부는 더이상 지지기반 없이 떠나야 하는 아쉬운 옛 연인이 되어버릴 수 밖에 없지 않은가?


전에도 잠시 얘기를 했지만 조선일보는 단순히 기사만 싣지 않는다. 그들은 고도의 편집권을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훌륭한 찌라시다. 그들이 뱉어내는 기사는 단순한 기사가 아니라 보수가 어떻게 우리의 입을, 머리를 귀를 마비시키는가를 보여주는 최상의 교과서다.

이명박은 토요일 한밤중에 한마디의 육중한 경고를 들은 것이다.

이명박이 움직여 저 빨갱이를 소탕하지 않는다면,

"국민들의 안녕과 평온의 문제"는 심각하게 위협받을 것이며,

그렇게 된다면 조갑제와 같은 평화와 진리의 사수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다.


진보와 보수는 결코 한 목소리를 내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명박이 두려워 하는 것은 그들이 끝내는 같은 결론에 도달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가 같이 결론을 내는 것은 단 하나,

이명박 퇴진 이다.


이명박에게 있어서 보수파는 어쩔 수 없이 기댈 수 있는 마지막 보루일 수 밖에 없다. 서정갑의 예비역 대령연합회나 재향군인회 등 군부에서 파생된 보수주의 단체는 군대 미필자인 이명박에 대한 의혹의 시선을 계속 거두지 않고 있는 실정에서 기독교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 아직 남긴 남았지만, 그들도 혼란하고 빨갱이의 마수에  죽어가며 도탄에 빠진 가련한 백성들이 시끄럽게 구는 것은 참을 수 없다. 엄정한 법집행을 시급하 시행하지 않는다면, 6.25때 어떤 고지의 전투처럼 낮과 밤이 바뀐채로 우리는 진보와 보수의 끊임없는 퇴진 소리를 들어줘야한다.


이명박은 아마 이번 시위에서 계속적으로 과격하지만 조용하게 진압을 시도할 것이다. 물론 수 많은 피해자가 발생할 것이고 어쩌면 한 두명의 치명적인 희생이 있을지 모른다. 물론 그에 상응하는 물타기 역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여기서 물러설 수 없다.그것은 양쪽으로 부터 비난을 받는 노무현과 같은 존재로 전락할 자신을 참을 수 있는 용기가 이명박에겐 없기 때문이다.


조중동의 막내로 전락해 버린 동아일보에 이런 기사가 나서 이슈가 되었다.

< 함부로 '삽질'하다 허리망친다 >

동아일보도 걱정이 되었나 보다.


이명박 무엇이 두려우랴!!!
덤벼라.


하지만, 이것은 알아두셔야 한다.

우리가 쪽수가 더 많다. 유남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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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끄럽다. 정말 광우병 때문에 시끄럽다. 언론과 정부는 아니라고 하고, 국민은 분노한다. 그리고 소리친다. 살고 싶다고. 정부는 여전히 안전함만 말하고, 언론은 여전히 배후만 캐고 있다. 국민은 이제 스스로 언론이 되어야 하고 투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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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하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소통이다.

최근 며칠간의 정국과 문화와 사회는 광우병 열병을 앓았다. 지금도 역시 광우병은 우리 사회 최고의 이슈다. 그런데, 그 사이에 우리가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들이 너무 많은 듯하다. 아니, 사실은 이 광우병 사태 때문에 너무나 많은 것들이 밝혀지고 있어 그 수많은 일들 사이에 우리가 이 정권하에서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나 많다는 점이 걱정이다.

광우병때문에 구멍이 송송 나 버린 뇌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것은 과거 군사독재 시절의 파렴치한 사찰과 감시와 통제와 공안정국 그리고 소외된 자들의 계속적인 소외와 죽어가는 자들의 날카로운 외침이다.


전에 쓴 글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이명박 정부는 이미 국민과의 소통에 실패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정권을 탄핵이니 하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종료시킬 수 있는 의지도, 능력도 없다. 자신들은 계속 군림하며 나아갈 것이 확실하다.

이명박정부가 노무현 정권과 다른 점이 분명 많이 존재하지만, 노와 이의 가장 극명한 차이는 "소통의 회복"방식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노무현은 대화가 단절되고 communication의 필요가 극에 달하면 정공법을 택했다. 검사와의 토론, FTA관련 토론. 등등 스스로 언론의 힘을 빌려 그들과 소소통하기 위해 직접 나섰다. 물론 그것이 모두 옳은 방법이었던 것은 아니었을지 모른다. 진시황이 스스로를 '짐(朕)'이라 칭하며 장막 뒤에서 신하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어느정도는 필요할지도 모른다. 나 역시 대통령이 모든 사안에서 국민과의 직접 소통을 위해 거리로 나오는 것은 반대이니, 노무현의 방식이 신선하고 직접적이며 정공법이라고 하지만 모두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아무튼, 노무현은 직접 대화를 시도함으로서 그의 할 말을 하고자 했고 그렇게 우리는 노통과 소통했다.


