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헌법재판소가 종합부동산세의 세대별 합산산정방식이 위헌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종합부동산세는 유명무실해졌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판결에 관해 여러 각계의 의견을 보면,
"헌재의 재판관이 모두 종부세 대상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당연한 강부자 판결이었다" 라는 점에서 종부세 찬성론자들의 의견이 좁아지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의견으로는 이번 판결의 의미는 다른 맥락에서 살펴 보아야 한다고 본다.

법의 그림자에 숨어버린 헌법재판소


헌법재판소는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것처럼 법률적 해석을 하는 기관이 아니다.
간통죄가 합헌인가의 여부나, 국민에 대한 개병제를 취하고 있으며 군경력자에 대해 가산점을 줄 것 인가의 여부는 어찌보면, (다른 의미에서는 헌법재판소가 우리의 일반 상식과 다른 결정을 내린다는 것을) 우리의 삶과 괴리된 헌법적 판단을 하고 있다는 사실이 명백해 진다.

헌법은 정치적 산물이다.

우리의 지금 헌법은 이른바 87년 6월 항쟁의 결과였다. 이는 당연한 국민의 정치적 행위에 따른 당시 정치적 결정이었고 그렇게 탄생한 것이 바로 우리의 헌법이다.
헌법은 20여년간 변한 것이 없고, 우리의 삶이 변했지만, 아직도 우리가 그 헌법아래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은, 헌법은 단지 그 글자만으로 생명을 이어가는 문서가 아니라,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력을 지닌 강령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준다.

헌법재판소의 역할은 그 헌법을 우리의 시대정신으로서 계속된 재해석을 해 나가는 나침반이 되어야 한다.

헌법이 생명력을 가지고 계속 우리의 삶에 영향을 주기 위해서는, 헌법재판소는 우리가 그 헌법의 올바른 가치를 현대 국민의 다수가, 그리고 고통받는 소수가 어떠한 기준과 지표를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가에 대한 올바른 대답을 할 수 있도록 헌법을 해석하고 그 가치를 반영하여야 한다.
그것이 헌법재판소의 역할이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단지 법논리적으로 세대별 합산과세가 어떠하다는 의견으로 말아야 할 내용이 아니라, 그 헌법을 안고 살아가는 우리가 어떠한 관점에서 우리의 헌법이 정한 질서를 해석해서 내어놓는가에 대한 기준이 되었어야 했다.


헌법재판소의 이번 결정은 법뒤로 숨어버린 비겁한 모습이다. 법이라는 형식논리에 치우쳐, 우리의 현실, 우리 상황을 직시하지 못한 비겁한 발상일 뿐이다.


2.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가 절필선언을 했다.

어제 인터넷에 현재의 경제상황에 대한 예측과 전망 그리고 비판을 해오던 미네르바가 절필을 선언했다.

그는 불행하게도,

"이제부터는 내 마음 속에서  " 한국" 을 지운다." 라는 다소 충격적인 말로 글의 첫머리를 대신했다.

조국이 그에게 원한 것은 다름아닌 침묵이었다고.
그의 글을 보며 많은 인터넷의 한국인이 우리의 현실을 보았다.

침묵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미래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배웠지만, 우리는 그저 침묵만을 강요당할 뿐 어떠한 권리도, 어떠한 자유도 얻지 못하는 것이 2008년 대한민국의 이명박 정권의 이 땅이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눈이 없다


나는 미네르바를 알지 못한다. 경제 상황에 무지한 탓도 있지만, 그의 글이 정확한 분석인지 여부에도 그다지 신뢰하지 못했고, 많이 읽어보지도 못했다. 하지만, 정부에 대한 비판을 차치하더라도 그가 경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글을 썼다는 사실은 기억한다. 그가 투자의 목적이건, 투기의 목적이건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입에 재갈을 물려 이제 눈의 양 옆을 가린채 경쟁으로만 치닫는 경제동물로서의 속성을 부여받았다.

앞으로느 사이버 모욕죄도 신설될 듯이 보인다.

분명한 것은 사이버 모욕죄는 우리를 사이버에서 목을 조르는 것 뿐만이 아니라, 언젠가는 우리와 현피를 뜨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사이버 모욕죄는 우리를 악플로 부터 자유롭게 한다는 허황된 믿음을 주고는 우리를 비판과 견제가 없는 세상으로 몰아갈 것이다.

미네르바의 주장에 온전히 동조하지 못하지만, 어떤 전 시대를 살았으나 더 자유로왔던 사람의 글귀가 생각난다.


"나는 당신의 의견에 동의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만일 당신이 그 의견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면 나는 당신의 말할 자유를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  볼테르 -



3. 시사투나잇이 어제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렸다.

시사투나잇이 막을 내렸다.
지난 5년간 가장 명쾌하진 않을지라도 꾸준하게, 그리고 가장 화려하진 않을지라도 정확하게 현실을 바라볼 수 있었던 왜곡되지 않은 창이 하나 사라졌다.
KBS에서는 시사투나잇이 '생방송 시사 360’으로 계속될 것이라고 하지만, 프로그램의 제목이 바뀌고 그 성격이 바뀌면 그것은 분명히 다른 프로그램이다. 시사잡지 시사IN 의 한 기사에서도 나와있듯이, 방송사의 입장에서는 잘되고 있는 프로그램의 제목을 바꾸는 것은 방송상식에 벗어나는 것이며 이러한 행태는 기존의 프로그램을 폐지하고 다른 프로그램을 신설하는 것과 같다.

흔히 정치권에서는 공영방송인 KBS가 정부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보다는 정부의 정책의 방향을 국민에게 홍보하고 이해하고 설득할 수 있는 채널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것은 정권의 방송이 아닌 지금 KBS의 타이틀 처럼, "국민의 방송"이다. 정권에 협력하고 정권의 나팔수가 되는 것은 문화체육관광부의 홍보기능만으로도 충분히 족하다.

"끝"


우리가 원했던 것은 정치적으로 점철된 방송사의 쇳소리가 아닌, 우리의 삶을 닮고 있는 한개의 언론을 필요로 했을 뿐이다. 그것은 아주 당연한 요구였다.

어제
인터넷에서는 미네르바가,
TV에서는 시사투나잇이 사망했다.

더불어 언론과 여론과 비판도 사망했다.








헌법재판소 전원재판부는 30일 탤런트 옥소리씨 사건을 맡은 의정부지법 고양지원에서 형법 제241조에 대해 낸 위헌제청사건(2008헌가7) 등에서 재판관 4(합헌):4(위헌):1(헌법불합치)로 위헌결정에 필요한 정족수를 채우지 못해 최종적으로 합헌결정을 선고했다.

형법 제241조는 간통죄로, 이 사건은 옥소리, 박철 사건으로도 유명한 사건이다.

간통죄는 위헌인가? 아니면 합헌인가?


먼저, 확인하고 갈 것은, 내가 어떠한 결론을 내리건, 내가 어떤 판단을 하건, 변하지 않는 사실은,
"간통은 나쁜 것이며, 해서는 안될 일"이라는 사실이다.
또, "나는 간통을 해 본 적도 없고 앞으로도 안할 것"이라는 것 또한 확실히 해 두고 가자.

간혹, 이런 글이 올라오면, '간통죄 없어지면 마음껏 간통을 하려는게냐?' '너 간통했지?'하는 비난부터 꺼내는 사람들을 막기 위함이고,
그런 무개념의 비판에 무반응하기 위함이다.

형법 제241조는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제241조 (간통) ①배우자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
②전항의 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논한다. 단, 배우자가 간통을 종용 또는 유서한 때에는 고소할 수 없다.

간통은 "배우자가 있는자"가 저지를 수 있는 죄이며, 이렇게 일정한 신분을 가진 자만이 저지를 수 있는 범죄를 신분범(身分犯)이라고 한다. 다만, 그아 상간한 자(相姦, 간통의 상대방)의 결혼여부는 문제삼지 않는다.

또 간통은 제2항에서 보는 바와 같이 고소가 있어야 논할 수 있는 이른바 친고죄이다. 즉,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만 재판을 하고 간통죄로서 처벌할 수 있다. 종용과 유서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종용(慫慂)을 그것을 하도록 배우자가 시키는 것으로 간통의 사전(事前)에 이를 용인해 주는 것을 말하며 유서(宥恕)란, 용서와 같은 뜻으로 사후(事後)에 이를 용인하는 것을 말한다.(특히 종용의 경우, 이른바 배우자 스와핑에 있어서 간통죄 처벌 불가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이번 헌법재판소의 간통죄 합헌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 사건 법률조항은 국가와 사회의 기초를 이루는 가족생활의 초석인 혼인관계를 보호하고,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으로 입법목적의 정당성이 인정되고, 혼인관계에 파괴적 영향을 미치는 간통 및 상간행위는 법이 개입할 수 없는 순수한 윤리적․도덕적 차원의 문제는 아니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이 형벌의 제재를 동원한 행위금지를 선택한 것은 입법목적 달성을 위한 적절한 수단이다. 다만 ‘형벌’의 제재 규정이 지나친 것인지 문제되나, 이는 기본적으로 입법정책의 문제로서 입법형성의 자유에 속한다. 간통이 사회질서를 해치고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경우에 해당한다고 보는 우리의 법의식은 현재에도 여전히 유효하고, 혼인과 가족생활의 해체를 초래할 위험이 있는 간통 및 상간행위에 대한 사전예방의 강한 요청에 비추어 간통 및 상간행위를 형사처벌하기로 한 입법자의 판단이 자의적인 것이라 할 수 없다. 나아가 이 사건 법률조항으로 인하여 침해되는 사익은 법률혼관계가 유지되고 있는 동안 간통할 수 없고, 법률상 배우자 있는 자라는 사실을 알면서 상간할 수 없다는 특정한 관계에서의 성행위 제한으로 비교적 경미함에 비하여 달성되는 공익은 선량한 성도덕의 수호 및 혼인과 가족제도 보장으로 높은 중요성이 있어 법익균형성 역시 인정되므로 이 사건 법률조항이 과잉금지원칙에 위배하여 개인의 성적 자기결정권,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한다고 볼 수 없다. 한편 이 사건 법률조항은 법정형으로 징역형만을 규정하고 있으나, 그 상한이 높지 않고, 죄질이 가벼운 경우 선고유예까지 선고할 수 있으므로 지나치게 과중한 형벌을 규정하고 있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대하여 위헌 의견을 낸 4명의 재판관중 3인의 의견은 다음과 같다.

