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형규 목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Posted 2007. 7. 26. 09:47
배형규 목사님의 명복을 빕니다.

선배, 너무 일찍 가네.


엄마, 이모, 고모, 숙모님들

Posted 2007. 7. 25. 15:52
< 미니스커트의 진실 >

딸들 옷은 그만 사시고,
여러분이 입으실 옷을 사세요 -_-

딸내미들은 지들이 벌어서 사입게 하세요. 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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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컷뉴스에서 가져온 사진인데, 경인일보에서 지들도 가져온 사진


기사에서는,
롯데백화점측은 젊어 보이려는 여성의 욕구가 연령대별로 옷차림을 구분하지 않는 ‘크로스 에이지’ 트렌드로 나타나면서 40대의 미니스커트 구매비중이 증가한 것으로 분석했다.
라고 하지만,

내가 판단하기에는 "40대 엄마를 둔 10대 딸내미가 미니스커트 사면서 엄마를 달달달 볶아서 엄마가 울며 겨자먹기로 카드로 긁어버린 가족미스테리 경제 드라마"로 보인다.

혹은,

요즘 젊은 아가씨들에게 무릎 위 10cm 미니스커트 사이즈라면, 40대 어른들에게는 '무릎을 살짝 덮는 보통의 스커트'가 될 정도로 요즘 아가씨들 쭉쭉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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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워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Posted 2007. 7. 25. 11:52
디워가 뜨겁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자면 디워는 몇년간 뜨거웠다. 물론 미지근했던 적도 있지만.

심형래 감독의 디-워(D-War)가 드디어 개봉한다.
디워에 관한 기사가 언론에 처음 등장한 것이 2003년 2월경이었으니, (네이버 뉴스 검색) 거의 4년반만에 빛을 보게 되는 것이다. (머니투데이의 기사에 따르면, 99년 11월 부터 프리프로덕션 작업을 해왔다면, 최초 기획단계부터라면 거의 10여년을 준비한 영화인 셈이다. 조이뉴스의 기사에서도 2005년에 이미 5년의 기획, 제작이라고 하고 있다)

재미있는 것은, 그 기간동안 이 만큼 주목 받은 영화나 감독도 드믈었음은 물론, 이렇게 개봉일에 대한 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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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고 개봉가능성에 대해 논란이 많았던 영화도 거의 없었다는 점이다. 2003년의 기사에 따르면 2004년 개봉을 목표로 한다고 하다가, 2006년 1월까지도 90%의 제작이 완료되었다고 하다가, 끝내는 2006년의 개봉을 다시 2007년으로 미루고 이제서야 겨우 개봉하게 된 것이다.

그 기간동안에 심형래는 사기꾼으로 몰리기도 하고 각종의 고소고발을 맞이하기도 하며 디워에 버금가는 심워(Shim-War)를 격었다. 영화가 개봉하기도 전부터 수많은 안티팬을 확보하는 기염을 토했고(?), 잘나가지는 못하고 방문자수만 많았던 홈페이지는 더이상 올릴 관련 기사가 줄어들고 안티가 늘어나자 임시폐쇄 → 다음 카페 개설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촌극을 벌이기도 했다(이 부분에서는 의견이 분분할 지 모르지만, 자그마치 700억이나 들여 제작했다는 영화의 홍보 사이트를 독립 도메인이 아닌 포털의 카페로 운영했다는 사실은 정말 한심한 작태에 불과하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지금도 디워에 대한 찬/반 양론은 분분하다. 나 역시 초기에는 디워와 심형래를 지지하는 입장이었다가, 얼마간은 디워와 심형래의 안티로 돌아서 영화가 나오기만 해봐라 하는 심정으로 눈에 불을 켜고 있었던 것이 작년 말 까지이고, 지금은 충혈된 눈에 힘주기도 심심해서 우선 영화나 보고 말하자는 수준이니 말이다.

디워에 대한 찬반 양론의 대체적인 주장을 보면,

찬성하는 쪽에서는 대한민국 영화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점을 높이 사고 있다. 영구와 공룡쭈쭈를 시작으로 괴수, 공룡영화에 매진해온 심형래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고 있다. 더불어 그와 함께 발전한 대한민국 CG 기술의 성장을 무시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일각에서는 디워의 스토리라인이 단조롭고 그다지 흥미없는 소재라고 폄하하고는 있지만, 한국적 소재인 이무기를 등장시켜 세계시장을 공략했다는 것과, 상업성이 강한 단순 오락영화에서 정비된 스토리라인을 추구하는 것이 어불성설이라는 의견이다. 이러한 점은 역시 스토리라인 단순하고 허무하기로 유명한 트랜스포머에 비교되기도 한다. 스토리라인 엉성한 트랜스포머의 범블비엔 열광하며 스토리를 넘어선 그래픽과 재미라고 극찬하면서 디워에서는 더 탄탄한 스토리를 원하는 것은 외국 영화에 대한 일종의 사대주의에 불과하다는 주장이다(이점에 대해서는 충분히 일리있는 주장이다.).

반면 반대의 목소리도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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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심형래의 약속을 중시하는 입장이다(솔직히 나도 이런 입장이었다). 2004년 개봉부터 기다려왔다는 것이다. 매번 인터뷰마다 90%정도라고말은 많이 들었지만, 항상 다음으로 연기, 연기, 연기 였다. 정말 사기꾼 소리가 나올만도 했다. 그점은 누구도 부인 못한다. 두번째 의견은 그것이 과연 한국영화인가 하는 점이다. 그 수많은 돈을 들여 한국적 스토리로, 한국의 감독이 만들었지만, 나머지는? 나머지는 모두 외국의 스텝과 배우다. 솔직히 거기에 들여간 우리 기술이 얼마정도인지 알 수가 없다. 심지어는 엔딩에 들어간 아리랑 조차 외국인인 음악감독이 넣은 것이라면 말할 필요 없지 않을까?(물론 심형래가 이 음악을 넣었을 것이라고 확신하지만, 이무기와 아리랑이 무슨 관계인지 전혀 알 수 없다. 솔직히 민족성 자극해서 영화관에 한 명이라도 더 들여보내려 하는 얄팍한 상술 아닌가 하는 의심이 더 많이 간다) 최고수준이라는 CG에 대해서도 말이 없을 수 없다. 최고인지 모르지만, 그 기간과 그 돈이면 저 수준은 나와줘야 한다는 말이다. 또 그다지 CG가 다른 외국 SF영화에 비해 엄청난 것이라고 하기에도 모자란다는 의견도 있다. 마지막으로는 아까 찬성론의 입장에서 밝힌 바와 같이, 스토리다. 어설픈 스토리와 쌩뚱맞은 조선시대 씬은 없느니만 못하다는 주장.


디워의 개봉은 우리 영화사에 한 족적을 남길 것은 확실하다. 이는 부인할 수 없다.

충무로에서는 타인으로 찍혀버린 심형래. 한때는 대한민국 최고의 코메디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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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형래는 여배우에게서 손 떼라! -_-+

으로 대통령을 능가하는 최고의 인기를 가졌던 사람. 이주일을 능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사람. 당장 대통령 선거에 나와도 당선될 수 있다는 말까지 나왔던(아쉽게도, 이 말은 15세 이하의 어린이들이 선거권이 없기 때문에 그냥 농담이었다. 15세 이하 어린이에게 선거권이 있었다면, 아마도 100% 확실했을 것이다) 코메디계의 최고 블루칩. 그런 그가 사활을 걸고 달려들었던 영화이니 비공식적으로는 대한민국 최고의 흥행을 기록했다고 할 수 있는 우뢰매와 영구 시리즈를 탄생시켰던 심형래 였으니, 이 사람이 충무로에 제대로 들어갔다면, 디워는 지금보다는 더 좋은 평판으로 우리와 만났을지도 모른다.