하지만, 이명박 정부는 어떤가? 이명박 정부의 소통방식은 수족을 부려 그들의 말에 강제로 끼어든다. 촛불문화제를 기획하는 학생을 직접 찾아가 강제로 듣고, 조사하고, 감시하고 검열한다. 문제는 이러한 검열과 감시가 강압적 고압적 상태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들은 일방적으로 소통하고자 한다. 위에서 소통하려고 한다. 노통이 그 위치가 위건, 아래건 소통의 상대방이 있던 곳 까지 내려와 소통하고자 하는 것에 반해 그들은 확실하게 위에 있고, 그곳에서 소통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 상대방을 자신의 위치까지 끌어올려 소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래에서 소리치라 한다. 들리지 않는 그곳까지 소리치게 한다. 이는 소리치지 않게 함과 같다. 그러다가 우연히 그 소리를 듣게 되면 이 소리침의 행위가 그 능력에ㅔ서 벗어난 행위임을 들어 그들을 외면한다. 즉, 아래에서 들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면 듣지 못하니 외면하고 듣게되더라도 그들의 목소리임을 인정치 않으니 결국은 듣지 않는 것. 그리고 그들은 경찰과 감시, 검열이라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소리치며 일방적 소통을 시도한다.

우리가 이제 겨우 10년간의 진보적(진보가 아닌 진보적인) 정권에서 이룩한,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쟁취한 그 수 많은 민주주의의 희망은 소통이다. 위와 아래가 자유롭게 소통하고, 소통하고자 하는 자는 소통하고, 왼쪽과 오른쪽이 소통하고, 위와 아래가 소통한다. 민주주의는 communication이다.
수 없이 많은 열사들이 피흘렸던 것은 소통이었다. 나의 뜻을, 나의 이상을 그들에게, 누구에게든 말하고 설득하며 소통함이 바로 우리가 얻어냈던 민주주의다.

하지만, 이명박 정권에서는 어떤가. 우리는 소통하고자 한다. 촛불로서, 시위로서, 문화제로서 그리고 인터넷으로, 덧글로, 블로그로, 통하고자 한다. 대화하고자 한다. 그러나 이명박은 이미 소통의 다른 방법, 다른 방식을 만들어내었다. 그것은 선전과 차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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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이랑 한판 벌인 경찰서



그들은 일방적으로 소리치고, 일방적으로 말하지만, 우리의 입은 차단하고 우리의 소리에는 그들의 귀를 차단한다. 이명박 탄핵의 소리는 들었지만 우리가 하고자 하는 말을 듣는 것이 아니라 그 행위만을 본다. 보긴 보았으되, 듣지는 않는다. 미친소 물러가라는 소리는 듣지않고, 그들의 소리치는 목소리를 대중에게 선전해 줄 자들의 목구멍에 기름을 빼 주기 위해 바베큐 파티를 연다. 목소리를 내는 자들의 목소리는 애써 그들의 목소리가 아니라고 하고, 심지어는 국민과의 소통은 포기한채 소와의 소통을 시도하기 까지 한다. 모든 소통을 거부하며 일방적 소통, 아니 호통만을 원한다.


노무현은 한나라당의 집권으로 우리 민주주의의 후퇴를 암시하는 말을 했었다. 그것이 어떤 뜻이었는지 우리는 이제 알 수 있다. 우리는 소통의 상대방이라는 지위를 빼앗겨 이제 선전과 광고 그리고 계몽과 계도의 대상으로 객체로 전락해 이 사회의, 그리고 이 나라의 주인의 자리에서 밀려났다. 한국은 여전히 헌법에 의해 모든 주권은 국민으로부터 나오고 이 나라의 주인은 국민일지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나는 그 국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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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심각한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예전처럼 내가 국민이기 때문에 주권을 가지는 것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주권을 가지는지 여부에 따라 국민인가 여부에 대한 고민이 이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에게 소통이 없다면 우리는 민주주의를 잃은 것이고, 그러한 소통의 부재로 우리가 주권이 상실되었다 하는 그 순간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으로서의 자격을 의심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빠져들게 된다.