일부일처제에 터잡은 혼인제도와 부부간 성적 성실의무를 보호하기 위하여, 개인의 성적(性的)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오늘날 성(性)에 대한 국민 일반의 법감정이 변하고 있고,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행위 모두를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바람직하지 아니하며, 세계적으로도 간통죄를 폐지하는 추세이고, 간통 및 상간행위의 형사처벌이 일부일처제와 가정보호․부부간의 성적 성실의무 보호․여성의 보호에 실효적인 기능을 하지도 못한다. 나아가 간통죄의 예방적 기능에도 의문이 있고 오히려 다른 목적을 위하여 악용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으므로 수단의 적절성 및 피해의 최소성을 갖추었다고 보기 어렵다. 또한 개인의 내밀한 성생활의 영역을 형사처벌의 대상으로 삼음으로써 국민의 성적 자기결정권과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라는 기본권을 지나치게 제한하여 법익균형성을 상실한 것이다. 결국 이 사건 법률조항은 과잉금지원칙에 위배하여 국민의 성적 자기결정권 및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하는 것으로서 헌법에 위반된다.
아직 헌재의 판결문 전문을 입수하지 못해 그 결정에 대한 세부 내용을 확인할 수 는 없으나, 이번 판결에서 아쉬운 부분은, 여전히 합헌이라는 재판부의 의견 보다는 여전히 같은 논리, 같은 의견으로 일관하고 있는 재판부의 태도다.
나는 기본적으로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미 많은 나라가 간통죄를 폐지하였고, 성적 문란함의 문제가 아닌 가족제도의 보호를 위하여 간통죄를 유지한다는 것은 논리에도 맞지 않는 부분이 많고, 헌재에서 꾸준히 주장하고 있는 이른바 일방예방주의에 대해서도 답답할 따름이다.

간통의 범죄화와 그 처벌은 어떤 의미에서는 법정책적인 판단에 맞겨져야 할 부분이다. 형법이 일반 시민의 법의식 또는 법감정이라고 하는 것을 따라가야 할 이유도 충분치 않고(이런 의미에서의 법에서의 일반 국민의 법감정이 중요하다면 삼성의 이건희 전 회장과 한화의 김승연 회장에 대한 재판은 왜 그렇게 결론지어졌는지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우리나라 형법학자의 대다수가 형법 제241조를 위헌이라고 평가한다는 것을 굳이 따라가야 할 이유도 없다. 헌재의 이번 판결은 1990년부터 이어져온 동일한 판결문을 반복해서 읽어오고 있을 뿐, 그다지 나아진 점이 없다는 점에서 문제가 있다고 본다.

간통이 나쁜 짓이라는 행위에 대한 평가는 달라질 일이 없다. 그것은 간통이 죄인가 아닌가의 문제를 떠나서 판단되어야 한다. 간통이 형법상의 범죄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해서 그것이 좋은 짓이 되는 것도 아니고, 그로 인해서 간통죄의 피해자인 배우자가 이혼을 못할 이유도, 또한 이혼시의 위자료에 관해서도 불이익을 받을 이유도 없고 또 그렇게 되지도 않는다. 우리 민법에서는 배우자의 부정행위로 인한 이혼을 인정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위자료라 불리는 불법행위에 기한 손해배상 등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미 20여년간 효용성이 떨어진다는 사회통념이니 일반인의 범감정과 같은 동어반복을 되풀이 해가며, 또 이미 현대 형법학에서는 과거의 무의미한 논쟁으로 치부되는 일반예방주의에 대한 논리의 차용을 언제까지 이어갈지에 대한 안타까움이 앞선다.

나는 간통죄를 폐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아니, 폐지하여야 한다가 아니라 이제는 폐지해도 될 시대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배우자를 강제로 이혼하게 하고, 사회경제적인 비용만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낳는 이러한 형사소송이 얼마나 이어져가야 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없이 다만 이로인해 회자될 술자리 안주 수준의 두려움 때문에 간통죄를 계속 유지한다는 것은 사회적으로나 소송경제적으로 매우 옳지 못하다.

배우자의 부정행위에 대한 비난은 얼마든지 가능하며 이를 처벌하는 것이 효과가 없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충분히 인식하고 있는 헌재가 2008년이 거의 끝나가는 이 시점에서도 90년의 판결을 앵무새처럼 읊조리고 있다는 사싱리 개탄스러울 뿐이다.

이번 재판의 전제가 되었던 옥소리 사건에서 담당판사는 '인간의 성생활은 사생활 중에서 가장 은밀하고 원초적인 것일 뿐 아니라 강제하거나 금지할 수 없는 감정의 발로에 기인한 것으로 국가가 이에 개입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의겸과 함께 '혼인관계가 한 쪽의 의사만으로 쉽게 청산할 수 없는 점을 감안하면 간통죄가 혼인제도의 유지라는 목적을 위해 기혼자의 성적 자기결정권을 전면적으로 희생한다는 의심이 든다'는 이유로 이를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했다. 확실한 사실은 이러한 의견이 헌재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는 것뿐만 아니라, 이러한 의문과 주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며, 이러한 주장에 맞서 헌재의 논리 역시 계속 이어져 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렇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어제 헌재의 결론은, 조선시대에도 써먹었고, 앞으로 200년은 더 써먹을 수 있는 낡았지만 그저그런 논리일 뿐이다. 이미 수 많은 헌법 및 형법학자들에 의하여 난자된 오래된 옷을 입고 나와서 무슨 시대정신을 논하겠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는 판결이다.


간통죄의 최대 피해자는 부부 중 상대방이 아니라 어쩌면 사랑에 실패한 모든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을 국가가 위로할 수 있는 것은 또 한명의 피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행복한 결혼생활을 유지할 수 있도록 건전한 성문화와 보편적 가족의 건전한 결합과 유지를 위한 제도적 뒷받침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부디 다음번의 위헌법률심판에서는 간통죄를 비롯한 불합리한 법률들의 실질적 개선이 이루어지길 빈다.

간통죄와 관련한 내 의견은,
2007/09/10 - [Daily] - 간통죄, 아직도 그대로네?
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읽기 싫어하는 이들을 위한 몇 줄 요약


우리 헌법은 사생활의 비밀을 국민의 기본권의 하나로서 보호하고 있다. 헌법 제17조에서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여 사생활 보호가 국가의 의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형법은 지극히 사생활의 문제에 속하는 개인의 성생활에 대해서 이를 문제삼아 처벌하고 있다.

인간의 성행활은 사생활의 비밀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국가는 그러한 사생활의 영역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부당히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함과 동시에 국가 스스로도 그 분야에 대한 간섭과 규제를 최대한으로 자제하여야 하며, 같은 이유에서 사생활 분야에 대한 국가의 형벌권의 발동도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 그쳐야 한다고 할 것이다.

사생활의 비밀에 속하는 행위에 대한 공권력에 의한 규제는 적을수록 좋고, 특히 형벌로서 이를 규제하는 경우에는 그것으로 보호되는 공공의 법익이 침해되는 법익보다 확실히 큰 경우에 한여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헌재의 김양균 재판관은 사생활 비밀 우선의 원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간통죄는 그것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이른바 보호법익)의보호를 넘어서 부당하게 이것이 남용될 우려가 많은 형벌조항이다. 일반적으로 이혼소송과 함께 진행되는 간통죄의 재판을 통해서 배우자는 더 많은 위자료를 받기 위하여 심리적, 형벌적 제재수단을 동원하여 심리적 협박을 가하는 경우가 많다. 간통에 의한 이혼 소송을 진행하면서 간통죄에 대한 처벌을 근거로 하여 상대방에 대한 협박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이를 통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부당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혼소송이 성공적으로(?) 종료되는 경우 고소 취하는 거의 일반화된 절차로서 진행되고 그 결과 1심 재판에서 간통죄의 유죄 판결율은 겨우 6%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확증하고 있다.

또 일반적으로 여성계와 간통죄의 존치론에서 주장되는 바, 간통죄의 폐지로 인해 간통의 피해자인 부녀가 이혼의 어려움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간통죄의 존치 여부와는 관계없이 민법에서는 상대방의 부정( 不貞)을 이혼사유로 정하고 있다. 결국 이혼을 위해 형법상의 간통죄가 존재하여야 하느냐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라는 것이다. 간통죄가 폐지된다고 해서 이혼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워 지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범죄를 비범죄화 하는 경우 그 범죄가 발생이 증가하게 된다는 우려가 있다.  나쁜 짓은 여전히 나쁜 짓으로서 비난을 받을 것이며 이로 인하여 간통죄가 증가하지는 않는다. 이는 간통죄를 폐지한 다른 나라에서도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이를 주장하는 사람이야말로 간통죄가 죄가 아닌 것으로 된다면 바로 간통을 하기 위해 팬티를 벗어버릴 사람들이다.  간통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간통죄의 존치 여부와는 관계없이 간통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건전한 성도덕이다.

간통죄, 아직도 그대로네?

Posted 2007. 9. 10. 16:19
검찰청이 발행한 2006년의 범죄백서 56페이지에 의하면, 2005년에 발생한 간통사건은 모두 57건. 검거된 범죄자 수는 74명이다. 이 중에서 남자는 38명, 여자는36명. 다른 범죄와 달리 거의 남녀의 비율은 1:1에 가깝다.

간통죄는 형법 제241조에서 규정하고 있는 범죄이며, 다른 특별형법에서는 규정하고 있지 아니하다.
제241조 (간통) ①배우자있는 자가 간통한 때에는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와 상간한 자도 같다.
②전항의 죄는 배우자의 고소가 있어야 논한다. 단, 배우자가 간통을 종용 또는 유서한 때에는 고소할 수 없다.

최근 한 판사가 다시 간통죄의 위헌여부에 대한 판단을 헌법재판소에 넘겼다.(참고로, 이 기사에서 현직 판사가 이에 대해 문제제기를 했다고는 듯이 제목에 써 놓았는데, 위헌 심판은 항상 현직 판사가 제청해야 한다.) 이번이 총 4번째로, 지금까지 3번(1990, 1993, 2001년)의 헌재 판단에서는 모두 이것이 합헌이라는 결정이 내려졌다.
하지만, 간통죄에 대한 헌법재판에서는 항상 반대의견이 존재해 왔다. 그만큼 논란이 있는 법률이라는 뜻이 된다. 간통죄의 합헌성에 대한 헌재의 의견을 보자.

선량한 성도덕과 일부일처주의 혼인제도의 유지 및 가족생활의 보장을 위하여나 부부간의 성적 성실의무의 수호를 위하여, 그리고 간통으로 인하여 야기되는 배우자와 가족의 유기, 혼외자녀 문제, 이혼 등 사회적 해악의 사전예방을 위하여 배우자 있는 자의 간통행위를 규제하는 것은 불가피한 것이며, 그러한 행위를 한 자를 2년 이하의 징역에 처할 수 있도록 규정한 형법 제241조의 규정은 성적 자기결정권에 대한 필요 및 최소한의 제한으로서 헌법 제37조 제2항에 위반되지 않는다.(2001. 10. 25.  2000헌바60 전원재판부)

간통죄가 피해자의 인내심이나 복수심의 다과 및 행위자의 경제적 능력에 따라 법률적용의 결과가 달라지는 측면이 있는 점을 무시할 수는 없으나, 이는 개인의 명예와 사생활보호를 위하여 간통죄를 친고죄로 하는데서 오는 부득이한 현상으로서 형법상 다른 친고죄에도 나타날 수 있는 문제이지 특별히 간통죄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며, 배우자 있는 자의 간통행위 규제가 불가피하고 배우자 모두에게 고소권이 인정되어 있는 이상 간통죄의 규정은 헌법 제11조 제1항의 평등원칙에도 반하지 아니한다.(상동)

간통죄의 규정은 선량한 성도덕과 일부일처주의 혼인제도의 유지, 가족생활의 보장 및 부부쌍방의 성적 성실의무의 확보를 위하여, 그리고 간통으로 인하여 생길 수 있는 사회적 해악의 사전예방을 위하여 필요한 법률이어서 헌법 제36조 제1항의 규정에 반하는 법률이 아니다.
(상동)
최근의 판례에서 표현된 합헌의견만을 나열했지만, 이전의 판례에서도 거의 동일한 내용으로 판시하고 있다.