충무로의 패거리문화(사실 그것이 충무로 뿐이겠는가? 대한체육회와 한국체대를 중심으로한 한국의 스포츠계와 니술, 음악은 물론이요 사회의 대부분의 분야에서 패거리문화로 점철된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겠지)에 희생당한 충무로의 사생아 심형래. 이것도 어쩌면 우리가 디워를 꼭 봐야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SF는 안된다는 고질적인 패배의식을 깨는데에도 우리는 심형래가 필요한 것이 사실이다. 겨우 우뢰매나 보고 자랐던 대한민국의 어린이들이 심형래 덕분에 그래도 우리도 이런 영화가 있다고 말할 수 있게되는 원년이 올해가 되어야 하는 시대적 요청이 이 영화를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한때 아시아 전체 영화시장의 최고를 달리다가 한 순간에 몰락하고(아마도 그것은 애마부인과 뽕으로 시작되는 찬란한 sex영화들의 등장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쉬리를 통해 부활해 괴물까지 달려왔지만, 여전히 지지부진한 한국 영화시장의 새로운 블루오션으로서 우리는 디워를 주목해야 한다. 언제까지 옵티머스 프라임이나 보고 있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이번 디워의 흥행 예감이니, 하는 목소리들이 걱정도 되고, 기대가 되기도 한다.
디워가 가지는 영화적 흥행성과 수준보다는 디워가 가지는 대한민국 영화사적(英畵史的) 의미와 충무로에서 쫒겨난 심형래의(사실, 그가 우뢰매 가면을 쓰거나, 머리에 기계충 자국을 번쩍이며 충무로를 다닐 때는 최고의 흥행카드이기도 했다) 재기라고 하는 대한민국 패거리문화의 타파라고 하는 시대사적 의미에 있어서 디워에 대한 평가는 냉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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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보니 다리가 매우 짧;;

디워가 훌륭한 영화냐 아니냐는 우선 보고나서 논해야 할 것이다.

대한민국 최초, 최고로서의 의미가 아니라, 고구려 이후 용이 되어보지 못한 대한민국이라는 거대한 이무기가 가지는, 그 이무기가 용으로 승천하기 위해 필요한 여의주가 무엇인지, 그것을 디워는 알게 해 줄지도 모른다.

디워에 대해 거창하게 많은 기대를 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어찌 보면 겨우 영화 한편에) 걱정도 살짝 있지만, 우리가 경험했던 바 처럼 영구와 땡칠이가 한국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엄청나다. 심형래의 띠리리~ 하는 바보짓이 한국사회에 끼친 영향은 서태지에도 뒤지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나는 디워를 볼 것이다.

하지만, 디워를 단순하게 보고만 있지는 못할 것 같다.



덧) 아래 bean님의 덧글에서 디워는 SF영화가 아니다라는 주장이 엿보인다.

글세, 난 디워를 SF라고 보는데, 아닌 사람도 있나보다. 굳이 SF영화가 확실하다고 주장하고 싶지는 않다.

그건 나에겐 아무래도 상관없으니까. SF영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면, 뭐, 그렇게 볼수도 있겠군요.

하지만,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는 건데요. 이런 놈(SF영화라고 생각하는 놈)......................................................있어요.


덧) 위의 디워 아리랑이라고 하는 음악은, 인터넷에서 돌고 있는 디워 엔딩동영상이라는 것에서 음악만 집어낸 것이다. 그런데, 원래 있던 음악이라고 하네. 어쩐지,,,,

디워 아리랑이 아니라, 그냥 아리랑.

아무튼, 디워에서는 엔딩에 아리랑이 들어갔다고 한다.

한국 기독교가 평양대부흥 100년을 맞이하는 해 2007년.
지금 기독교계가 최대 위기를 맞고 있다.

그 한 축에는 이랜드가 있고, 다른 한 축에는 샘물교회가 있다.
한국 기독교가 개독교라는 결코 자랑스럽지 못한 이름으로 불리운 것도 하루 이틀이 아니지만, 이 두가지 사건을 계기로 한국 기독교는 지금 거의 지금 빈사상태다.

왜, 이 나라에서는 기독교가 고 따위의 대접을 받고 있으며,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1. 이랜드 사태.

이랜드 사태는 어쩌면, 아니 확실히 예견된 것이었다. 그 문제야 당연히 현행 노동법의 지리멸렬한 타협의 산물도 못되는 한심한 작태라는 것은 부인하지 못한다. 이번엔 이랜드지만, 다음엔 어디가 될지 모르는 현실일 뿐이다.

근데 왜 이랜드이고, 왜 기독교일까?

이랜드는 창업초기부터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경영을 모토로 시작된 기업이다. 탈세를 하지 않고, 아침마다 기도회가 열리는 그런 기업이었고, 초기에만해도 많은 기독교인들이 몰렸던 이른바 '건전한' 기업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성공하기 어렵다는 주장이 많았지만, 신원에벤에셀과 함께 가장 성공한 기독교 기업으로 인정받아왔다.

의류업에서 시작해서, 의류업의 위기를 유통업으로 돌려 뉴코아와 홈에버, 아웃렛과 김스클럽(이걸 왜 킴스클럽이라고 하는지 이해가 안된다)까지 장악해서 유통관련 자회사가 오히려 더 탄탄해진 회사다.

이랜드는 창업초기부터 사원에 대한 은근하고 강압적인 기독교 전도로 악명이 높았다. 하지만, 이런 회사 분위기는 회사의 창업이념 자체가 기독교 정신이었다는 점에서 거의 문제되지 않았고, 그 안에서 부터 속이 썩어가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다.

차라리 이랜드가 기독교 정신을 표방하지 않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회사의 이념이 나눔과 바름, 자람과 섬김이라고는 하지만, 나눔은 있으되 밖과 나누지 않고, 바름은 있으되 자신에 대해서만 바르며, 자람은 있으되 같이 성장하지 못하고, 섬김은 있으되 그것은 복종과 굴욕으로 표현되고 말았다. 가난한 자들과 나누고, 어려운 자들과 나누는 이랜드는 없고, 바르지 못함을 바름으로 정의해 버린 편협한 기독교적이지 못한 바름만이 있고, 자라다 못해 웃자라 버린 천민자본주의적인 성장만이 존재한다. 섬김은 계층간의 복종과 지배로만 나타날 뿐 그것이 섬김이라고 할 만한 아무 것도 없다.

예수는 위에 있는 자들, 지도자들의 섬김을 강조했다.
예수 스스로가 자신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다고 선언 했으며, 교회 지도자의 사회 지도자의 섬김을 강조했지만, 이랜드는 자신의 가족들 마저도 섬기지 못하는 반쪽짜리 기독교 회사로 전락해 버렸다.



2. 샘물교회 사태

샘물 교회는, 이전까지는 가장 대표적인 한국교회의 청사진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사실이다.
한국 교회중에서 가장 존경받는 교회인 서울영동교회의 담임목사를 역임했던 박은조 목사가, 신도가 증가하면 성장을 위한 교회확장이 아닌 분리 개척한다는 서울영동교회의 정책에 따라 1998년에 설립된 교회다.