이명박정부는 우리와의 소통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이 원하는 소통의 방식은 정확한 의미의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소통이 아니다. 그것은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는 소통, communication이 아니다. 그것은 일방적 외침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러한 소통이 없다. 이명박 정권의 속에서는 말이다.


우리가 뽑은 대통령 그리고 그가 구성한 내각과 한나라당이라고 하는 총선에서 승리한 여당을 믿고 맡기자는 주장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민주주의와 그 가치를 수호할 때만 유효한 것이다. 우리는 그들에게 민주주의를 지킬 권력을 주었지만, 그것을 훼손할 권력을 쥐어준 것은 아니다. 우리가 한나라당을 찍었건, 이명박을 찍었건, 그것은 ㅜㅇ요하지 않다. 지금 우리나라의 대통령과 여당을 이명박과 한나라당이라는 사실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들에게 요구하는 것이 대화와 소통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소통이 없는 한국을 만들라고 그들에게 권력을 준 것이 아니라 비록 그것이 부동산값이나 올리라는 소리라도, 그것이 우리의 국민으로서, 시민으로서의 지위가 아닌 소비자로서, 투자자로서의 지위를 요구하는 것이라 해도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그것을 위한 소통이다.


소통이 없는 정부는 우리에게 주권이 있음을 확인시켜주지 못하고 그렇다면 우리는 이 나라의 국민인지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그 의심이 확신이 되는 순간, 그 순간 이후의 문제는 이명박 정부의 책임이다. 국민은 더이상 자신의 정부가 아닌 이명박 정부에 대해 책임지려 하지 않을 것이다.


이명박이 국민소통능력이 떨어진다면 떠나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사실 많이 기대는 안하지만, 이본에는 제발 자신의 말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싶다.



< 이 자리에 있던 소울 드레서의 광고는 소울드레서 관계자님의 부탁으로 잠시 내렸습니다.>
< 소울 드레서 광고가 정식으로 개제 되면 다시 올리겠습니다. >
<불편을 드려 죄송합니다.>

광우병엔 걸리지 않을 것이다.

Posted 2008. 5. 6. 1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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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산 소고기가 수입될 것이라고 한다.
광우병위험물질도 함께 수입될 것이라고 한다.
값싼 쇠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한다.
한국사람은 광우병에 걸릴 위험이 더 크다고 한다.
미국의 교포들도 꾸준히 먹고 있는 미국소라고 한다.


나는 과연 광우병에 걸리게 될까

아마도, 나는 광우병엔 걸리지 않을 것이다. 물론 확률로만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미국에 사는 우리 친척들도 아무도 광우병에 걸리지 않았다. 운이 좋은 건지, 아니면, 미국산 소고기는 처음부터 별로 문제가 없는 것이었든지.

미친 소가 들어온다는 문제에 대해 경제적 관점과 국민보건의 관점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번 한미FTA에 있어서 중요한 선결문제중의 하나인,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문제(사실 광우병에 걸린게 확실한 소를 팔겠다고 하기전 까지는 광우병 쇠고기 수입문제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에 있어서, 나는 찬성이다 반대다 하는 이렇다할 의견을 내지 못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노무현의 고민처럼, FTA를 안하고 그 많은 개방압력을 우리가 견딜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일본만큼의 자급적 경제력 또는 미국외적(美國外的) 경제력이 충분한 상황이라면 모를까, 그렇지 않고 대외의존도의 상당부분이 미국으로 집중된 상황에서 한미FTA를 어디까지 거부하고 어디부터 막아내며 방어할 것인가의 문제는 좀처럼 답을 내기 어려운 문제다. 일본은 거부했다지만, 어떤 나라도 거부했다지만, 우리와는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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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더 본질적인 고민은 이 한미 FTA를 해야 할 것인가 하지 말아야 할 것인가가 아닌, 어디부터 어떻게 그들의 요구와 우리의 희망을 조정하고 협의하여 양쪽이 다 만족할 수 있는 협상의 결과를 양측 국민들에게 제시할 것인가 하는 고민이다. 이것이 오히려 중심이 되어야 할 것인데, 우리가 이런 부분에 있어서 좀 더 비효율적인 논의를 계속한다는 점은 인정해야 할 것이다(이런 부분에서, 나는 온전한 진보주의자가 아닌, 어느정도는 온건 중도의 진보계열이라 할만하다. FTA가 나와야 하는 현상황이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점을 지적하는 입장이니, 원칙적으로 진보주의자라고 생각하지만, 현 시점 이전의 잘못에 대한 비판과 질타를 달갑게 여기지 않는 현실에선 현재의 FTA의 방향성에 대한 문제제기는 묻히게 마련이니 어쩌면 나도 진보가 아닌 보수로 분류될지 모른다).