이에 반하여 헌재의 소수의견인 반대의견(위헌의견)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간통죄의 처벌은 원래가 유부녀를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므로 간통죄의 핵심은 유부녀의 간통에 대한 처벌에 있고 따라서 그 위헌여부의 논의도 유부녀의 간통을 대상으로 하여야 하고 또 그로써 충분하다. 유부녀의 간통은 윤리적 비난과 도덕적 회오(悔悟)의 대상이지 국가가 개입하여 형벌로 다스려야 할 일 즉 범죄가 아니며, 간통에 대한 형사처벌은 이미 애정과 신의가 깨어진 상대 배우자만을 사랑하도록 국가가 강제하는 것이 되는데 이것은 헌법 제10조가 보장하는 당사자의 인격적 자주성, 즉 성적 자기결정권을 박탈하여 성(性)적인 예속을 강제하는 것이므로 인간의 존엄성을 침해하는 위헌규정이다.(2001.10.25, 2000헌바60, 권성 재판관 반대의견)

간통행위에 대해 형사처벌을 하는 것 자체가 합헌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징역형 이외 달리 선택의 여지를 없게 한 응보적 대응의 형벌제도에 문제가 있다. 따라서 현행 형법 제241조에서 간통죄에 대해 징역형만을 둔 것은 필요한 정도를 넘어선 과도한 처벌로서 기본권 최소침해의 원칙에 반하는 것이고, 간통죄를 통하여 보호하려는 공공의 이익과 제한되는 기본권 사이에 적절한 균형이 이루어졌다고 보기 어렵다.(1990.09.10, 89헌마82, 한병체, 이시윤 재판관 반대의견)

간통죄는 사생활 은폐권이라는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있거나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배되어 원칙적으로 위헌이며 일보를 후퇴하여 동죄의 존치의 합헌성 즉 범죄화는 일응 이를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한 형벌로 징역 2년 이하의 자유형만을 규정하고 있는 벌칙의 규정은 과잉금지의 원칙(중 침해의 최소성 및 법익의 균형성)에 위배되어 위헌이다.(1990.09.10, 89헌마82, 김양균 재판관 반대의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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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헌심판 청구를 한 도진기 판사

이번에는 어떤 결론이 내려질까? 아마도 내 예상에는 기존의 판결과 같이 이번에도 합헌이라는 결론이 내려질 가능성이 60% 이상이라고 본다.
하지만, 헌재의 판단과는 별개로, 나는 이 간통죄 규정이 위헌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위헌이냐 합헌이냐가 중요한 것보다, 이제 우리나라도 간통죄를 없애는 것이 추세에도 맞고 합리적이라고 생각된다.

간통죄는, 배우자 이외의 자와 성관계를 함으로서 성립한다. 간통죄는 선량한 성도덕과 일부일처제도의 혼인제도 유지, 가족생활의 보장을 위하여 존재한다고 헌재의 다수의견은 밝히고 있다. 그러나 과연 간통죄가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제도인지는 정확하게 살펴보아야 한다.



간통을 처벌하는 것은 남녀가 일부일처제의 전통을 확립한 이후로부터 발생하여 왔다. 부부중 일방의 성적인 성실의무 위반에 대한 제재는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으며 이것이 근대 형법에서 형사법상의 범죄로서 규정된 것이다. 정당하게 성립된 부부에게 있어서 결혼당사자 아닌 제3자와 성관계를 가지게 되는 경우 상대 배우자의 복수심 또는 질투 등으로 인하여 가정불화가 발생할 수 있고, 심지어는 혼외 자녀의 문제로 발전할 수 있다. 이로 인하여 간통자의 가정은 파탄에 이르게 될 것이며 이것이 바로 간통을 형벌로서 처벌하여야 하는 이유라고 할 수 있다.

즉, 간통을 형벌로서 처벌하는 것은,

가. 일부일처, 부부친자 중심의 가족제도의 보호
나. 순수한 혈통의 보전
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성도덕 내지 성적 성실의무 즉, 정절 내지 정조의 보호를 목적으로 한다.

하지만, 과연 간통죄가 그러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하고 있을까에 관한 문제에서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먼저, 가족제도를 보호한다는 점에서 보면,

현행 형법에 의하면 간통죄는 친고죄로 되어 있다. 즉 간통을 한 자의 배우자가 고소를 하여야만 그 죄를 논할 수 있으며 이 경우에는 상간자 두명을 모두 고소하여야 한다(경우에 따라서는 3명 -_-;;;). 그리고 이러한 고소권의 행사는 혼인이 해소되거나 이혼소송을 제기한 후에라야 가능하기 때문에(형사소송법 제229조 제1항) 고소권을 발동하는 경우 기존의 가정은 종국적으로 파경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중간에 이혼소송이 취하되는 경우 공소권없음의 판결을 내리게 된다). 또 설사 고소가 취하되더라도, 부부가 고소를 통해 범죄자와 피해자로 맞닥드린 이상 다시 정상적인 붑관계의 회복은 거의 기대하기 힘들다. 따라서 이렇게 본다면 간통을 처벌한다는 것은 결국 가족의 해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가족제도의 보호라고 하는 간통죄 처벌의 기능은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또 순수한 혈통의 보전이라고 하는 기능에 대해서 보면 이 또한 과연 그 기능이 적합한지 의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김양균 재판관의 반대의견을 인용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유부녀의 경우 여러 남성과 정사를 갖게 되면 잉태한 태아의 부(父)가 누구인지 가리기 어렵게 되어 혈통의 순수성이 침해될 수 있다는 것을 쉽게 인정할 수 있으나 유부남의 경우에는 이 이론으로는 설명이 어렵다. 유부남이 유부녀와 정사를 가진 경우에는 상대방유부녀의 부(夫)의 혈통의 순수성을 침해한 공범으로 설명될 수 있을 것이나 유부남이 미혼의 여자와 정사를 가진 경우는 혈통의 순수성을 보호법익이라 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리고 법상 미혼상태에서의 사실상의 동거나 혹은 계약결혼 청산직후의 타 남녀와의 결혼도 혈통의 순수성 보전이 문제될 수 있으나 현행법상 처벌규정이 마련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구 형법(일본의 구 형법)이나 자유중국 구 형법에서 처(妻)의 간통만을 처벌하는 규정을 두었던 것이라거나 프랑스나 이태리에서 처의 간통을 더 중벌하는 규정을 두었던 것은 다 유부녀의 간통이 혈통의 순수성을 침해할 위험이 크다고 봤기 때문인데, 오늘날은 그것이 남녀평등의 원칙에 위배되는 위헌규정으로서 더 존속할 수 없는 것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1990.09.10, 89헌마82)
뿐만아니라, 현대 의학의 발달로 인하여 DNA검사를 통한 친혈관계의 확인이 가능한 마당에 이러한 전근대적인 순혈주의를 위한 형법이 존재해야 하는가도 의문이다.

게다가 이러한 간통의 처벌로 인하여 이미 출생한 혼외자에 대한 복지를 등한시 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문제점도 있다. 죄는 누가 지었건, 이미 태어난 아이는 왜 그 때문에 고통받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언급이 없다. 이미 태어난 아이는 그 출생의 과정의 내용은 불문하고 행복해질 권리가 있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성도덕이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는... 솔직히 과연 그런 것을 오늘날 누가 지키냐는 자조섞인 발언도 가능한데, 좀 더 이성적으로 고려해 본다면 다음과 같은 판단이 가능하다.

우리의 전통적 성도덕이라는 것이 건전한 가족제도의 유지와 동일하다고 본다면, 앞서 본 바와 같이 간통죄를 처벌하는 것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을 수 있다. 전통적인 성도덕이 부부간 1인과의 성생활의 확고한 유지라고 한다면, 아직 미혼인 자의 성도덕에 대해 침묵하고 있는 형법은 그 형평성이 맞지 않다. 전통적 성도덕은 미혼자의 순결 역시 기혼자의 순결에 못지 않게 중요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여성에 대해서는 엄격한 성도덕을 중시하는 우리나라 전통적인 사상과 달리 남자에 대해서는 축첩, 정실과 후실 등 그다지 엄격하지 아니한 성도덕적 관점이 존재한다는 면에서는 전통적 성도덕의 보호라는 간통죄 유지 이론은 설득력이 없다고 할 것이다.


이상에서는 간통죄를 존치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한 약간의 반론을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간통죄의 폐지를 위한 더 적극적인 생각을 해 보자.

우리 헌법은 사생활의 비밀을 국민의 기본권의 하나로서 보호하고 있다. 헌법 제17조에서 "모든 국민은 사생활의 비밀과 자유를 침해받지 아니한다"고 규정하여 사생활 보호가 국가의 의무라고 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형법은 지극히 사생활의 문제에 속하는 개인의 성생활에 대해서 이를 문제삼아 처벌하고 있다.

인간의 성행활은 사생활의 비밀에 속하는 대표적인 사례로서 그것이 윤리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만한 것이건 그렇지 않은 것이건 이는 국가건, 아니면 누구에게라도 들춰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그러한 사생활의 영역이 다른 사람에 의하여 부당히 침해당하지 않도록 보호함과 동시에 국가 스스로도 그 분야에 대한 간섭과 규제를 최대한으로 자제하여야 하며, 같은 이유에서 사생활 분야에 대한 국가의 형벌권의 발동도 필요한 최소한의 범위에 그쳐야 한다고 할 것이다.

사생활의 비밀에 속하는 행위에 대한 공권력에 의한 규제는 적을수록 좋고, 특히 형벌로서 이를 규제하는 경우에는 그것으로 보호되는 공공의 법익이 침해되는 법익보다 확실히 큰 경우에 한여야 한다. (이러한 주장을 헌재의 김양균 재판관은 사생활 비밀 우선의 원칙이라고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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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사생활의 영역에 속하는 행위라고 할지라도 그 자유는 무한한 것은 아니며 국가안전보장, 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해 필요한 경우 제한될 수 있는 것이지만(헌법 제37조 제2항) 그 제한 및 그 위반에 대한 형벌이 헌법정신에 합당하려면 과잉금지의 원칙이 더욱 엄격하게 준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문제점의 한가운데 바로 간통죄가 있다.