샘물교회는 교회비리에 관한 시사 프로에서 가장 이상적인 모습의 한국교회로 서울영동교회와 함께 소개되던 가장 건실한 교회였고, 이러한 사실은 지금도 변함 없이 사실이다.

세금이 부과되지 않는 교회이지만, 세금을 내고 있는 몇 되지 않는 교회이며,

교회를 크게 짖는 것 보다는 교인의 수를 줄여 분리 독립 시켜 작은 교회를 지향하고,
한국 교회가 겨우 3%의 수입을 구제를 위해 사용할 때 절반이 넘는 수익을 구제를 위해 사용하는 교회이고
담임목사는 물론이요, 교회의 청소를 담당하는 분까지 모든 교직자의 임금을 단일화 하여 가족 수에 따른 추가수당만을 받는 교회다.

가장 보수적이라는 고려신학회 소속으로 일제시대때는 교리에 따라 신사참배를 거부한 유일한 교단이기도 하다.


지금 한국교회의 위기는, 이러한 샘물교회가 사회의 지탄을 받는 악마의 자식이 되어버렸다는 점이다.

샘물교회가 물러서면, 더 이상 한국에서 기독교가 설자리는 없는 것이나 다름 없다.

물론, 그들의 신앙에 따라 그들의 신념에 따라 행동한 것을 탓하는 것이 어느 정도까지 문제인지 아직 확신할 수 없지만,

평양대부흥 100년을 맞이하는 이 때에 이렇게 한국 교회가 위기를 맞이했다는 사실은 매우 의미가 크다.


그동안의 한국교회의 고질적인 문제는 연말에 당연하게도 대선과 연결될 것임이 뻔하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한국 기독교는 불교와 천주교에 밀려 사그러질 위험에 있다.




어쩌면,

그래도 희망적인 무교회주의의 부활을 꿈꿔야 할 지도 모를 것이다.




오늘중에

Posted 2007. 7. 24. 10:00
10만명을 돌파할 것이라는 강렬한 예감 -_-
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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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찌하오리까

Posted 2007. 7. 13. 18:00
도대체 하루에 3000명이 넘는 이 방문자를 대체 어찌하오리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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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어? -_-


주말에는 포스트가 없으니 좀 덜 오겠지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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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가수 이안이 각종 포털 사이트의 검색어 순위 1위에 올랐다. 신문을 보니, 이번이 처음은 아니라고 한다. 이미 뮤직비디오에서 민감한 문제를 다뤘던 것으로 한번 화제가 된 적이 있었고(미선,효순 사건과 신용불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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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_- 이건 뭐...

자, 성폭력 관련 뮤직비디오 였다고 한다), 또 성형에 관한 거침없는 발언(성형 찬성 및 코 수술 고백)으로 인구에 회자 되었던가 보다.

이번 1위 등극(?)에는 전거성이라는 별명으로 스타가 되었던전원책 변호사와의 한판의 힘이었다. 지난 12일 EBS의 생방송 토론카페에서 전 변호사에게 막말(?0을 했다가 한파 거하게 깨지고는 이를 본 네티즌들에게 화려한 돌림빵(?)을 당하시고 계시다. 불행히도, 가수 이안은 현재 잠적중이시란다.

전원책 변호사가 이래저래 요즘 뜬다. 이러다가 다음 총선에서 한나라당 공천 받고 나오시지 않을까 한다(전원책 변호사는 보수 중에서도 제대로 된 보수에 가깝다).  사실 난 전 변호사의 기본적 성향을 별로 좋아하진 않는다. 그 생각이나 사상이 원조 보수 김용갑에 가깝고 조갑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으니, 나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든 사람이다. 게다가 토론을 할 때의 자세도 그다지 바람직하지 않은 태도를 가지고 있다. 공부 좀 하고 나오라는 발언이나, 뭘 모르면서 까분다는 식의 태도는 바람직한 토론 태도는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예를 들어보세요 하면서 전체와 부분을 오가는 호통식 물타기도 그다지 옳지는 않다.

이번 이안 사태는 이안이, 전 변호사의 가족사를 들췄던 것을 계기로 일어났다. 아직 자식이 없다는 전 변호사에게 이안이 듣기 싫은(매우!) 말을 했고 이에 전 변화가 심한 불쾌감을 드러냈다.<동영상보기>

왜 항상 전원책 변호사가 가는 곳엔 논란이 있을까?

나는 이번 사태 역시 50%의 책임은 그에게 있다고 생각한다(지난번 시사토론에서의 문제 역시 전 변호사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이번처럼 50%는 아닌 것 같다). 사실 전 변호사는 알만한 사람은 대충 아는 골수 보수 인사로, 여성과 페미니즘에 병적인 안티다. 게다가 저 호통치는 토론 자세는 예전부터 전 변호사의 트레이드 마크로 유명하다. 상대방을 호통치며 가르치려고 하는 자세 때문에 전문 토론 패널들 사이에서는 꺼려지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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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게 꼬나보는 전 변호사

이번 전원책 변호사의 토론 참가 역시 주제가 "알파걸, 남성을 넘어서는 여성인가?" 였다. 전 변호사 처럼 강성의 남성(약간)우월론자와 페미니스트(특시 두 글자의 성을 쓰는)를 붙여 놓으면 불꽃튀는 설전을 볼 수 있는 기회인 것은 확실하다. 아마도 EBS의 치졸한 술수이겠지. 이미 방송가에서는 토론 부적격자로 이름난 전원책 변호사와 그저 말만 많은(이건 순전히 내 생각이다. 좀 개념 없다고 생각되는 페미니스트다) 오한숙희씨를 붙여놓았으니 제대로 된 토론이 될리가 있나.

게다가 논란에 중심에서 별 근거도 없는 미천한 논리력으로 주목이나 받고 사는 이안이라는 좀 덜떨어진 가수 하나 올려놓으니 얘기가 되질 않는다. 게다가 전문서 있는 토론을 그나마 장점으로 가지고 있는 전원책에게 전문성 떨어지는 패널들과 대화하게 하니 이건 중구난방이라는 것 밖에 안된다. (에스콰이어 편집장에 대해서는 말할 가치도 못느낀다. 에스콰이어라는 잡지 자체가 내가 볼 땐 찌라시 쓰레기인데 뭘 바라겠는가?)

이번 토론에서 잘 보면, 웃기게도 널리 알려진 동영상을 제외하면 전원책 변호사의 막말도 가관이다. 해당 프로그램의 홈페이지에서 전문을 제공하고 있다. 거기서 몇개 따와 봤다.

  • 세계적인 철학가, 음악가, 시인, 화가 이런 사람들 중에 정말 많은 사고를 하고 깊이 사색하는 사람들 중에 여성이 단 한 명이라도 있습니까?
  • 그러면 남자는 집에서 아기 키우고? 그게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대단히 바람직하지 않죠.
  • 남자가 노동을 하고 여자가 출산하고 육아를 하는 것은 그건 보편적인 태양양식입
    니다.

이 정도면, 대략 이 남자의 머리 속을 알 수 있다. 이 사람, 전통적인 성역할에 고착되어있는 사람이다. 게다가 중간중간에 자시하게 읽다보면, 황당하기도 하다.

필요에 따라서는 현실의 문제, 필요에 따라서는 보편성의 문제, 필요에 따라서는 디테일한 부분을 잡고 늘어지는 특유의 중구난방식, 백화점식 나열에 열을 올린다. 그다지 보기 좋지 않다.(자세한 내용으로 잘 쓰여진 글이 있다. 클릭)

물론 이에 대한 이안의 태도는 더 나쁘다. 그건 이미 말할 가치도 없다. 사회자의 무능력을 논하는 것도 지칠 정도다. 하기 싫은 거다.