FTA문제는 접어두고, 이번 미국산 쇠고기의 수입관련 문제에 대해서만 살펴본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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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미국산 쇠고기를 항구적 또는 광우병에 관한 모든 위험이 사라진 후에 수입한다라는 가장 극단적 폐쇄성에 입각한 주장은 옳지 못하다고 본다. 광우병의 위험은 도사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항구적인 광우병 위험의 제거는 아직 거의 불가능한 것으로 보이며, 그러한 위험을 제거한 후의 수입은 결국 영구적인 수입불가라는 문제에 봉착한다. 이러한 점은 국가간 수입과 수출에 있어서 특정국가에 대한(구체적으로는 청정지역인 호주와 뉴질랜드) 특혜가 될 수 있다. 일한 점은 우리나라가 아니라 다른 어떤 나라라고 하더라도 옳치는 못한 것이 된다고 본다. 조건없는 평등한 대우는 안될지 몰라도 동등한 조건하에서는 동등한 대우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즉, 이번 수입 조치는 어느 수준에서는 일견 절대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 아니라 일응 용납할 수 있는 수입재게조치임은 부인할 수 없다는 점에서는 우리가 과잉한 대응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결론은, "언젠가 미국산 쇠고기는 수입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도 이번 수입조치가 부당할 수 있는 점은 앞서 밝힌 바와 같이, "동등한 조건에서의 동등한 대우"가 되질 않는다는 점이다. 가격의 비평등성은 당연한 것이나 수입과 통관의 평등성을 관리의 허술함이나 검역의 철저함과는 무관하게 뉴질랜드나 호주산의 쇠고기아 달리 취급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쪽의 물건보다 더 허술해 질 수 밖에 없는 문제를 야기한다는 점에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의 문제는 광우병 파동이라고 불리울 수 밖에 없는 문제가 된다.

즉, 호주나 뉴질랜드와 같이, 광우병에 대한 철저한 통제가 이루어지고, 그 수출과 통관에 있어서 미국이나 유럽의 그것에 비하여 훨씬 강화딘 절차를 거쳐 우리 손에 들어오는 것에 대해 실시되는 우리의 통관과 그에 따른 절차가, 훨씬 더 허술하고 위험이 많다고 인정되는 미국산에 대한 통관 및 절차가 동일하다면, 결국은 미국에 대해 지나친 특혜를 제공하는 것과 같은 결과를 가져온다는 문제다. 결국, 미국에 대한 특혜이거나 호주와 뉴질랜드에 대한 차별이라는 문제를 가져온다.


두번째로 이러한 양국의 무역 나아가 세계무역질서의 평등한 대우의 문제를 접어두고 국민보건적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논의를 보자.

국민보건에 있어서 외국의 음식의 수입을 허가하고 그 통관을 주관하는 정부당국은 당해 물건의 수입에 따른 경제적 상황변화에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것이 음식물 또는 의약품 등 국민의 건강에 주요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이라면(비록 그것이 이번 광우병소수입사태에서 보는 것과 같이 일부 정신나간 언론의 "괴담"이라고 이름한 집단적 불안감의 상승이라고 하더라도) 국민이 믿을 수 있는 정도 수준의 철저한 검역과 안전성의 확보 내지는 보증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 또는 그러한 것과는 무관하게, 또는 그러한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실한 협상으로 인한 부실한 대응방안만을 마련하고 있다면 이는 비난받아야 마땅하다.

즉, 미국산 쇠고기의 실제 위험성이 문제가 아니라, 작은 위험성이라고 하더라도 이에 대한 철저한 검역이 있다는 사실에 대해 국민이 신뢰할 수 있는 정부의 태도를 가진다면 문제될 것은 없다고 보는 것이다. 문제가 되는 소가 수입되는 경우에는 이를 수입금지시키고,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1차적인 검역에 대하여 그 방법과 안전성의 보증에 대한 충분한 감시장치가 마련디어 있고, 미국의 검역당국과 상호 평등한 관계에서 우리 국민의 불안감 해소를 위한 충분한 노력이 필요함을 주지시키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로만 안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안전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어떠한 노력을 하고 있으며, 그러한 노력이 어떠한 성과를 불러오고 있는지, 그리고 나아가 이러한 노력으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심하여야 할 문제는 어떤 것이 있는지 솔직하게 공개하고 이를 공동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들이 좋아한다는 T-본 스테이크를 먹을 것이 아니라, 머릿고기로 12시간 동안 푹 삶은 사골국물을 함께 원샷해도 좋다는 결론앞에 자유로울 수 있는 용사가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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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소의 수입은 어쩌면 시대의 대세일지도 모른다. 우리 역시 값싼 소고기를 먹을 수 있다는 점은 있다. 하지만, 이명박과 그 똘마니들은 값싸고 질좋은 이라고 강조해서는 안된다.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먹을 수 밖에 없는 자들이 존재하는데, 그들에게 이게 싫으면 먹지말면 될 것 아닌가는 반응은 실로 충격적이다.