간통죄는 그것이 보호하고자 하는 가치(이른바 보호법익)의보호를 넘어서 부당하게 이것이 남용될 우려가 많은 형벌조항이다. (김양균 재판관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예시를 들고 있다.다. "특정인을 정치적·사회적으로 매장하기 위한 함정 또는 재물을 갈취하기 위한 미인계(美人計)가 가능하며 어쩌다 우연히 실수를 저지른 부녀에 대한 폭력배 등의 계속적인 성적인 침해나 재물갈취 등 더 큰 해악이 발생될 수 있는 것이다. 또 경찰력이나 기타의 공권력이 불필요하게 남용될 소지도 있으며 예컨대 간통사범 단속을 빙자하여 접객업소를 임검 수색(臨檢 搜索)함과 같은 경우가 그것이라 할 것이며 이러한 정력과 비용은 강간이나 강조 등 흉악범의 검거에 전용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이혼소송과 함께 진행되는 간통죄의 재판을 통해서 배우자는 더 많은 위자료를 받기 위하여 심리적, 형벌적 제재수단을 동원하여 심리적 협박을 가하는 것이 그것이다. 간통에 의한 이혼 소송을 진행하면서 간통죄에 대한 처벌을 근거로 하여 상대방에 대한 협박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고 이를 통해 금전적 이익을 취하고자 하는 부당한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혼소송이 성공적으로(?) 종료되는 경우 고소 취하는 거의 일반화된 절차로서 진행되고 그 결과 1심 재판에서 간통죄의 유죄 판결율은 겨우 6%에 불과하다는 사실이 이를 확증하고 있다.


또 일반적으로 여성계와 간통죄의 존치론에서 주장되는 바, 간통죄의 폐지로 인해 간통의 피해자인 부녀가 이혼의 어려움이 있다는 점에 대해서 보면,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전혀 그렇지 않다.
간통죄의 존치 여부와는 관계없이 민법에서는 상대방의 부정( 不貞)을 이혼사유로 정하고 있다. 결국 이혼을 위해 형법상의 간통죄가 존재하여야 하느냐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문제이라는 것이다. 간통죄가 폐지된다고 해서 이혼이 불가능하거나 어려워 지는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범죄를 비범죄화 하는 경우 그 범죄가 발생이 증가하게 된다는 우려가 있다. 이에 대해 보면 다음과 같다. 범죄가 비범죄화 되는 경우는 두 가지가 있다. 한 행위가 나쁜짓이 아닌 행위로서 인정되는 것이 하나이(국가원수에 대한 모독 등이 처벌되던 박정희 시대와 달리 우리는 매일 노무현을 욕하고 산다)고, 간통죄와 같이 여전히 그 행위가 나쁘고 불법적인 행위임에는 분명하지만, 그러한 행위에 대한 공권력의 행사가 부당하다는 반성에서 오는 비범죄화가 있다. 즉, 간통죄의 폐지로 인하여 간통이 무한히 발생된다는 것은 인간의 심리에 대한 바보같은 미신 때문이다.

나쁜 짓은 여전히 나쁜 짓으로서 비난을 받을 것이며 이로 인하여 간통죄가 증가하지는 않는다. 이는 간통죄를 폐지한 다른 나라에서도 정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고, 현실적으로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오히려 이를 주장하는 사람이야말로 간통죄가 죄가 아닌 것으로 된다면 바로 간통을 하기 위해 팬티를 벗어버릴 사람들이다.  간통이 나쁜 짓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라면 간통죄의 존치 여부와는 관계없이 간통을 저지르지 않는다. 이것이 우리의 건전한 성도덕이다.


일본의 경우 1947년에 이미 간통죄를 폐지했고, 대부분의 공산주의 국가는 공산정권의 수립시에 이미 간통죄를 폐지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경우에도 연방 형법전에서는 간통을 찾아볼 수 없고 일부 주에서 이를 처벌하고 ㅇㅆ으나, 미국의 간통관련 처벌을 보면, 상대 배우자의 거주지에서 간통을 하는 경우 상대 배우자가 전혀 그 출입을 허용하지 않거나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 하에 주거침입의 일종으로 처벌하고 있다.

아직 우리에겐 간통을 처벌하는 것이 옳으며 이를 처벌하는 것은 시기적으로 이르기 때문에 더 기다려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이에 대해 일본의 1947년 폐지 당시 한 일본 학자의 주장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법은 항상 일반화된 대중의 법감정에 충실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필요에 따라서는 일반 대중의 범감정과 상식을 앞서 선도할 의무도 법은 가지고 있다"



아마도 이번 헌재 역시 간통을 그냥 내버려둘 가능성이 있다.

하지만, 나는 간통죄는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잘 좀 죽여주시지 그러셨어요 >

사람이 사람을 공식적으로 살해 할 수 있는 경우가 몇 가지 있다.
사형이 선고되고 확정된 범죄자를 죽이는 것과 전쟁이다(사실은 사형이나 전쟁은 어느 법에서도 살인을 인정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른바 형법상 정당행위로서 위법성이 조각된다).

전쟁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평시에 사람이 사람을 '죽여야 할' 정당한(?) 행위는 사형수를 사형집행관이 살해하는 행위다.


사형제도는 과연 필요할까.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측의 견해를 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 국민의 법감정은 사형제도의 존치를 원한다는 점
  • 사형을 통한 범죄 억제 효과
  • 살인 등 흉악범위 영구적 격리 등

    그런데 사실 이러한 이유들이 사형제도를 유지하여야 하는 정당한 이유인가에 관한 점에서는 내 개인적인 견해로는 전혀 미흡하다. 이러한 이유라면 당장 사형을 폐지하여도 좋을지 모른다.

    사형제도에 관해 우리나라의 헌법재판소는 1996년에 합헌 판결을 내린 바 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왜 이런 급진적인 헌법 해석론의 발전이 필요한 시기에 헌재는 삽질만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군 가산점 문제도 그렇고, 행정수도도 그렇고..) (1996년의 판결이 있기 전인 1993년에도 이에 관한 헌법소원이 있었으나, 청구기간이 경과하였다는 이유로 부적법 각하하였었다)

    헌재의 이야기를 보자.

    (가) 生命權 역시 憲法 제37조 제2항에 의한 일반적 법률유보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나, 生命權에 대한 제한은 곧 生命權의 완전한 박탈을 의미한다 할 것이므로, 死刑이 比例의 원칙에 따라서 최소한 동등한 가치가 있는 다른 생명 또는 그에 못지 아니한 公共의 利益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성이 충족되는 예외적인 경우에만 적용되는 한, 그것이 비록 생명을 빼앗는 刑罰이라 하더라도 憲法 제37조 제2항 단서에 위반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나) 모든 인간의 생명은 자연적 존재로서 동등한 가치를 갖는다고 할 것이나 그 동등한 가치가 서로 충돌하게 되거나 생명의 침해에 못지 아니한 중대한 공익을 침해하는 등의 경우에는 국민의 생명·재산 등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국가는 어떠한 생명 또는 법익이 보호되어야 할 것인지 그 규준을 제시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의 생명을 부정하는 등의 범죄행위에 대한 불법적 효과로서 지극히 한정적인 경우에만 부과되는 사형은 죽음에 대한 인간의 본능적 공포심과 범죄에 대한 응보욕구가 서로 맞물려 고안된 "필요악"으로서 불가피하게 선택된 것이며 지금도 여전히 제 기능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정당화될 수 있다. 따라서 사형은 이러한 측면에서 헌법상의 비례의 원칙에 반하지 아니한다 할 것이고, 적어도 우리의 현행 헌법이 스스로 예상하고 있는 형벌의 한 종류이기도 하므로 아직은 우리의 헌법질서에 반하는 것으로 판단되지 아니한다.
    2. 刑法 제250조 제1항이 규정하고 있는 殺人의 罪는 인간생명을 부정하는 犯罪행위의 전형이고, 이러한 犯罪에는 그 행위의 태양이나 결과의 중대성으로 미루어 보아 反人倫的 犯罪라고 규정지워질 수 있는 極惡한 유형의 것들도 포함되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死刑을 刑罰의 한 종류로서 合憲이라고 보는 한 그와 같이 他人의 生命을 부정하는 犯罪行爲에 대하여 행위자의 生命을 부정하는 死刑을 그 불법효과의 하나로서 규정한 것은 행위자의 生命과 그 가치가 동일한 하나의 혹은 다수의 生命을 보호하기 위한 불가피한 수단의 선택이라고 볼 수 밖에 없으므로 이를 가리켜 比例의 원칙에 반한다고 할 수 없어 憲法에 위반되는 것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 헌재의 공식적인 의견에는 특이하게도 반대의견이 달려있다. 일부의 헌법재판에 있어서 소수의 의견이지만 귀기울일 필요가 있는 가치있는 사건에 한하여 이렇게 소수의견을 병기하는 경우가 있다.

    재판관 김진우의 반대의견
    1. 憲法 제10조에 규정된 인간의 尊嚴性에 대한 존중과 보호의 요청은 刑事立法, 刑事法의 적용과 집행의 모든 영역에서 지도적 원리로서 작용한다. 그러므로 刑事法의 영역에서 立法者가 인간의 尊嚴性을 유린하는 惡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의 生命과 自由를 박탈 내지 제한하는 것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刑罰제도를 채택하는 것은 憲法 제10조에 반한다. 死刑제도는 나아가 良心에 반하여 법규정에 의하여 死刑을 언도해야 하는 법관은 물론, 또 그 良心에 반하여 직무상 어쩔수 없이 死刑의 집행에 관여하는 자들의 良心의 自由와 인간으로서의 尊嚴과 가치를 침해하는 비인간적인 刑罰제도이기도 하다.

    재판관 조승형의 반대의견
    1. 死刑제도는 生命權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生命權의 제한이므로 憲法 제37조 제2항 단서에 위반된다. 가사 헌법 제37조 제2항 단서상의 生命權의 본질적 내용이 침해된 것으로 볼 수 없다고 가정하더라도, 刑罰의 목적은 應報·犯罪의 일반예방·犯罪人의 개선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刑罰로서의 死刑은 이와 같은 목적달성에 필요한 정도를 넘어 生命權을 제한하는 것으로 目的의 正當性, 그 수단으로서의 適正性·피해의 最小性 등 제원칙에 반한다.
    (출처는 모두 형법 제250조 등 위헌소원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 판례집 제8권 2집)

    특이한 것은, 이 판결에서는 두 재판관의 위헌의견이 다수의견인 합헌 의견보다 더 상세하게 기술되어있다는 점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두 재판관의 위헌 의견에 동의하며 사형제도가 폐지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 사형제도는 강력범죄의 감소에 효과적인가?
         (사형을 없애면 강력범죄가 늘어난다?)