사실 이 글은 전원책 변호사를 뭐라 하고 싶어서 쓰는 글은 아니다.

사실 내가 비판하고자 하는 것은 EBS의 파렴히찬 패널 구성이다.
이미 그들의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토론이 될 것이라 예상했겠지만, 전원책은 재미있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싸움꾼이다. 스스로 논쟁의 중심에 서길 좋아하는 토론꾼에 불과하다. 그가 준비도 많이 하고, 말도 잘하는 것 같지만, 그의 발언은 상대 깍아내리기 이외에는 그다지 많은 내용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제발 공부좀 하자거나, 제발 스웨덴 얘기는 하지 말라거나.

EBS에서 준비도 덜 된 패널과 이안이라는 개념없는 가수 끌어들여 토론 한다고 해서 될 것도 아니다. 여기 나온 사람들 보면, 소위 겉멋만 들었거나, 스스로 논쟁의 중심에서 주목 받고 싶어 안달나 있는 사람들만 모아놓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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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도 없고, 웃기지도 않고..... EBS의 토론 주제선정은 괴팍해 보인다.


제발 이런 캐쥬얼한 토론은 사라졌으면 좋겠다.

또 이 개념없는 패널들 떠는 것 가지고 남녀평등이 어쩌고 하는 소리도 더 안 들었으면 좋겠다.


니들만 조용해도 충분히 남녀 평등이 이루어진다.
 

2탄? 아니면 재탕

Posted 2007. 7. 13. 09:42

재작년인가, 인도의 한 동영상이 화재가 된 적이 있다.

prabhu deva라는 (어떻게 읽나? -_-; ) 인도의 한 가수가 부른 노래의 뮤직비디오인데, 대략 난감한 구성과 간드러지다가 아주 그냥 죽어버릴 것 같은 여성 보컬의 음색 때문에, 그리고 영혼을 주무르는 그의 안무 -_-

오늘 우연히 그 동영상을 다시 보게 되었는데,
이거, 약간 다른 것 같다. 당시에 돌았던 뮤직비디오가 아닌 것 같다.
전체적인 구성이나 음악은 같은데, 약간 다시 만들지 않았을까 한다. 몇 장면은 내가 본 적이 없는 장면이다.

아무튼, 금세기에 다시 보기 어려운 뮤직비디오다. 입 다물고, 감상하자~




참고로, prabhu deva라는 가수는  1973년 생이며 가수이면서 영화감독 겸 배우는 물론 아누까지 하는 사람이다. 인도에서는 거의 마이클 잭슨 급으로 불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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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략... 이런 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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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의 같기道

Posted 2007. 7. 12. 16:37
청와대가 선관위에 공개질의를 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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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웃찾사하고 개콘 안 빼먹고 보는 무현이 형



무현이형이, 요즘 조용히 있었더니(뭐 그다지 조용한 사람 아니라는거 다 알잖냐?), 입이 근질근질 하고 못살겠는지, 아니면, 남들은 막 떠드는데, 자기 한테만 조용하라고 해서 삐져서는 입이 석자나 삐져나왔는데, 선관위라고, 요즘 반장행세 하는 놈이 자꾸 뭐라하니까 알았다고 입 닥치고 있으면 될거 아니냐고 하면 될것을, 말 할 때마다 물어본다고, 해도 될 말인지 알려달라고 아주 초딩 처럼, 또는 아주 여우 처럼 그러더니, 진짜 그랬다.

사실 뭐 무현이 형은 잘못한거 별로 없다. 내가 원래 그 무현이 형을 좀 좋아해서 하는 말인데( -_- 노골적이다),
사실, 그 형이 아주 없는 말 하고 그러는거 아니거든.

누가 자꾸 무현이 형한테 막말 한다고, 지난 학기, 아니, 그 전 학기 까지 맨날 반장은 도맡아서 하던 오른쪽 부자 동네 한나라아파트 사는 애들이 뭐라 그러는데, 사실 그거 무현이 형이 대학을 못나와서가 아니고, 니들 같은 꼴통 색휘들 모자란 머리에 쏙쏙 들어가게 해 주는 쪽집게 인기강사 스타일 이라고 아무리 강조해도 듣지를 않으니 원......................... -_-

아무튼, 무현이 형이 요즘 좀 섭섭했나보다. 맨날 다음 학기 반장 출마하는 애들만 가지고 거시기 하니까 좀 섭섭했나보다. 아직 6개월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오늘 드뎌 한 껀 해 주셨는데, 이거 아주 근사하다. 아니, 아주 여우다 여우.
그동안 유치원 못나왔다고 유치원 나온 반장이 되어야 했다고 막 거시기 해서 난 또 무현이형이 아주 순딩이 바보인줄 알았는데, 이거 완전 여우다.

이건 뭐.......... 얼마전에, 웃찾사에 귀여워에 나오는 현정 언니 처럼 명박이 한테 대놓고 '건방지다~!' 하더만, 이번에는 같기道다. 같기道.

이건 선거법을 위반 한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명박이 까는 건 저번이랑 똑같은데, 이렇게 말 할라치니까 이거 해도돼? 하고 물어보는데, 이건 말한 것도 아니고, 안한 것도 아니다. 아주 그냥 환장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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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처럼 브이질을 하고 있는 무현이 형



< 무현이 형이 말을 하려고 했는데, 나도 모르겠다고 선관위가 배째라고 해서 안 한다고 한 말인데 해버린 말(?) >

발언이 문제가 된다면 전체가 문제되는 것인지 일부가 문제되는 것인지, 일부 문장이 문제라면 그 표현이 문제인지 내용이 문제인지, 무엇이 위법인지 구체적으로 적시해주기 바랍니다.

요거는 좀 초딩 같았다. 풋



그런거 있잖아.

내가 언제? 언제? 언제? 몇월 며칠, 몇시, 몇분에???

하는거.

꼭 그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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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찍는가봐~ 영화~ 구경만 할께~ 구경만~!!!! 무현이형 다음엔 이것도 좀 봐 줘요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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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 전 과거사의 모습 - 전여옥

Posted 2007. 7. 12. 14: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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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여옥 의원 홈페이지


만일 20여년 전이 ‘과거사’라고 한다면
이땅의 청렴한 대다수의 공무원들을
모독하는 일이다.
명예롭게 공직에  머무르기 위해
그들은 평생 주변을 정돈하고
적은 수입으로 평생을 지냈다.  
남들 다 하는 아이들 과외도
시키지 못하면서 사교육위주의 현실속에서
고뇌하는 가장으로서 수많은 유혹도 견뎠다.
적어도 ‘영예로운 공직자’가 지켜야 될
지극히 기본적인 자세라는
공직자로서 상식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고위공직자로서
OOO OOO는 스스로 물러나야 옳다.  
공직에 봉사하며 절제와 검소한 삶을 산
수많은 중하위 공직자들의 온전한 삶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는 반드시 지켜야 옳기 때문이다.
<원문보기>

-------------------


이 글은

2005년 3월 4일 한나라당의 전여옥 당시 대변인이 쓴 글이다.

오늘,

전여옥 의원은 17년 전 위장전입을 했던 이명박씨를 공개지지 한다고 선언했다.
< 기사 보기 >



< 전여옥 의원 홈페이지 원문 캡쳐 화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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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오후는 간만에 조갑제의 갑작스런 등장 덕에 각 포털이 뒤집어지기 시작했다. 동아일보의 기자가 찾아낸(?) 갑제씨 홈페이지의 글이 오늘 오후의 정치관련 화두로 등장했다.