버스가 싫으면 택시를 타라고 1,500원을 가진 사람에게 소리지른다면 그 사람은 정말 나쁜 사람이거나 광우병에 걸린 놈이다.  택시의 기본요금은 1,900원인데, 어떻게 타라는 것인가.

시장원리도 좋고 자본주의도 좋다. 그러나 애덤 스미스가 보이지 않는 손의 기능을 간과한 것은, 그 손은 우리에세 충분히 소비할 돈을 쥐어주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나도 맛있고 건강에 좋은 한우를 먹고 싶다. 그러나 나는 지금 호주산 밖에 못먹는다. 더 싼 미국산이 들어온다면 먹을 것이다. 왜냐면 나는 여전히 1억짜리 소도, 한우도 먹을 수 없을 만큼, 현재처럼, 평범한 서민일테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확률상, 나는 광우병에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그렇게 생각하고 싶다. 나는 광우병에 걸리진 않겠지만, 선택할 수 없어서 광우병에 걸린 소일지도 모르는 위험한 소를 먹는 것은 참을 수 없다. 그리고 그런 것도 모르는 초보자들에게 우리 보건과 국가의 미래까지 맡길 생각은 더더욱 없다.

나는 광우병에 걸리지 않겠지만,

2MB와 그 똘마니들은 이미 광우병에 걸려버렸다.

우리가 광우병을 이기는 방법, 그것은 저들은 타도하는 것이다.


나는 오늘 아침에도 지하철을 타고 왔다.
사람많고 서서 와야 하는 지하철이 싫지만, 나는 차도 없고, 차를 사려니 유지비가 많이 들어 내 경제 상황에서는 좀 어려울지 모르기 때문이다. 택시를 타자니 돈이 아까워서다.

그런데, 나보고 지하철이 싫으면 택시를 타라고 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다.


먹기 싫으면 먹지마라는 18세기 자본주의에 의지하는 저들이 나와 내 국민에게 모욕을 준다면, 나 역시 그들에게 모욕을 줄 수 밖에 없다.


2mb, 넌 미쳤어. 나도 너 안 찍었"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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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李相, 본명 김해경, 1910~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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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문학사상 가장 난해한 시인이자 소설가. 그리고 한국 문학사상 가장 뛰어난 선구자. 한국 문학의 최대으 천재와 최대의 악마라는 찬사와 극단의 악평을 함께 받앗던, 그러나 한국 시문학에 있어서 가장 위대한 금자탑을 세웠던 한 사람.

이명박 정부에서 이상이 생각난다면 오버인가.
이상은 조선중앙일보에 1934년 오감도를 연재하다가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독자들의 항의(?)를 받고 연재를 중단한다. 아무튼 그런 우여곡절 끝에 탄생한 시 오감도. 왜 우리는 이명박 정부에서 벌써 70년 전에 요절해 버린 천재 시인을 생각하는가.


이상 - 오감도

13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이상의 시는, 초현실주의 또는 다다이즘의 일류로 분류된다. 이 오감도라는 시는, 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조감도(鳥瞰圖)의 변형인 오감도(烏瞰圖; 하늘에서 까마귀가 내려다본 그림)라는 제목을 가지고 있다.

질주하는 13인의 아해(어린이, 사람) 그들은 모두 불안을 느끼는 존재이며 또는 동시에 불안감을 조성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결국은 골목이 막다른 골목리ㅏ도, 결국 뚫린 골목이라도, 상관이 없다. 어찌하건 불안을 벗어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불안감에 떨며 질주할 필요조차 없다.

언제 어디서건, 결국은 불안에 떨며 살아가는 사람들. 자신이 사람들에게 불간감을 주는 그 존재라는 것을 인식도 못하며 막연한 불안감에 살아가야 하는 사람들. 그것이 이상에게 비친 당시의 현대인이라 해석하면 될까? 13인의 아해는 그저 질주한다. 그것이 불안이며 그것이 그들의 삶이다. 맹목적이다. 왜 그 불안감이 오는지는 이미 지나간 문제다.