    결론만 말하면, 아니다.
    한겨레21의 기사 등 여러 발표에 따르면 사형제도의 폐지는 범죄율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

    “사형제도를 폐지하기 직전인 1975년 10만 명당 3.09명이었던 캐나다의 살인 범죄율이 사형 폐지 뒤 오히려 줄어들어 2003년에는 10만 명당 1.73명으로 떨어졌다.” (한겨레 21기사중 발췌)


    이러한 현상은 단지 캐나다의 특수성이 아니다. 유럽의 사형폐지국에서도 매우 빈번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며,  사형폐지가 범죄율의 증가에 영향을 주지 않는 다는 것은 확실하다.

    “범죄예방과 응보라는 이유로 세계 80여개국에서 사형제도를 유지하고 있지만 오히려 사형제도를 폐지한 뒤 범죄율이 낮아지는 경우가 더 많다”(경향신문 기사)


    이러한 사실은 조금만 생각하면 당연히 알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사형에 해당될 만큼 중대한 범죄를 일으키려고 하는 경우, '나는 체포되어 사형당할 수도 있다'는 예상을 하게 된다면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될까?

    상식적으로는 그렇다라고 할지 모르지만 아니다. 그렇지 안다.

    이미 범죄의 의사가 형성된 후라면, 체포를 우려하여 범죄의 실행을 그만두는 자는 사형이 아니라 단순 징역이라도 범죄의 실행을 포기한다.
    하지만, 역시 더 중요한 사실은, 범죄의사가 확고한 자는 자신의 체포가능성을 무시하거나 0%로 보거나, 아니면 체포되어 처벌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용인하고 받아들인다. 즉, 사형이건 아니건 상관없이 범죄를 저지른다. 사형은 그런 생각을 하는 예비 범죄자에게 전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닌 것이다.

    사형제도를 유지한다고 해서 강력범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고, 사형제도를 폐지한다고 해서 강력범죄가 줄어드는 것도 아니다.


    ▣ 사형제도는 범죄예방적 효과가 있는가?

    형벌의 목적은, 범죄자로 하여금 이를 반성케 하고, 재사회화 하여 사회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인간으로 교화시켜 사회에 복귀시키는데 있다. 그러나 범죄자를 영원히 사회에 복귀할 기회조차 주지 않는 생명의 박탈행위는 부당하다.

    형벌이 가지는 예방적 효가는 두 가지로 나뉜다. 이른바, 특별예방적 효과와 일반예방적 효과이다.

    특별예방적 효과란, 범죄자에 대하여 형벌을 과한 뒤, 이를 통하여 자신의 범죄행위에 대한 형벌의 부담을 지워 다시는 범죄를 저지르지 못하게 하는 것을 말한다. 즉, 재범을 방지하기 위한 효과이다.
    일반예방적 효과는 범죄자에 대하여 형벌을 과하는 것을 공표함으로써 범죄자 이외의 일반 사람들이 그러한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하는 효과를 말한다.

    그런데, 형법학에서는 이러한 일반예방적 효과는 거의 그 효과가 없다는 것이 정설이다. 다른 사람이 처벌을 받는다고 해서 자신이 범죄를 저지르지 않게 되는 효과는 없다는 것이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범죄후 체포를 예상하거나 체포를 준비하는 범죄자는 없다. 일반예방은 체포예상을 전제로 하는데, 그런 인식이 없는 범죄자의 인식체계상 일반예방이 전혀 효과가 없음은 자명한 사실이다.
    사형 역시 일반예방적 효과는 없다. 사형에 해당할 수 있는 범죄를 저지르고자 하는 자가 체포를 예상하고 범죄를 저지르는 일은 상상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또한 특별예방적 효과에 있어서 사형이 특별예방적 효과가 있다는 사실은 전혀 설득력도 없고 논리적이지도 않다. 사형은 재범의 기회는 커녕 삶을 완전히 박탈하기 때문에 사형수에게 특별예방이란 있을 수 없다. 이러한 점은 헌재 판결에서 청구인의 청구취지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사형의 범죄에 대한 일반예방적 효과는 학문적 가설일 뿐 과학적으로 입증된 바가 없고, 형벌의 본질이 응보에서 교육으로 옮겨가고 있는 추세임을 감안할 때 사형을 인정한다는 것은 결국 국가가 범죄인의 사회복귀를 위한 교화와 개선의 노력을 스스로 포기하는 것이다.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 판례집 제8권 2집 , 542)

    따라서 사형제도는 범죄의 예방적 효과를 가지지 못한다.


    ▣ 사형을 통해 범죄자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이 옳은가?

    일종의 윤리적 차원의 문제이다.
    법의 이름으로 생명을 박탈하는 것이 옳은가?
    이 문제에 대해서는 헌법재판소의 소수의견이 명확한 답을 내 주고 있다.

    조승형 재판관의 소수의견을 보자

    나. 인간의 생명권은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로서 이를 박탈할 수는 없다.
    사람의 생명에 대하여도 부정적으로 사회과학적·법적인 평가가 가능하다고 하여, 헌법상 기본권인 인간의 생명권으로서 법률상의 의미를 조영한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권은 사람의 생존본능과 존재목적 그리고 고유한 존재가치에 바탕을 두고 있으므로 이는 선험적이고 자연법적인 권리일 수 밖에 없다. 또한 이는 모든 기본권이 생명이 있음을 전제로 하여 비로소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서 모든 기본권의 근원이 되는 최고의 기본권이기 때문에, 어떠한 법률이나 제도에 의하여서도 박탈될 수 없다고 할 것이다.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 판례집 제8권 2집 , 537~572,557-557)

    사람이 타인을 살해하는 것이 잘못된 행위라면, 그것을 심판하여 사법의 이름으로 그 사람을 살해하는 것은 옳은 것인가? 법의 이름으로 사람의 생명을 영구적으로 완전히 박탈한 권한이 인간에게 있는가.
    다시 헌재 판결의 청구취지를 보자

    결국 사형은 그 자체가 법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또 다른 살인행위일 뿐 아니라 국민의 응보적 법감정을 순화시키기보다는 도리어 그것을 황폐화시킬 뿐이며, 국가가 살인행위를 비난하면서도 스스로 사람의 생명을 박탈하는 것은 이를 정당화시키는 모순에 빠진다.
    사형으로 응징될 만한 범죄의 경우는 그 범인 개개인의 인격이나 성향보다 그와 같은 범죄로 몰고간 우리 국가사회 전체의 구조적 모순에서 오히려 더 강한 비난의 요소가 있다고 보여지는 경우가 많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범인 개개인의 생명을 박탈하는 극단적인 방법으로 이에 대처하려고 하는 형사정책은 문제의 본질을 왜곡한 임시방편에 불과하다.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 판례집 제8권 2집 , 542)

    사람을 죽이지 말라고 하면서 국가가 누군가를 죽인다는 모순. 그것은 지나치게 가혹한 자기 모순이 아닐까?


    ▣ 피해자 보호를 위해 사형이 필요할까?

    피해의 복구를 위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무엇일까.
    그것이 민사이건, 형사이건 피해의 구제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바로 '원상회복'이다. 우리 법체계 역시 원상회복을 원칙으로 한다. 그런데, 실질적으로는 원상회복을 할 수 없는 경우가 더 많다. 그것을 해소하기 위해 대부분의 경우 '금전적인 배상'을 통해 피해 구제에 상당한 수준을 배상받을 수 있다.

    사형은 과연 피해자의 구제에 필요한 방법인가?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을 사형시킴으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은 과연 무엇인가라는 문제에 대해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말을 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심리적 안정감이 생명의 박탈보다 우월하다고 할  수 있는지도 의문이다.
    사람에 대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은 개개인의 원한에 대하여 국가가 나서서 복수해 주는 것 이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피해자 내지 그 가족 또는 사회의 보복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누군가를 죽인다는 것은 반인륜적이다.

    국가의 사법제도는 개개인의 복수를 위해 사용될 것은 아니다. 어쩌면 이것이 권력의 집중, 독재의 가장 말단에 있는 가장 위험한 사상이다. 다수의 폭력으로 살해하는 행위에 불과한 것이다.

    피해자를 위해서 사람을 죽여야 한다는 논리는 뭔가 완벽하게 착각하고 있는 말이다.
    피해자의 구제 또는 보호, 인권과 피의자의 인권은 zero sum 게임이 아니다.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한다고 해서 피해자의 인권이 무시되고 구제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것과는 전혀 별개의 문제다.

    우리가 피의자의 인권을 보호해야 하는 이유는 그들이 누구보다 인권이 무시될 수 있는 위험에 처했기 때문인 것이다.

    피의자 인권의 보호로 인해 피해자의 인권이가 구제가 도외시되는 일은 결코 없어야 할 것이다.



    ▣ 죽여야 하는 인간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 있는가?

    헌재 판결의 김진우재판관 반대의견을 보자

     인간의 존엄성을 유린하는 악법의 제정을 통하여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박탈 내지 제한하는 것이나 잔인하고 비인간적인 형벌제도를 채택하는 것은 헌법 제10조에 반한다. 이는, 극악한 범죄를 범함으로써 스스로 인간임을 포기한 자라도 여전히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갖고 있는 인간존재인 한, 그에 대하여도 피해자 내지 그 가족 또는 사회의 보복감정을 충족시키기 위해서 또는 유사 범죄의 일반적 예방이라는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비인간적인 형벌을 적용해서는 아니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형벌로서의 사형은 자유형과는 달리 사형선고를 받은 자에게 개과천선할 수 있는 도덕적 자유조차 남겨주지 아니하는 형벌제도로서 개인을 전적으로 국가 또는 사회 전체의 이익을 위한 단순한 수단 내지 대상으로 삼는 것으로서 사형수의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것이다. 사형제도는 나아가 양심에 반하여 법규정에 의하여 사형을 언도해야 #08하는 법관은 물론, 또 그 양심에 반하여 직무상 어쩔수 없이 사형의 집행에 관여하는 자들의 양심의 자유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침해하는 비인간적인 형벌제도이기도 하다.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 판례집 제8권 2집 , 550-551)

    "죽어 마땅한" 인간이 있을까?
    "죽여버려야 할" 인간이 있을까?

    정말 그렇다고 생각하는가?


    ▣ 오판의 가능성

    다시 한번 보자.