조갑제 같은 인물은 어느 시대에나 존재해 왔던 것은 사실이지만, 누구의 말 처럼 이런 사람을 어떻게 대해야 할 것인가에 관해서는 너무 민감한 것은 아닌가 하고 가끔 우리 스스로에게 질문할 필요는 있어보인다. 진중권 교수는 지만원씨에 대해 한 말이지만, 이런 사람들에 대해 그저 '노인복지의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 역시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논외 이지만, 최근 지만원씨가 2007년 대선 예비후보로 등록했다. 소속 정당은 시스템미래당)

아무튼, 오늘은 동아일보도 그다지 조갑제의 편은 아닌 것 같다. 같은 보수로서 평생을 같이 할 것 같았던 지만원씨와도 결별한지 오래인 조갑제씨의 불쌍하고 힘 없는 행보가 조금 안쓰럽긴 하지만, 이런 점에서 우리 복지 예산의 늘려야 한다는 필요성은 강하게 느껴진다. 한나라당은 왜 복지 예산을 자꾸 줄이려는 것일까?

문제의 글의 제목은 위의 링크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왜 富者가 가난한 사람보다 더 도덕적인가?" 이다. 사실, 이 제목을 봤을 때만 해도 별로 이에 대한 말을 아끼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다. 워낙 많은 사람이 비판할 것이 뻔하고, 또 조갑제라는 사람의 글은 전형적인 저널리즘도 아닌, 일종의 선동적 언어로 가득찬 글이라서 반박이나 논평을 위한 근거도 미약하고, 그다지 선호하지 않기 때문이다.(사족을 좀 달자면, 조갑제의 글은 대입을 준비하는 수험생에게는 추천하기 매우 곤란한 글이다. 논술로서의 기본적인 요건을 거의 무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흥분한 군중을 향한 호통이 대부분인데 뭘 읽는단 말인가?)

조갑제의 글을 오래간만에 읽은 이유는 글의 첫머리 때문이었다. "예수는 위대한 시장경제론자". 나름 30년 넘게 교회를 다녔고 친가 외가 모두 교회에서 잔뼈가 굵은 집안의 후예(?)로서 매년 선거때만 되면 되살아나던 반공과 시장경제에 앞선 기독교 꼬드겨 표 끌어내는 작태가 아닌가 싶어 자세히 읽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 인구의 20%를 차지하는 기독교인들의 반공과 시장경제에 대한 왜곡된 충성심만 모아도 충분히 승산있는 것이 김영삼 이후의 우리 선거 풍토가 아니던가.

각설하고,

조갑제씨의 논리는 이러하다.

  1. 부자는 우선 성실하고 부지런하고 신뢰성이 강하므로 부자가 되었다.
  2. 가난한 사람은 대체로 게으르고 무책임하며 신용이 떨어진다.
  3. 정상적으로 돈을 벌고 좋은 곳에 그 돈을 쓰는 것이 가장 큰 도덕이다.
  4. 따라서 부자가 더 도덕적이다.
사실, 이 글에서 볼 수 있는 조갑제 나름의 논리는 마지막 10여줄이 대부분이다. 상당부분은 예수의 에피소드를 인용하여 그에 대한 이야기만을 쏟아내고 있는데, 그다지 읽을만한 내용은 아니다. 조갑제씨가 인용하고 있는 성경의 구절은 이른바 '달란트의 비유'라고 불리는 것이다. 이에 대한 내용은 링크로 대신하기로 한다.

예수의 가르침을 보면 비유로 이루어진 것이 대부분이다. 이에 대한 해석은 여러가지가 있는데, 일반적인 해석에 의하면, 당시 로마는 유대인의 독립운동을 강하게 탄압하고 있었고, 독립운동가로 분류되던 예수는 이에 대한 박해를 피하고자 비유로서 설명하는 경우가 많았다고도 하고, 또 일각에서는 사람들로 하여금 비유에 대해 다양한 해석을 내릴 수 있도록 함으로서 자율적인 신앙을 싹트게 함이었다고도 한다.

아무튼, 이 열달란트의 비유에 대한 해석은 다양하지만, 일반적인 해석은 다음과 같다.

즉, 신은 사람들에게 다양한 능력을 주셨는데(달란트는 돈을 세는 단위이며, 후에 탤런트의 어원이 되었다), 예수의 재림이 있기전, 이 능력과 은사를 충분히 활용하여 기독교를 전파하고 많은 결실을 얻을 수 있도록 노력하라는 내용이라고 한다. 즉, 이 비유의 핵심은, "하나님께 능력과 은사를 충분히 받은 사람들의 책임"에 관한 내용이다.

그런데, 조갑제씨는 이상한 논리로 이에 대한 다른 해석을 내고 있다.
그는 이 비유를 자본주의 윤리의 핵심이라는 전제로 다음과 같은 해석을 제시한다.

  1. 예수는 商행위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이자를 받는 행위도 부정하지 않는다.
  2. 예수는 공짜심리를 대단히 경멸한다.
  3. 예수는 자본주의의 큰 동력인 모험을 찬양한다.
  4. 예수는 게으른 것을 惡으로 본다. 무능과 무지를 無産계급의 미덕으로 선전하는 공산주의자들의 억지를 정면으로 부정한다.
  5. 예수는 열심히 잘 하는 사람을 집중적으로 지원해야 한다는 효율의 논리에 충실하다.
  6. 예수는 악하고 게으른 자들이 인류 문명의 짐이 될 것임을 예언했다.
  7. 악하고 게으른 자들에게 공산주의 이념은 아편이 되었다.
  8. 예수의 자본주의 윤리를 계승한 서양 사람들은 돈을 많이 벌어 좋은 데 쓰는 것이 善이라는 淸富의 윤리를 가졌다
  9. 자본주의의 씨앗이 도저히 자랄 수 없는 척박한 토양에서 세계적인 경제대국과 대기업을 키워낸 이승만, 박정희, 이병철, 정주영 같은 사람들은 요사이도 욕을 더 많이 먹고 있다.

30년 넘게 교회를 다니다보면, 이른바 이러한 사회적 문제와 해석에 관한 일반적인 해석론이 무의식적으로 생겨나게 된다. 예수와 상행위 또는 청빈과 청부라고 하는 신조어에 대한 예수의 태도를 무의식 중에 답을 낼 수 있을 정도의 학습이 이루어진다(이것은 비단 기독교 뿐만이 아니라 다른 종교, 다른 학문도 마찬가지다)


예수는 부자를 근본적으로 또는 기본적으로 선하게 보았는가?

아니다. 조갑제씨가 간과하고 있는 성경구절이 있는데, 매우 유명한 것이니 그도 읽었으리라.

어떤 "도덕적인"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어떻게 하면 천국에 갈 수 있느냐?"라고 물었다.(성경에는 그가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을 지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가진 모든 것을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어라"

청년은, 근심하며 떠났다. 이를 본 예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부자는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려우니라. 다시 너희에게 말하노니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신대(마태복음 19:23-24)
(주 : 약대는 낙타를 말한다)


성경을 해석함에 있어 매우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성경을 있는 글자 그대로만 해석한다거나, 일부만을 떼어 아전인수격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이러한 잘못된 해석방법은 수많은 이단을 낳았고, 이러한 좋은 예들이 JMS정명석, 영생교, 그리고 최근에 문제된 신천지 등이다.