"그 불안한 모습을 바라보는 까마귀 이상은 아마도 더욱 불안해하며 암울한 식민지 시대를 가슴 졸이며 살았을 것이다. 현대인의 소외와 불안, 고독을 막다른 골목으로 삼아 절망적이고 암담한 현실 상황을 보여 주고 있으며, 뚫린 골목으로 나타난 희미한 희망의 불꽃이라도 잡아 보려고 하는 현실의 위기 의식을 도식적으로 구도화한 이 시는, 진정한 의미에서 참다운 인간 관계를 열망하는 시인의 마음을 역설적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라고 설명한 어떤 평론가의 말이, 암울한 일제시대를 살았던 한 시인이 아니라 나의 이야기라고 느끼게 된 것이 우리에게 주는 이명박 정부의 모습이라고 한다면 지나친 비약인가.


이명박이 만든 한국, 우리는 그 안에서 경쟁이라는 불안과 경제라고 하는 절명상태의 또 다른 불안을 위해 질주한다. 그것이 막다른 골목인지, 아니면 뚫린 골목인지 모르는 그곳을 우리는 질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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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우병에 걸렸을지 모르는 소고기일 수도 있다는 불안감에,

대운하로 환경이 철저히 파괴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영어를 못하는 내 아이는 왕따가 될 것이라는 소외감에,

취업하지 못한 나는 88만원 세대가 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뉴타운 정책이 없는 우리 집값은 오르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뉴타운 정책이 있는 우리동네의 세입자인 나는 언제 오른 전세값을 따라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돈받고 국회의원직을 팔고사는 관행이 사실일까 하는 불안감에,

돈없으면 병원도 못가고 죽어야 한다는 불안감에,

100만원이 넘는 수학여행을 못간 아들이 소외될 것이라는 불안감에,

무심코 줘버린 개인정보가 어딘가에서 팔리고 있을 거란 불안감에,

1,000만원이 넘는 등록금이 없어 대학을 못간 딸의 미래에 대한 불안감에,

더 이상 일본의 만행을 규탄할 사람이 없는 역사에 대한 불안감에,

독도를 일본에 줘야 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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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질주한다.

이 사회에서 이상의 모습을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을 우리는 어떻게, 그리고, 왜 극복해 내야 하는가.




이명박 정부가 만든

다시쓰는 오감도

우감도(牛瞰圖)

13의미국소가한국으로수출되오
(수입은이명박의정책에따른수입이적당하오)

제1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2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3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4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5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6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7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8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9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10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11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12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제13의미국소가광우병이라고그리오
13마리의미국소는광우병에걸린소와광우병에안걸린소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검역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마리의소가광우병에걸린소라도좋소
그중에2마리의소가광우병에걸린소라도좋소
그중에2마리의소가광우병에안걸린소라도좋소
그중에1마리의소가광우병에안걸린소라도좋소

(수입된소가원산지를속여서들어온것이라도적당하오)
13마리의미국산소가한국으로수입되지아니하여도좋소




  1. 11


 



 



보다가

뿜었다

내각 전체를 메모리에 담아다니는 모습은,

생각만 해도

황홀하도다


< 정신병자는 진중권이다 - 하민혁님의 블로그>

얼마전, 때아닌 정신병자論이 블로그계에 살짝 불었다.

대충 아는 사람은 아는 것 처럼, 이 정신병자 논쟁은 이명박 정부에 대한 진중권의 정신병 진단에 대한 한 블로거의 글을 계기로 널리 퍼지게 된 듯하다. 나도 지나가다 한줄 덧글을 달아놓긴 했는데, 이제는 충분히 무르익거나 사람들에게 잊혀진 헤프닝으로 남을 듯하여 이제 나도 답을 좀 달아볼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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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바쁜 시간대였고 해서 이리저리 자세한 리플을 기대하지도 않았고, 나 역시 자세한 내용의 리플이나 트랙백을 걸지 않았다맘, 뭔가 이건.

뭐하자는 건가.


진중권의 정신병자론의 내용을 제대로 보고 한 것인지 의문이 가는 이 글을 보자니 진중권이라면 살짝 "꼭지가 돌아"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진중권의 발언내용을 한번 보자.



한개 더 있다.



진중권의 논리는 별로 어렵지 않다.


A=A다. 이것을 A≠A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정신병자다.
이런 사람들이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큰일 날 일이다.
보수 정권이 보수적 정책을 펴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정책이 보편적인 인간의 상식에서 벗어나 A≠A논리를 근거로 한다면 이는 비판받아야 하며 수정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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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가지 없는 중권씨



대략 이 정도면, 초등학교 고학년 및 중학생 이상의 인식체계를 갖추고 있으면 영어몰입교육을 특별히 받지 않더라도 이해할 수 있다.