    아무리 훌륭한 법관이라 하더라도 인간이 하는 재판인 한 오판이 있을 수 있고 그 경우 집행을 마친 후에 있어서는 어떠한 방법으로도 원상회복이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사형제도에 의하여 달성하려는 목적인 범인의 영구적 격리나 범죄의 일반예방이라는 공익은 무기징역에 의하여도 달성될 수 있는 것인데도 국민의 기본권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를 갖는 기본권인 생명권(인간의 생명은 그 개개인에 있어서는 하나의 우주이고, 지구보다 무거운 것이다)을 완전히 최종적으로 박탈하는 사형제도를 규정하고 있는 법률규정은 피해의 최소성원칙에 반하여 기본권제한에 있어서의 과잉금지의 원칙에 위반되고, 위와 같은 가장 중요한 기본권인 생명권의 본질적 내용을 침해하는 것이어서 헌법 제37조 제2항에 반할 뿐만 아니라(이 점에 관해서는 조승형 재판관의 반대의견에서 상세한 설명이 있으므로 여기서는 상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위 가.에서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헌법 제10조에서 보장된 인간의 존엄과 가치도 침해하는 것이다. 따라서 형벌제도로서의 사형제도는 아무런 정당성도 합리성도 없는 것이어서 사형제도 및 이를 규정한 법률규정은 적법절차에 반하는 형벌 및 법률규정이라고 할 것이다. 따라서 헌법 제12조 제1항이 사형제도의 합헌론의 근거가 된다고 볼 수는 없다.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 판례집 제8권 2집 , 552)

    인혁당 사건은, 명백한 사법살인 이었다.
    이제 와서 진실이 밝혀졌다고는 하나, 이제 와서 어떻게 할 것인가?
    사람을 죽여놓고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헌재도 사형제가 '제도살인'의 성격이 있어 위헌과 합헌 논의를 떠나 존치 여부에 대한 진지한 논의가 있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우리는 형벌로서의 사형이 우리의 문화수준이나 사회현실에 미루어 보아 지금 곧 이를 완전히 무효화시키는 것이 타당하지 아니하므로 아직은 우리의 현행 헌법질서에 위반되지 아니한다고 판단하는 바이지만, 사형이란 형벌이 무엇보다 고귀한 인간의 생명을 국가가 법의 이름으로 빼앗는 일종의 "제도살인(制度殺人)"의 속성을 벗어날 수 없는 점에 비추어 우리의 형사관계법령에 폭넓게 사형을 법정형으로 규정하고 있는 이들 법률조항들이 과연 행위의 불법과의 간에 적정한 비례관계를 유지하고 있는지를 개별적으로 따져야 할 것임은 물론 나아가 비록 법정형으로서의 사형이 적정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를 선고함에 있어서는 특히 신중을 기하여야 한다는 생각이다.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 판례집 제8권 2집 , 548)


    헌법이 수호하여야 할 마지막 가치는 바로 인간의 생명이다. 사형을 통해 사람의 목숨을 박탈하는 행위는 완벽한 모순이다.
    게다가 그것을 판단하는 것 엿기 불완전한 인간이라는 점에서 사형을 찬성할 수는 없다.



    ▣ 국민 감정이 사형을 원한다.

    가장 가슴아픈 현실이 바로 이것이다. 국민이 살인을 원한다라는 폭력적 사상.

    조금 다른 이야기이지만, 1945년(46년인지..) 일본의 형법 개정시에, 간통죄가 폐지되었다. 당시 일반적인 시민의식은 간통을 범죄로서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약 80% 였지만, 폐지했다. 당시 한 형법학자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법, 특히 형법은, 반드시 평균화된 일반적인 국민의 법의식과 동일할 필요는 없다. 그것은 오히려 국민의식과 사회의 합의된 법의식의 발전이 더디거나 그것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을 때 선도하여 그것을 바로잡을 수 있는 기능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일본은 간통죄를 폐지하였다.

    사형에 대해 그것이 필요하다는 국민이 더 많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람을 살해하도록 허락하는 우리 법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것을 몇십년간 보아온 국민이라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 어쩌면 당연하다. 사형을 없애고 형법이 국민의식수준을 선도한다면, 사형의 필요성에 대한 국민적 합의도 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

    그런 의미에서 동아일보의 이 기사가 시사하는 바는 매우 크다고 할 것이다.


    마치며.

    우리나라에 사형에 해당하는 범죄의 수가 자그마치 89개라고 한다. 지나치게 많다. 군사범죄를 제외하더라도, 41개다. 너무 많다. (그나마도 통계를 위해 줄인 것이 저 정도다)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이 오히려 살인을 부른다.
    어쩌면 가장 제도화된 살인인 사형제도는 사라져야 한다.
    사형제를 공식 폐지한 나라는 1977년 16개국에서 2005년 현재 86개국으로 크게 늘었고 10년 동안 한 번도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 '사실상의 폐지국'까지 합하면 128개국에 이른다.
    사형제도가 폐지되어야 하는가의 문제에 대하여 헌재 조승형 재판관의 의견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

    고금을 통하여 사형제도의 존폐에 대한 논쟁이 이어져 오는 동안 오늘에 이르러서는 앞서 본 바와 같이 이 제도를 폐지한 국가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사형존치론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는 경우가 드물며, 다만 정치·사회·문화적 여건으로 보아 사형폐지는 시기상조라고 하거나 단계적인 폐지를 주장하는 경우가 많으나 대부분의 학자들이 사형폐지의 당위성만은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이제 독재와 독선으로 일관하였던 헌정사를 마감하고 이른바 문민정치의 시대를 열어가고 있으며, 남녀고용평등, 노사공존, 각종 복지제도를 과감하게 실시하여 적절한 소득의 재분배, 빈부격차와 계층간 위화의 해소 등 국민총화를 이루어가고 있으며 각 종교와 자선단체의 노력으로 생명에 대한 외경심을 높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사형수의 사면을 원하는 등 가해자를 용서하는 피해자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등 귀감이 되어 국민의식이 크게 변화하고 있으며, 국제적으로는 시민적·정치적권리에관한국제협약(제6조 참조), 유럽인권협정인 인권및기본적자유보장을위한협정(제1조 참조)에서 사형제도의 폐지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들 협정에 가입한 국가들이 점차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이와 같은 시대의 변화를 외면하고 아직도 존치론이나 시기상조론 및 단계적 폐지론을 고집할 수는 없다고 할 것이므로, 우리 헌법재판관은 시대의 변화에 순응하여 과감하게 사형제도가 위헌임을 선언함으로써 사회개혁에 선도적 역할을 다하여야 할 것으로 믿는다.

    (헌법재판소 1996.11.28, 95헌바1, 판례집 제8권 2집 , 564-565)



    분명히 이 글을 올리면, 너도 당해봐라라거나, 당하면 저런 소리 못한다라는 저주에 가까운 말이 들리게 마련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옳다고 믿는 바를 침묵할 수도 없잖은가?

    사형은 폐지되어야 한다.


    나는 이번 대통령 선거에서,
    사형의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운 후보에게 우선적인 지지를 보낸다.

    민주노동당의 노회찬의원은 공식적으로 사형에 반대하며, 다른 대선 주자들은 아직 이에 관하여 구체적 언급은 거의 없다.

    민주노동당은 사형제도의 폐지를 당론으로 하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2004년 12월에 유인태 의원의 대표발의로 사형폐지에관한특별법을 제출했으나, 지금까지 의결은 커녕 공식적인 심의 조차 한번 열린 적이 없다.

    한나라당의 big 2 대선 주자는, 이명박씨는 공식적으로 존치 의견이며 박근혜씨는 마지노선, 상징적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다. 역시 존치론. 지금은 탈당해서 범여권이지만 손학규씨는 시기상조라고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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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제 올렸던 포스트에서는 헌재의 판결이 치명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다고 썼다.
    (비록, 퇴근의 압박에 시달려 좀 흐지브지 끝났지만)

    2007/07/03   군 가산점 문제,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1 (헌재 판결의 모순)

    어제의 글을 요약해 드리자면 이렇다.
    1. 진정한 법적 평등이란, '같은 것은 같게, 가른 것은 다르게' 이다.
    2. 헌재의 논리에 따를 경우의 문제는,
            가산점을 주면 여성과 장애인 등 군미필자를 차별하는 것이지만,
            가산점을 안주면 군필자를 차별하는 웃기는 결론이 나온다.
    이렇게 헌재의 판결을 분석해 본다면, 헌법재판소의 결론에 대해 한마디로 정의할 수 있게 된다.
    헌법재판소는 틀.렸.다.

    재판의 판결은 보편적으로 인정되는 상식의 범위를 벗어나서는 안된다. 특히 양당사자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판결이라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왜 헌재의 이 판결은 이런 결론이 나온걸까.
    이에 관해서 시사토론의 스타 전원책 변호사가 아주 중요한 말을 한 것이 있다.
    즉, 헌재는 정치적 기관이며, 그 판단은 대법원의 판결과 달리 정치 형성의 과정이라는 말을 했다. 헌법재판소는 정치적 기관이기 때문에 헌법 이외의 다른 법령에는 구애받지 않기 때문에, 굳이 법률적인 검토만을 할 필요는 없다. 물론 헌재의 판단은 헌법과 현행 법의 법률적인 판단이 꼭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법적 판단에 구애받지 않고 사회적, 시대적 요청에 따라 정치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판단의 자유가 이런 결론을 도출했다고 할 수 있다. 전 변호사도 말했지만, 헌재가 이런 판단을 한 것은 당시 IMF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헌재의 판단을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그런 판결이 나올 수 밖에 없었다는 점을 인정하진 않을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취업이 어려워진 상황에서 1점도 아까운 많은 여성/면제자들을 위한 정책이 필요했던 것이다. 남자도 그렇지 않았냐고? 남자들은 군대로 '도망(!!!???)' 갈 수 있었지 않은가?

    자, 이러한 헌법재판소의 상황을 인정하고, IMF라고 하는 특수상황을 벗어난 헌재가 어떤 판단을 하여야 할까에 관한 방향을 잡아보자.


    신성한 의무로서의 군대

    그렇다. 우리가 아무리 부정한다고 해서 국방의 의무의 가치까지 깍아내릴 수는 없다. 국방의 의무라는 것이 신성한 의무라는 것은 인정하고 변하지 않는 정리로서 남겨 두어야 한다.
    이러한 사실을 전제로 두고, 이 문제에 대한 정확한 결론을 찾아야 할 것이다.

    군대가 신성한 의무라면, 이 신성한 의무를 수행하는 영광된 자리(-_-)에 국민 모두가 동참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 중요하다. 신성한 의무이며 자주국방의 기틀로서의 국방의 의무가 가지는 가치를 보전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최소한, 이러한 신성한 의무의 존재를 두고 그러한 의무의 이행에 따른 대가를 무임승차하거나 부당하게 일방적 수혜자가 되는 사람이 양산되는 것을 막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국방의 의무에 대한 그 보상 또는 특혜(?)의 문제를 바라보아야 할 것이다. 이 문제느 단지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징병제나 모병제를 불문하고 모든 경우에 포함된다고 할 것이다.