기독교에 대한 방대한 연구와 수많은 해석본은 기독교 교리와 해석에 매우 많은 다양성을 부여한 것도 사실이지만, 이렇게 잘못된 해석은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준다. 몇년전 휴거 소동이나, 오대양 집단 자살 사건 등이 좋은 예라고 하겠다.

성경의 일부 구절을 전체적인 조화속에서 보지 못하고 자신의 논리를 정당화 하기 위하여 왜곡하여 해석하는 것은 기독교에서 매우 금기시 하는 것이다.
조갑제씨가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같은 마태복음의 19장에 나오는 더 유명한 말은 왜 빼먹었는지 모르지만, 조갑제식의 해석은 기성 기독교의 입장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한 발상이다.

성경은, 그리고 예수는 모든 부자가 악하다고 하지 않으며 가난한 자가 모두 나쁘다고 하지 않는다.(누가복음 21장에서는 가난한 과부를 칭찬하는 장면이 나온다) 또한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중 어떤 것도 절대적으로 옳다고 하고 있지는 않다.(사도행전을 보면,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며" 라는 초대교회의 생활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초기 공산주의사회와 유사하다)

예수가 부자와 돈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은, 그것이 어려워 보일지는 몰라도 자세히 보면 매우 명확하다.

돈이 많은 부자가 나쁜 것은 아니지만, 부자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매우 강한 우려를 표시하고 있다. 즉, 부자가 됨으로서 가지게 되는 자만이나, 가난한 자에 대한 멸시, 그리고 그 부를 통해 이루어지는 탐욕의 무한한 증가와 가난한 자에 대한 착취에 대해 끊임없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조갑제가 예수의 말을 끌어들여 공연히 어떤 후보를 지지하고자 하는지 알만하다만, 단순히 부자라는 이유만으로 도덕점수를 몇 점 더 줘야 한다고 주장하는 따위의 이런 성경의 해석은 절대로 옳지 않다. 이런 식으로 이명박의 도덕성 논쟁을 무마하려는 논리는 치졸할 뿐이다.

조갑제의 성경 해석은 기독교인들이 가장 경계하여야 할, 이단의 논리일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다.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사도행전 20:30)
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귀 있는 자는 들을 지어다(마11:15)
그가 좋아하는 마태복음에 나오는 말이다

東學

Posted 2007. 7. 11.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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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다가 바라본 하늘엔
흰구름 말이 없이 흐르고,
푸르름 변함이 없건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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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구냐 넌? >

아침부터 중앙일보에서 의미있는 판결이 나왔다고 하길래 가 봤더니 이 기사다. 태아를 어느 시점부터 사람으로 볼 것 이며, 어느 시점부터 태아인가의 문제.

사실, 이 문제가 최근에 문제된 것은 아니다. 이미 로마시대부터 이 문제는 법학에 있어서 중요한 문제로 다루어져 왔다. 우리 민법에서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오랜 논의가 있었는데, 현대의 법학에서는 이 문제에 대하여 각국의 사회문화적 성격에 따라 대부분 정리가 되었고 이에 따라 각국은 확립된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각국마다 그 기준은 다르지만 충분한 논의가 있어왔던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각국의 다수설과 판례는 확고한 기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일반적이다.

우리 민법에서는 "사람은 생존한 동안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된다"(제3조)고 정하여 출생과 사망이 사람의 시기(始期)와 종기(終期)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문제는, 그 출생이라는 사실을 어느 시점으로 볼 것이냐의 문제이며, 언제부터가 사람이 '죽었다'라고 할 수 있는 시점인가이다.(주의할 점은 사람의 권리의무는 출생신고의 여부와는 상관없이 무조건 주어진다)


기사에서 보다시피, 우리나라는 진통설(분만개시설)이다?

정확하게는 주기진통설이다. 출산을 위한 '주기적인' 진통이 있는 그 순간부터 태아가 아닌 사람으로 본다는 것이다. 이것은 옳을까?

맞기도 하고 틀리기도 하다.


법조계에서는 거의 논란도 없는(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 기사를 쓴 기자를 이해할 수 없지만, 이 문제에 대해 다시 문제제기를 하는 것은 또 다시 이로인해 불궈질 오해를 염려함이다.

법원이, 대법원이 사람이 무엇인지 여부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견해를 밝힌다고 해서 그 사람의 또는 태아의 가치가 변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그저 사법 정책상의 문제에 불과하니, 그로 인해 인명에 대한 평가가 달라져서는 안될 것이다.


▶ 사람이냐? 아니냐?

태아와 사람을 구분짖는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시점에 관한 견해가 있을 수 있다.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분류할 수 있다.

  1. 정자와 난자의 수정시기 - 수정설
  2. 수정난의 자궁 착상시기 - 착상설
  3. 착상 태아의 심장 박동시기 - 박동설
  4. 태아의 독립적 운동 시작시기 - 운동설
  5. 신체기관 형성의 완료시기 - 형성설
  6. 출산 전, 부정기적인 진통의 시작시기 - 부정기진통설
  7. 출산전, 주기적인 진통의 시작시기 - 주기진통설
  8. 출산을 위하여 자궁경부의 확장시기 - 출산개시설
  9. 출산 시작 후 태아의 신체 일부가 산모의 몸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는 시점 - 일부노출설
  10. 태아가 산모의 몸 밖으로 완전히 나온 시기 - 전부노출설
  11. 산모 밖으로 적출된 태아가 독립적으로 호흡을 시작하는 시기 - 독립호흡설

이 외에도 세분하면 더 많이 분류될 수 있다.(그건 만들기 나름 아닌가?)

일반적으로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주기)진통설이 다수설이며 통설이며 판례다. 그러나 이러한 기준은 형법에서만 적용된다.
다시 말하면, 형사사건에서는 진통설을 기준으로 태아와 사람을 구분하지만, 다른 분야, 즉 민사사건에서는 다른 기준으로 이를 결정한다. 그것은 전부노출설이다. 이는 일본의 견해와 우리의 견해가 일치한다.

형법에서 태아완 사람을 나누는 기준이 중요성을 가지는 것은, 낙태죄와 살인죄의 구별 실익이 있기 때문이다. 태아를 죽이면 낙태, 사람을 죽이면 살인이 되는데, 태아이냐 사람이냐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으면 이른바 죄형법정주의에서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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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에서 인용된 사진



▶ 왜 하필 진통설?

민법에 비하여 좀더 앞선 시점을 사람으로 보는 형법의 태도는 불필요한 낙태를 회피하고, 태아의 생명을 더 두텁게 보호하기 위한 정책적 필요에 의한 해석이다. 민법의 경우에서와 같이 전부노출설을 취할 경우 출산중인 태아(산모의 몸 밖으로 일부 노출된 태아)를 상해 또는 살해하는 경우 이는 낙태로 보아야 하고, 낙태죄의 경우에는 과실에 의한 낙태죄가 인정되지 않기 때문에 태아의 보호가 약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니 민법에서 인정하는 범위보다 '적당히' 시기를 앞당길 필요가 있고, 이러한 것의 대략적인 사회적 합의를 주기적 진통이라고 보는 것이다.

민법의 경우에는 권리의무의 주체로서의 인간의 시작시기가 중요하기 때문에, 전부노출설을 취한다. 일반적으로 태아의 신체가 산모의 몸 밖에서 완전히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는 시점이 온전한 인간으로서의 권리의무의 주체로 보는 것이 구별의 편이를 위해 좋기 때문이다. 민법에서 사람의 시기와 종기가 중요한 것은 상속(태중에 있을 때 부친이 사망하는 경우) 또는 손해배상(태중에 타인의 상해로 인하여 장애가 발생하는 경우 등)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여기서는 이 문제에 대해 다루지는 않고, 다음에 기회가 있으면 다루기로 한다. 참고로 우리나라는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법률 관계를 열거하여 이에 대해서만 출생한 것으로 간주하는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고 있다)

 
▶ 종교계의 주장은 무시된 걸까?