그런데, 웃긴 것은, 누군가는 이렇게 말하는 진중권이 정신병자라고 한다. 이유는 또 너무 단순하다. 진중권은 싸가지가 없는 놈이니까.

다시 한 번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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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이 분명히 이명박과 그 똘마니들을 맘에 안들어 한다는 것은 맞지만, 그것이 진중권이 그네들을 정신병자라고 하는 논리인가? 진중권은 인터뷰에서 분명하게도, 불행하게도, 보수정권이 보수정책 펴는 것을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인다(그러니까 이 인간은 자기는 박정희 전두환 정권때도 살아남았다고 좋아한다 -_-)

맘에 안 드는 것과 논리적으로 말이 안되는 소리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나 역시 한나라당의 남경필 의원이 조낸 맘에 안드는데, 아주 맘에 안드는데, 말하는 것 보면 나름 논리가 정연한 인간이라 그냥 그렇게 산다. 남경필은 정신병자는 아니다. 싫은 놈이라 문제지.

하민혁씨는 순진하게도, 이 대목에서 그냥 툭; 하고 놔 버렸다.

"단지 맘에 안들어서 타인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글에는 논리가 필요없다. 그래서 이 글에는 논리가 없다."

논리적 의사표시가 가능한 인류의 대부분은 이 부분에 대한 행간의 의미를 단순 논리로 파악하게될 경우 이렇게 해석한다.
"단지 맘에 안들어서 타인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글에는 논리가 필요없다. 그래서 이 글에는 논리가 없다."

--> 내가 '단지 맘에 안들어서 정신병자로 만들고 싶은 사람'은 바로 진중권이다.

본인도 인정하는 바 처럼 논리 없는 글을 쓴 이유는 그냥 진중권이 맘에 안들기 때문이라면 내가 굳이 더 할말은 없다.
(내가 단지 하민혁씨가 맘에 안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좀 별개의 문제이고, 나는 단지 맘에 안든다는 이유로 논리 없이 사람을 정신병자로 만드는 행위는 안하는 사람이다)

진중권이 정신병자여야 하는 이유는 알았으니, 진중권의 발언이 재미있는 이유를 또 보자. 어쩌면 진중권이 왜 하민혁씨는 싫은지 보여주는 대목이겠지.

1. 정신병원에서 입원 치료를 받아야 할 정신병자를 뽑은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들도 정신병자들이어서인가? 아니면 정신병자가 벌인 한바탕의 사기극에 놀아난 닭대가리들이어서인가?
-------중략-------
2. 한나라당이 삽질을 하고 이명박 정부가 닭대가리 같은 짓을 하고 있다.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명박을 증오하는 사람이나, 정권의 대척점에 있는 야당의 자세는 어떠 해야 할까?

1번 문제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없으시다고는 하지만, 뭐, 진중권이 아닌 나에게 이렇게 한 소리 듣는게 싫으실지도 모르겠지만, 내가 볼 때는 답은 간단하다.

국민들이, 아니 명박이를 찍은 사람들이 명박이의 허상에 속았다. 정신병자들이 벌인 한 바탕 사기극에 놀아난 닭대가리들이 아니라, 명박이와 그 일당이라는 일군의 동일한 정신병을 앓고 있는 자들의 한 바탕 사기극에 속아버린 가련한 백성들이다. 사기꾼에 속은 사람들이라고 해서 무조건 닭대가리는 아닐 것이니 말이다.

그들을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 문제에 대하여 진중권 같은 논객들이 해야 할 일은 명백하다.

집권한 정신병자들의 불합리하고 부당한 논리를 명백하게 파헤쳐 사람들에게 알려 그들을 깨닫게 함으로서 다시는 이러한 정신병자들에게 속아서 정권을 맡기는 과오를 범하지 않도록 선도하는 것.
이 정도면 아주 깔끔한 정리라고 나 스스로 자부한다. 꽤 논리도 있는 것 같다. -_-


2번 문제로 가서 보자. 이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으신 듯한데, 삽질과 닭대가리 짓을 하고 있는 정권(그렇다고 치는게 아니라 그렇다)에 대해
   가. 이명박을 싫어하는 사람
   나. 야당
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

친절한 방식이라고 생각되진 않으나, 뭔가 좀 이상한 논리로 치닫고 있는 듯해서 그 이후의 글을 인용해 본다.
닭대가리 같은 짓으로 계속 삽질을 하면 그 꼴보기 싫은 정권이 다시 이어질 일을 없을 터다. 왜냐면, 국민이 아무리 멍청하기로 그런 닭대가리 짓을 하는 정신병자들에게 두번이나 내리 정권을 맡기지는 않을테니까.