    추상적 국방의 의무와 구체적 국방의 의무

    국방의 의무는 헌법에 의하여 "모든 국민"이 부담한다. 남자가 아니라 모든 국민이 국방의 의무를 진다. 헌법 제39조는 "모든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바으이 의무를 진다"고 명시하고 있다. 그런데 왜 신체가 건강한 남성만이 군대를 갈까?
    국방의 의무는 추상적 의무와 구체적 의무로 나눌 수 있다. 추상적 의무는 우리나라 국방력의 향상을 위한 일체의 행위를 말한다. 예컨대 국방에 소요되는 세금을 납부하거나 민방위 훈련이 있는 경우 그 훈련과정에 협조하거나, 국방관련 기술의 개발 등등 일체의 행위를 말하며 좀 더 추상적으로는 국민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업무를 성실히 수행하여 국가 안보질서의 유지에 기여하는 것 또한 국방의 의무라고 할 것이다. 이렇게 직접적으로 국방력의 향상이나 군대의 구성에는 참여하지 않으나 간접적으로 이러한 직접적인 국방력 행상에 도움이 되는 일체의 행위가 바로 추상적 국방의의무이다.
    반면 구체적 국방의 의무는 직접적인 병력 형성의 의무를 말한다. 즉, 군대에 가는 것이다.

    헌법상의 국방의 의무는 남녀,건강의차이 등등을 불문하고 모두 지는 것이 맞으나, 그 구성요소인 구체적 국방의 의무는 남자만이 부담한다. 이를 실현한 것이 병역법이다.

    문제는 구체적 국방의 의무를 남자에게만 부여함으로써 남자와 여자의 불평등을 초래하고 있다는 것이다. 여자를 비롯한 병역면제자들은 추상적 국방의 의무만을 이행하지만, 신체가 건강한 남자는 추상적 국방의 의무는 물론 구체적 국방의 의무까지 부담하며 질적, 양적인 불평등이 발생한다.

    물론, 헌법에는 다음과 같은 규정도 있다.

    제34조 ①②(생략)
    ③국가는 여자의 복지와 권익의 향상을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④(생략)
    ⑤신체장애자 및 질병·노령 기타의 사유로 생활능력이 없는 국민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국가의 보호를 받는다.

    제36조 ①(생략)
    ②국가는 모성의 보호를 위하여 노력하여야 한다.

    물론, 여자와 장애인은 국가의 특별한 보호를 받을 권리가 있으며 모성은 보호되어야 한다.
    이것 역시 더 나은 동등한 대우를 위한 산술적 평등이 아닌 법적 평등을 위한 국가의 조치인 것이다.
    하지만, 이것과 국방의 의무는 별개의 문제이다. 또한 국방의 의무를 지지 않는 면제자는 장애인이 아니기도 하고 여자가 아니기도 하다. 또한 국방의 의무가 가지는 신성성은 이 문제와는 별개의 문제가 된다. 극단적으로 표현하면 국방이 무너져 타국의 속국이 되어버린다면, 여성과 모성, 그리고 장애인의 권리는 아무도 지켜주지 못한다. 비록 무관하다고 하긴 했지만, 이러한 국가의 의무와 국민의 권리는 국방의 의무가 성실히 수행되어 국가가 그만한 능력, 자국민을 지킬 수 있는 능력을 가지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이를 위한 국방의 의무가 면제된다고 볼 수는 없다.

    결국 군대의 형성이라고 하는 구체적 의무를 2년여간 신체건강한 남자들이 이행함에 따른 보상을 어떻게 할 것인가의 문제가 바로 이 군 가산점 문제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말하면,

    군면제자들의 국방과 안보에 대한 무임승차나 일방적 수혜자로서의 지위를 향상시켜 군필자들과 동등한 국방의 신성성과 유사한 지위를 누리게 하는 방안.

    이것이 군가산점 문제를 풀어내는 핵심이라고 할 것이다.
    또 다시말하면, 군가산점은 군필자를 위한 혜택일뿐만 아니라, 군면제자들을 위한 혜택이기도 한 것이다.


    군 가산점의 문제를 바라보는 시각의 변화가 필요하다. 가고 싶어도 못가는 군대를 가지 못했다면 그 2년여의 기간동안 다른 일을 준비하여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러나 군대를 가게 되면,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군대는, 헌재의 표현대로 특별한 희생은 아닐지 몰라도, 희생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개별적 보상은 불필요하다고 주장한다면 모르나, 가산점이라는 제도가 면제자들을 부당하게 차별하는 제도가 아니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짐승이하의 취급을 받고, 국방의 의무라고 하는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는 사람은 군바리라고 놀림받고 천대받는 사회에서 그 사람들이 인간으로서, 사회의 일원으로서 인정받기 위한 한 방편으로서 가산점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2년여의 별수롭지 않은 희생이 사회의 어느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아무 것도 아닌 그저 2년이 썩어문드러진 젊은 날의 초상으로 쓸쓸히 위축되는 것은 이 나라와 면제자들에게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가슴에 언젠가는 칼이 될 것이다.



    나는 전거성이라는 별명을 얻은 전원책 변호사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눈꼽만큼도 없다. 전원책이라고 하는 저 사람을 믿지도 않는다. 대표적인 보수적 포퓰리스트다. 과거 영화 [그때 그 사람들]에 관한 법워의 판결에 대한 100분 토론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가관이다. 혼자 흥분하고 쌩쑈한다. 난 이 사람 별로다.
    전원책 변호사가 난리다. KBS 시사토론에 나와 흥분하며 살짝 벗겨진 머리 휘날리면서, 침튀겨가면서 설파하신 공부 좀 하고 나오세요가 지금 난리다 -_-

    군 가산점 문제는 지난 99년 12월 23일 헌법재판소에 의해 위헌으로 결정된 (구)제대군인지원에 관한 법률 제8조제1항 관련 사건에서 부터 시작된다.
    (舊)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
    第8條 (採用試驗의 加點) ①제7조제2항의 규정에 의한 취업보호실시기관이 그 직원을 채용하기 위한 시험을 실시할 경우에 제대군인이 그 채용시험에 응시한 때에는 필기시험의 각 과목별 득점에 각 과목별 만점의 5퍼센트의 범위 안에서 大統領令이 정하는 바에 따라 가산한다. 이 경우 취업보호실시기관이 필기시험을 실시하지 아니한 때에는 그에 갈음하여 실시하는 실기시험·서류전형 또는 면접시험의 득점에 이를 가산한다.
    당시 헌법재판소는 군가산점제도를 여성, 신체장애자 등의 평등권과 공무담임권을 침해한다고 판결하였다. 당시 판결의 주요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4. 가. 제대군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회정책적 지원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사회공동체의 다른 집단에게 동등하게 보장되어야 할 균등한 기회 자체를 박탈하는 것이어서는 아니되는데, 가산점제도는 아무런 재정적 뒷받침없이 제대군인을 지원하려 한 나머지 결과적으로 여성과 장애인 등 이른바 사회적 약자들의 희생을 초래하고 있으며, 각종 국제협약, 실질적 평등 및 사회적 법치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우리 헌법과 이를 구체화하고 있는 전체 법체계 등에 비추어 우리 법체계내에 확고히 정립된 기본질서라고 할 '여성과 장애인에 대한 차별금지와 보호'에도 저촉되므로 정책수단으로서의 적합성과 합리성을 상실한 것이다.

    나. ...........................제대군인에 대한 이러한 혜택을 몇 번이고 아무런 제한없이 부여함으로써 한 사람의 제대군인을 위하여 몇 사람의 비(非)제대군인의 기회가 박탈당할 수 있게 하는 등 차별취급을 통하여 달성하려는 입법목적의 비중에 비하여 차별로 인한 불평등의 효과가 극심하므로 가산점제도는 차별취급의 비례성을 상실하고 있다.

    5. .............................제대군인 지원이라는 입법목적은 예외적으로 능력주의를 제한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가 되지 못하는데도 불구하고 가산점제도는 능력주의에 기초하지 아니하고 성별, '현역복무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로 신체가 건강한가'와 같은 불합리한 기준으로 여성과 장애인 등의 공직취임권을 지나치게 제약하는 것으로서 헌법 제25조에 위배되고, 이로 인하여 청구인들의 공무담임권이 침해된다.

    (출처 : 제대군인지원에관한법률 제8조 제1항 등 위헌확인
                 (전원재판부 1999. 12. 23. 98헌마363))
    보는 바와 같이, 군 가산점이 위헌인 이유는 군대를 가지 않은 자를 부당하게 차별하여 공무담임권을 침해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온 사람은 그것은 차별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것은 차별일까, 아니면 차별이 아닐까?

    우선 우리는 평등과 차별이 무엇인가에 관한 정확한 개념정리를 할 필요가 있다.

    국어사전에 보면, 평등이란, "권리, 의무, 자격 등이 차별 없이 고르고 한결같음"이라고 한다. 차별은,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함"이라고 한다.

    즉, 평등이란,

    "권리, 의무, 자격 등이 둘 이상의 대상을 각각 등급이나 수준 따위의 차이를 두어서 구별하지 않고 한결같음" 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국어사전의 정의는 마치 산술적 평등(또는 절대적 평등)을 이야기 하는 듯하기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이른바, 법적 평등을 정의하는 데에는 뭔가 불안하다. 예를 들면, 달리기를 하는데 있어서 절대적 평등을 위하여 5살짜리 꼬마와 20살 청년을 같은 출발선에서 출발시켜야 하는가에 있어서 이 절대적 평등이 우리가 원하는 바로 그 평등이냐 하는 것이다.

    여기서 이런 평등권에 문제에 있어서 우리가 고려해야 할 것은 바로 법적 평등이다. 이 법적 평등을 앞의 산술적 또는 절대적 평등과 비교하여 상대적 평등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법적 평등이란, '같은 것은 같게, 다른 것은 다르게'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헌법에서 평등권 조항은, 제11조로, "모든 국민은 법 앞에 평등하다. 누구든지 성별·종교 또는 사회적 신분에 의하여 정치적·경제적·사회적·문화적 생활의 모든 영역에 있어서 차별을 받지 아니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차별이란, 기본적으로 2이상의 집단을 자의적(恣意的)인 기준에 의해 부당하게 불평등하게 대우함으로써, 특정집단을 사회적으로 격리시키는 통제 형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차별을 규정짓는 키워드는, 자의적 기준과 부당함이라는 단어이다. 즉, 둘 이상의 집단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이러한 다른 기준이 자의적인 기준으로 부당한 수단과 방법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은 안된다는 것이다. 즉, 남자와 여자의 화장실을 무조건 같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다르게 또 그 숫자와 규모를 다르게 하는 것과 같이 합리적인 기준에 따라 두 개 이상의 집단을 다르게 대우하는 것은 차별이 아니라 실질적으로는 더욱 진화되고 합리적인 평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평등에 관한 좀 더 발전적인 개념정리를 전제로 한다면 군 가산점의 문제에 있어서 좀 더 사회적 합의를 이끌어내기 용이하리라 생각된다. 이러한 개념에서 출발한다면, 군대를 다녀온 사람과 군복무를 하지않은 또는 하지 못한 사람을 동일한 출발점에서 경쟁을 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평등이 아니라 합리적 기준을 통해 실질적인 평등을 실현하는 것이 이 문제를 해결하는 핵심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낼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보자.

    군 가산점이 위헌인가?