앞서도 밝힌 바와 같이, 대법원이 사람이 언제부터다 라고 한다고 해서 그 생명의 소중함이 변하는 것도 아니고 자연과학적인 상태 또는 지위가 변하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해석은 법률관계를 명확히 하여 국민으로 하여금 행위의 예측가능성을 높이고 법적인 안정성을 확보하기 위한 수단이다.

이러한 사람의 시작과 마지막을 나누는 것이 종교계가 말하는 것처럼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덧붙여, "가톨릭의대 이동익(신부) 교수는 "나라마다 배아 혹은 태아를 생명체로 볼 것인지에 대한 기준이 다르지만 '태아는 사람이 아니다'고 단정짓지는 않는다"며 "충격적인 판결"이라고 밝혔다. "고 하는데, 이러한 태도는 이해할 수 없다.

태아는 법률적으로는 사람이 아니다. 태아를 뜻하는 embryo, fetus 등의 단어는 분명히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로 하고,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고 있는모든 나라의 판례는 태아가 사람이 아니므로 권리의무의 주체가 되지 않는 다고 하고 있다.(독일, 일본, 프랑스 등이 우리와 같은 개별적 보호주의를 취하고 있다)

의학계와 종교계에서는 어떻게 이를 해석하는지 자세한 기사는 나오지 않아 알 수 없지만, 이러한 대법원의 태도는 법조계에서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닌 일반적인 것이다.

종교계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보호의 대상에 대한 착각이라고 본다. 법률은 보호의 대상이 사람과 태아를 모두 보호하도록 하고 있는 현재의 태도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한다. 형법과 민법은 태아와 사람을 동일하게 보호한다. 하지만 형법의 입법목적상, 범죄자에 대한 처벌은 신중할 수 밖에 없고, 이를 위해서는 양자에 대한 평가를 달리할 수 밖에 없다.

이러한 구별은 보호의 수준을 달리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행위자에 대한 대우를 달리하겠다는 것이다. 피의자 처우에 관한 것과 피해(예정)자에 대한 보호수준의 차이로 이를 나눌 것은 아니다.

▶ 사족

중앙일보의 이 기사는 법학에서 논의되던 것을 판례의 예를 통해 밝힌다는 점에서는 의의가 있는지는 모르지만, 민사와 형사의 다른 관점에 대한 소개가 없어 아쉽다. 또 종교계의 이러한 반발과 법학계의 주장 등 상호간의 평가에 대한 논쟁은 도외시하였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솔직히 말하자면, 단순한 한두번의 인터뷰로만 기사를 작성했다는 의혹(?)을 버릴 수가 없다. 기자가 쓴 내용의 대부분은 이제 갖 법대에 입학한 신입생도 쓸 수 있는 내용이다(태아의 법적지위는 민법총칙에서 배우고, 민법총칙은 법학통론 또는 법학일반론 이후에 가장 먼저 또는 그와 함께 배우는 첫 법학과목이다).

간만에 눈에 띠는 기사가 이토록 부실한 것이 안타까울 따름.

애들이 볼까 무섭다

Posted 2007. 7. 10. 09:20
< 떼법과 무대포 >

물론, YTN돌발영상은 거의 한나라당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인게 사실이다. (신기하게도 연합뉴스나, YTN의 전체적인 기조는 조선일보의 그것과 유사하다. 親한나라당 이라고도 할만한데 이상하게 돌발영상만은 反한나라당이다)

매일 아침에 돌발영상을 보게 되는데, 왜 이렇게 돌발영상 꺼리를 제공하는 사람들은 한나라당이 많은지 모르겠다. 악순환이다.


정무수석에게 한 행위는 '폭행'에 가깝다. 아니, 폭행이다.

상식도 없고 양식도 없고 예의도 없는 인간들.

연탄

Posted 2007. 7. 9.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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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을 향한 변명

Posted 2007. 7. 9. 16:14
몇년전에 읽었던 [우리안의 파시즘]이라는 책이 있었다.
우리 일상생활에 녹아든 파시즘의 잔류와 그로인해 표출되는 광기의 사회, 대한민국.

나는 아직도 우리 사회는 파시즘이라는 과거의 증기기관차가 힘겹게 또는 은밀히 앞장서 달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파시즘의 이름으로 나타나지는 않지만,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영역에서 우리는 파시즘을 다른 가면 속에 만나고 그것을 일상으로 인정하기도 한다. 나는 그렇게 믿는다.
누군가 말한 것처럼, 우리에게 파시즘은 2차대전의 낡은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현재의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는 현재의 힘일 수도 있다. 그것이 반드시 우리가 살고있는 이 대한민국일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어쩌면 21세기가 파시즘이라고 하는 거대한 용광로 속에서 안주하고 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

“강렬한 열정의 폭풍만이 국가의 운명을 돌릴 수 있지만, 그 열정은 그것을 가진 사람만이 불러 일으킬 수 있다”
이 말은,

히틀러가 한 말이다.



파시즘? 파시즘!

파시즘은 쉽게는 독재적인 전체주의를 의미한다. 물론 정치사상으로서 이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일상속의 파시즘. 독재적 전체주의 사상이 침투한 우리 일상에서 꽃핀 작은 파시즘을 이야기 하려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더 큰 파시즘이라고 하는 것 그것을 말하고자 함이다.

일반적으로 이야기되는 파시즘의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반합리주의(antirationalism)
2. 기본적인 인간평등을 부인
3.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폭력과 기만
4. 엘리트에 의한 정치(government by elite)
5. 생활양식으로서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의 전체주의
6. 인종주의와 제국주의는 불평등과 폭력이라는 파시즘의 기본적인 원리
7. 국제법과 국제질서에의 반대
8. 파시즘의 조직 및 관리 원칙으로서의 협동체국가(協同體國家:corporate state)
일상속의 파시즘이란, 합리주의적 이성에의 호소에 반대하며, 인간 또는 인종의 차별을 인정하고 평등을 무시한다. 인간관계에서 힘의 강역에 따른 계급주의를 인정하고 사회질서의 평등과 힘의 균형을 부인하며 폭력에 의한 질서의 확립을 전제로하는 전체주그이적 생활 방식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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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대전이 끝난지 60년이 넘은 지금. 우리에게 파시즘은 어떤 그림자를 남기고 있는가.

아니 그것을 우리는 그림자라 할 수 있을까?

일상화된 폭력과 차별, 그리고 권위에 대한 근거없는 복종과 타협, 자율적인 균형 회복능력의 상실, 소수자에 대한 폭력과 광기의 표출.

우리는 과연 이 시대의 파시즘으로 부터 자유로운가?

남녀평등 - 파시즘의 친위대

파시즘을 말할 때 인용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것이 어쩌면 남녀평등의 문제다. 여자는, 남자는 어떠하여야 하는가에 대한 피상적 나열은 곧 파시즘의 성공적 일상침투의 결과물이다. 우리는 일상적으로 군대를 이야기 하고, 일상적으로 여성부 꼴페미들을 욕한다.