반면에 닭대가리 짓 하지 말라고 적절히 지적하고 잘 하라 추임새를 넣으면, 그래서 정말 제대로 잘 한다면 그 권력을 다시 찾아오기란 불가능한 일일 터다. 잘 하고 있는 정부를 뒤집어엎자고 할 국민 또한 없을테니까.

나 이거참, 여기서 부턴 할 말이 없다. 여기서 논리가 좀 이상야릇한 게,

"야당이 5년후 정권을 되찾으려면, 이명박 정부의 닭대가리짓을 더 많이 하라고 부추겨야 한다"는 논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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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거 없댄다.

이 부분에서 조금 진전된 논리로 정리하자면, 지금 이 시점에서 모든 명박이가싫어요 세력과 저는 한나라당이아니예요 세력은 나라가 망쪼가 들고 대운하로 나라가 두쪽 나도 닥치고 명박이 만세를 불러제껴야 할 상황이다.
결국, 이 나라는 세 부류의 사람으로 분류할 수 있게 된다.

   1. 이명박을 지지해서 이명박 만세이거나 이명박을 지지하지 않으니까 만세인 사람. 즉, 이명박만세파
   2. 이명박이 무슨 짓을 해도 관심이 없는 정치안드로메다파
   3. 이명박과 그 일당을 욕하는 정신병자들

야당도, 여당도, 언론도, 시민단체도, 너도, 나도 이명박이 잘하고있건, 잘 못하고 있건, 명박이 만세다.

뭐냐 이게. 나라가 망해야 모든게 잘 풀린다는 이 논리는 ㅇ디서 나온거냐. 내가 정리했지만 내가 이해를 못하겠으니, 이걸 우찌하오리까다. 정말.


내, 비록, 적을 사랑하라는 사해동포주의로 무장한 성자는 아닐지라도, 나도 할 말은 좀 해야 겠다.

우리나라가 잘 되었으면 좋겠다. 우리나라가 좋은 나라가 되었으면 좋겠다.

좀더 형이상학적인 말로 해 보자면,

정권의 정책에관한 의사결정과 그 시행에 결정적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일군의 무리들이 비논리적인 논거와 비합리적인 수단 드을 동원하여 국가의 미래전략과 그에 상응하는 현재의 정책을 무분별하게 양산하여 이를 강제적 또는 전략적으로 시행하는 작금의 사태에 대해 전문가/비전문가의 시각을 떠나 일반적 논리로서 이를 비판함은 진중권을 비롯한, 아니 진중권 뿐만이 아닌 정상적인 인격적 성숙단계를 거친 모든 국민의 소박한 애국적 관점에서 볼 때 반드시 비판받아야 하며 국민의 정상적인 판단에 읳 평가받아야 할 것이며 진중권과 같은 논객들의 해야할 바는, 이러한 국민의 노력을 위한 필요한 정보와 논거를 제공해 주는 데 있다. 그것이 야당, 혹은 여당, 혹은 정신병자라고 하더라도 말이다.

이 쯤 되면

누가 정신병자인가에 대한 적절한 논쟁은 화려하게 결론 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진중권이 정신병자라면,

나 역시 자랑스럽게 정신병자의 길을 걷겠노라.



덧;

나도 이 쯤 되면 하민혁씨가 싫어하는 사람이 된 듯하다.
그렇다면 나는 정신병자가 될 충분한 조건을 갖추었다는 뜻이 된다.

이 정도 논리면 충분하다.



아래의 이미지는, 지난 2004년에 어떤 신문에 실린 이미지 이다.

당시, 2004년에는 지금의 대통령인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재선되었고,

미국의 대표적 똘아이이자, 무식하기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부시 대통령의 당선에 전세계는 비웃었다.

당시

어떤 작은 의류 수출업체가 만들어 프랑스에 판매한 옷에 붙어있었다는 라벨.

사용자 삽입 이미지

"이 라벨은 프랑스에 옷을 파는 미국의 한 작은 의류업체의 옷에 붙어있는 것입니다.
아래는 프랑스어 문장을 영어로 번역한 것입니다.

따뜻한 물에 세탁하세요.
순한 세제를 사용하세요.
잘 펴서 말리세요.
표백제를 사용하지 마세요.
건조기로 건조시키지 마세요.
다리미를 사용하지 마세요.
우리 대통령이 바보라서 죄송합니다.
우리가 그 녀석한테 투표한건 아니예요."




영어 몰입교육 못받았는데도 이런거 해석 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