    헌법재판소의 논리는, 국방의 의무는 헌법이 부여한 국민의 신성한 의무이므로 이러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는 것이 특별한 희생을 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전제를 두고 있다. ("헌법 제39조 제1항에서 국방의 의무를 국민에게 부과하고 있는 이상 병역법에 따라 군복무를 하는 것은 국민이 마땅히 하여야 할 이른바 신성한 의무를 다 하는 것일 뿐, 그러한 의무를 이행하였다고 하여 이를 특별한 희생으로 보아 일일이 보상하여야 한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므로..")
    하지만, 다른 관점에서 본다면 이러한 인식은 매우 재미있는, 사실은 재미없는 결론에 도달한다.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기 위해서 군대에 2년 갔다온 것은 국민의 신성한 의무라는 것인데, 그러한 의무를 이행한 사람이 특별한 희생을 한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아니, 단순히 할 수 있다가 아니라, 그것은 맞다. 국민의 의무를 이행한다는 것을 특별한 희생이나 손해라고 생각한다면, 국방정책의 근간을 흔들 수 있으므로 이러한 인식은 옳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반대의 입장에서 본다면 전혀 다른 문제를 불러일으킨다.

    국방의 의무가 신성한 의무라면, 그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신성한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것이 자의에 의한 것이건, 아니면 자의에 의하지 않은 것이건,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은 신성한 의무를 이행한 자들이 이루어낸 국방과 안보에 있어서 결론적으로는 무임승차하고 있다고 하는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물론, 그러한 국방의 의무에서 해방(?)되는 것이 자의가 아닌 경우도 있다. 체력적으로, 여자이기 때문에 군대를 가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어떠한 것이든, 안보와 국방상황에 있어서 일방적인 수혜자가 되어버린 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기 때문에 군 가산점은 그러한 신성한 의무를 수행함으로서 타인의 안보와 국방적 현실의 안정감을 도모해 준 자들에 대한 일종의 보상으로서의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이러한 방법을 통해 무임승차자와 2년여의 기간에 의해 뒤쳐진 부분을 보상할 수 있는 실질적 평등의 구현수단이라는 것이다.

    반대로 해석한다면, 오히려, 군 가산점 등(가산점 이외의 지원 정책에 관해서는 논외로 함) 지원이 없다면, 오히려 그것이 실질적인 차별이 이루어지는 황당한 결론이 난다.

    현재의 논리에 따르자면,

    가산점을 주면 여성과 장애인 등 군미필자를 차별하는 것이지만,
    가산점을 안주면 군필자를 차별하는 웃기는 결론이 나온다.


    헌법재판소의 판결이 다수의(어느정도 다수인지 모르지만) 동의와 지지를 받지 못하는 이유는 이러한 모순된 논리를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 2편에서 계속 -

    -_- 퇴근해야지 -_-

    < 헌법 개정시안 발표 >


    총6개 항목의 개헌 시안의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1. 대통령 임기는 4년으로 하되, 연이어 선출되는 경우에 한해 1차 연임 허용.
    2. 대통령 궐위시 후임자 임기는 전임 대통령 임기의 남은 기간으로 하되,
       대통령 궐위시 후임자 선출 방식은 남은 임기가 1년 이상인 경우 직선.
       남은 임기가 1년 미만시 총리가 대행.
    3. 대통령 궐위 여부의 판단을 위해 궐위확인 절차와 주체를 명문화
        - 국무회의의 의결 후, 헌법재판소가 궐위 확인
    4. 현 노무현의 임기를 2008년 2월24일로 명문화
    5. 국회의원/대통령 선거의 실시방안.
        제1안 : 12년2월 대선과 총선을 동시선거. 대통령은 12년3월31일, 국회의원은 2012년2월28일 임기시작.
        제2안 : 12년 1월에 대선, 2월에 총선 실시. 임기는 1안과 같음
        제3안 : 08년 2월 동시선거. 임기는 2월25일 동시에 시작.
    6. 공표후 즉시 시행
    ======================================================================


    1. 연임제 시행

    - 현재의 우리나라 정치체제는 대통령 중심제.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 중에서 어떤 것이 좋은가에 대해서는 학자간의 의견차이가 많다. 따라서 어떤 것이 좋은가의 문제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다. 다만, 현재의 시스템에서는 대통령의 책임정치가 오히려 정국의 안정을 이끌어 내기 쉽다는 장점을 채택하고 있다는 점. 우리나라 처럼 양당제가 확고하지 못하고 허구헌날 여당이건, 야당이건 이합집산을 거듭하는 현실에서는 군소정당의 난립에 따른 정치적 혼란을 막을 수 있는 것이 중요한데, 이를 위해서는 연립내각의 가능성과 국회 해산, 총리(또는 내각의 수반)의 직무 정지가 빈번할 수 있는 의원내각제 보다는 대통령중심제가 좋다고 본다. 현재 우리의 시스템은 대통령제와 의원내각제가 혼합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회는 탄핵 등의 절차를 거쳐 행정 각부의 장관과 국무위원을 불신임할 수 있으나, 대통령에게는 국회해산권이 없다. (이에 따라 야당이 다수당이 될 경우 이를 견제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 부재가 문제되기도 한다)

    문제는 대통령의 연님 또는 중임의 가능성을 인정할 것인다의 문제.

    과저 우리나라의 대통령직에 있었던 자들이 이른바 제왕적 대통령 권한을 행사하던 시기의 역사적 경험 때문에 현행의 헌법에서는 5년 단임제를 채택하고 있다. 과거 박정희, 전두환 같은 작자들의 장난에 놀란 국민들의 염원이었을 뿐 장기집권의 방지를 위한 단임제가 현재에도 의미가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즉,  과거 독재정권에 대한 우려를 제외하면 대통령 연임제 채택을 반대할 이유가 거의 없다고 본다.

    연임의 횟수를 1회에 한정하고는 있지만, 이에 따라 대통령 임기말의 레임덕(lame duck)을 방지할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의 경우 연임을 위하여 임기말 방만한 통치를 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에 단임제에 비하여 정국의 안정은 더 확보할 수 있다.

    연임제 찬성. 다만 1회의 연임에 관해서는 좀더 고려해 봐야 할 듯.

    과저 전두환 당시 7년의 단임제에 비해 1회의 연임시 겨우 1년 늘어난 8년이기 때문에 효과가 어느 정도일지 미지수 라는 것이 이유다. 하지만 반면에 2회의 연임을 인정하는 경우 12년의 장기집권이 가능하기 때문에 문제될 수 있다. 대략 대통령 당선자가 50대 후반 ~ 60대 또는 70대 까지 당선되기도 하기 때문인데, 2회의 연임을 인정하는 경우 권력의 중앙집중이 심해지거나 불의의 사고에 의한 대통령 궐위를 방치하게 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는 점. 좀 더 연구를 요함이다.

    현행 헌법

    • 제70조 대통령의 임기는 5년으로 하며, 중임할 수 없다.





    2. 대통령 궐위

    - 현행 헌법은 다음 과 같이 규정하고 있다.

    제71조 대통령이 궐위되거나 사고로 인하여 직무를 수행할 수 없을 때에는 국무총리, 법률이 정한 국무위원의 순서로 그 권한을 대행한다.

    제68조 ①대통령의 임기가 만료되는 때에는 임기만료 70일 내지 40일전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②대통령이 궐위된 때 또는 대통령 당선자가 사망하거나 판결 기타의 사유로 그 자격을 상실한 때에는 60일 이내에 후임자를 선거한다.

    현행 헌법은 대통령 궐위시 차기 대통령 또는 권한대행자의 임기와 권한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이에 따라 탄핵정국시 고건 당시 대통령 권한대행의 권한 범위가 문제되었던 적이 있다. 이 문제에 대한 명확한 규정이 신설될 필요가 있다.


    가. 1년 이상/이하의 잔여임기에 대해.
    -- 생각건대, 1년 미만의 잔여임기 인가의 여부는 아래 설명할 궐위의 확인이 있는 시점부터 이거나, 궐위의 확인시 그 시점(xxxx년 xx월 xx일 부터 궐위인 것으로 본다)을 명시하는 방안이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세부 절차는 헌법재판소법에서 결정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헌법에서 1년을 기한으로 한정하고 있으므로 이를 변경하는 것이 어려울 수 있다. 예컨대, 1년 1일, 1년 1주일 등 궐위에 의한 잔여임기가 1년 이하와 크게 다를 바 없는 경우에 선거를 반드시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는 헌법사항으로 하지 아니하고 법률사항으로 헌법재판소법 또는 (가칭)대통령의 궐위 확인에 관한 법률 등의 법률을 제정하여 시행하는 것도 한 방법이라고 본다. 즉, 1년 이하의 잔여임기의 경우 총리가 이를 대행하게 하고 법률 또는 헌법에서 대강의 권한 대행 범위를 한정하고, 1년이상의 잔여임기의 경우 필요에 따라 헌법재판소가 잔여임기에 따른 선거 실시여부에 대해 결정하도록 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정리하자면,

    a. 잔여임기가 1년 이하인 경우에는 무조건 총리가 이를 대행하게 함
    b. 잔여임기가 1년 이상이더라도 , 잔여임기가 지나치게 단기이거나
       선거를 치를 수 없는 특단의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헌법재판소가 이를 판단하게 함.


    한가지 추가 하자면, 잔여임기가 1년 이하라고 하더라도, 대통령과 총리가 동시에 궐위될 경우를 대비하여 이 경우 선거를 반드시 실시토록 하는 방안도 고려되어야 한다. (예컨대, 버마 아웅산테러 사건과 같은 사건으로 인해 동시에 궐위될 경우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3. 대통령 궐위여부의 판단

    - 3권분립에 따른 권한 배정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국회 또는 법원이 이를 하는 방안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여소야대의 경우 단순 사실만으로도 국회는 궐위를 확정할 수 있으므로 지나치게 정치적 성향이 강한 국회에 맡긴다는 것은 위험하다고 본다. 대법원이 하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다. (미국의 경우 별개의 헌법재판 수행기관이 없이 대법원이 이를 수행하고 있으므로 미국이라면 그렇게 하겠지) 하지만, 법률적 심사기관인 대법원은 법의 범위를 넘어설 수 없으므로 정치적인 판단을 함께 하여야 하는 문제에 소극적일 수 밖에 없다. 사법부가 담당한다면 지나치게 경직된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우리나라의 경우 헌법재판소가 존재하고 위헌법률 심판 이외에도 헌법소원, 탄핵, 권한쟁의, 위헌정당심판 등의 업무를 담당하며 그 성격 역시 정치적인 기관이라고 할 수 있다. 헌법재판소가 이러한 임무를 담당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본다.

    현행헌법에서는 궐위여부의 판단에 관한 규정을 두고 있지 않다.


    4. 노무현 대통령 임기 제한
    - 이건 당연한 것이니 패스

    5. 대통령/국회의원선거의 시기와 임기
    - 이 문제는 어떻게 되든 상간 없다고 생각한다. 노 코멘트. 단순 입법기술상의 문제 또는 정치적 합의의 문제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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