여성부는 존재하여야 하는 문제에 있어 우리는 근거없는 낭설 속에 꼴페미를 덧씌워 그들의 해체와 박멸(?)을 주장한다. 심지어는 남녀평등을 부르짖는 페미니스트들 조차 일상적 차별과 언어로 종속된 그들의 일상이 파시즘이라는 기저를 포함한다는 사실을 망각한다.

조리퐁에 대한 시각적 폭력과 소나타의 헤드라이트로 이어지는 빛나는 페니시즘(penis + ism)은 여성부(정확하게는 여성가족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들의 논리가 되어버렸고, 타워펠리스 속에서 페니스를 보는 안티페니시즘은 남성의 성기를 닮은 폭력으로 페미니스트의 목을 죄어오고 있다.

군대를 다녀와야 남자가 되는 알수 없는 폭력동화적 남성상은 우리 사회의 외곽을 보호하는 군대를 서울시 한복판의 터주로 만들었고, 나 군대 있을 때는 잘 독아가던 군기 확립은 사회에서도 회사에서도 학교에서도 엎드려 뻗친 아랫 것들의 개념없는 텅빈 머리속에 있다.

아버지와 엄마로 포장된 언어는 아버지의 권위 속에 엄마를 부엌으로 내 몰고 있다.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의 사회적 분화가 정착된 이후, 여성성과 남성성의 구별과 차별은 우리 인식의 기저에서 끊임없이 작용하고 있고, 우리 사회 역시 1980년대 여성의 사회진출이 두드러지기 시작한 이래 아직까지 그 안에 머물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렇게 발전도, 쇠퇴도 하지않은 sex의, gender의 파시즘은 지금 트랜스젠더의 더러운 성생활로 이어지고 있다.

우리는 하리수의 여성성을 인정하지만, 그녀의 성기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고, 그녀의 결혼이 이 사회에 던지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생래적이지 못한 탄생을 두 불안정한 남녀의 성기의 결합에 더욱 궁금증을 가진다. 이반으로 불리는 동성애자는 더러운 성도착자에 불과한 사회. 그것이 이 시대 파시즘이 남녀의 평등에서 옮아간 일반과 이반의 파시즘이다.

[필라델피아]라는 영화에서 동성애자인 톰 행크스의 변호를 맡은 덴젤 워싱톤의 대사에 이런 말이 있다.

"이곳은 필라델피아 입니다. 형제애의 도시이며, 자유의 탄생지로서..
  독립선언의 장소입니다.   제 기억으로는 그 선언문에는....
  '모든 정상인(이성애자)는 평등하다'가 아닌,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라고 쓰여있습니다."
페미니스트들은 타워펠리스에서 페니스를 보았는지 모르지만, 나는 그 안의 파시즘을 보았다. 군대를 무자비한 폭력집단으로 몰아 여자가 갈 수 없는 연약한 피보호대상만을 양산하여 그들은 스스로 파시즘의 보호를 선택했다. 여성을 남성의 객체로서만 인정하고 여성에 대한 일방적 수혜적 정책을 지지함으로서 가부장적 파시즘을 인정하는 꼴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군복무에 따른 가산점의 문제나, 간통죄와 혼인빙자간음죄의 폐지와 관련한 문제, 그리고 호주제도의 철폐 등에 있어서 그들에게 필요했던 것은 gender로서의 사회적 존재들과의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한 공론화된 타협점이 필요했을 뿐이다. 목적의 정당화를 위한 수단의 도외시는 결국 파시즘을 통한 이상주의의 건설에 목을 메는 또 다른 무솔리니의 친위대로 태어날 뿐이다. 누군가의 말 대로, "그러나 여성권력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이익을 위하여 권력에 기대어 여론을 외면한 채 급진 페미니즘 편향의 가부장제적 파시즘으로 강제했으며 그 결과 우리 사회는 모순과 갈등만 증폭되어 왔다."


파시즘의 폭력 정점과 복수

인간은 타인의 인권을 존중하여야 한다.

하지만, 인권은 타인의 인권을 존중한 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인권은, 단지 그가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누군가의 목숨을 빼앗았다고 하더라도, 누군가의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주었더라도 그에게 인정해야 할 것은 인권이다. 다른 것을 인정할 수 없을지는 모르지만, 그에게 인정해야 할 마지막은 바로 인권이다. 인권은 대가로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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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권이 대가로서 주어진다면, 그것은 사회의 합의나, 타인의 인권을 존중한다는 호혜적(互惠的) 관점이거나, 국가의 시혜적 은총이 아니다. 그것은 권력과 파시즘에 대한 투쟁으로 주어지는 대가인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그 의미가 있는 것이다.

타인의 인권에 대한 대가로서 가지는 인권은 호혜적이라기 보다는 복수적이다. 나에게 인정된 인권은 타인에게도 그 만큼 인정할 수 밖에 없다. 일상적인 복수와 폭력을 불러오는 바로 그 우리의 일상이 바로 파시즘이다. 술집에서 얻어맞은 아들을 위하여 폭력을 정당화시키는 것은 결코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될 수 없다.

한국사회에서 사형제도를 이야기하기란 얼마나 힘든 것인지. 당해봐야만 안다는 끊임없는 저주와 사형당해 마땅한 자(?)들에 대한 끊임없이 이루어지는 인권이 사라진 정죄는 어쩌면 우리 일상의 파시즘이 가장 극렬하게 드러나는 현상이다. 피해자와 피해자의 가족의 입장을 대변하는 정서적 호소는 있으되, 사형당하는 자의 가족에게 주어지는 주홍글씨에 대한 정서적 공감대는 형성되어서는 안된다. 죽어도 싼, 죽어 마땅한 주장에 불과한 철없는 이론가로 전락해 버린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권은 Zero Sum이 절대 아니기 때문에, 인권을 위한 사형은 존재하지 않는다. 가해자를 벌하는 것은 피해자의 인권을 위함이 아니요, 국가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고 사회 발전의 의미로서만의 가치를 가지고 있다. 복수는 복수를 낳는 무한반복이 사법체계 내에서 일어난다. 나를 죽임으로서 누군가의 한과 인권을 살릴 수 있다는 사상은 결국 축소된 아우슈비츠의 참상을 만들어낼 뿐이다.

사람을 살해하거나, 어린이를 강간한 사람은 사람이 아니며 인권이 없다는 생각은 나와 너는 다르며 내가 널 죽일 수 있다는 파시즘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 파시즘이 아우슈비츠의 유대인들을 학살하고 유고에서는 인종청소라는 끔찍한 현대사를 기록한 것이다. 인류 역사상 반드시 죽어야 했던 사람은 오직 예수 뿐이었다.


피부속의 파시즘

신나찌들의 동양인에 대한 이유없는 폭력보다, 우리에게는 이미 일상화 되어버린, 관념화되고 고착되어버린 일상의 차별과 멸시, 그리고 하얀 탈색인종을 향한 이유없는 사대주의는 더 국제적 수준의 범죄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남아를 이야기하며 웃고 즐기는 우리, 파키스탄을 이야기하며 즐기는 우리는 이미 파시즘의 민족주의에 빠진 파시스트 집단에 불과하다. 그들과 우리는 다르며 그들을 차별하는 우리는 그들보다 과연 우수한 종자인가? 백인들에게 길들여진 참담한 사육견이 백인의 살가운 피부색에 현혹되어 검은 대륙과 뜨거운 동남아시아의 목소리는 듣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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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를 배워도 인도인 영문학자보다는 백인의 범죄자에게 배우는 것이 좋을까의 문제에 대해서는 이미 답 따위는 필요없는 정리가 되어버린 문제다. 조선족은 이미 우리의 피용자로서 어눌한 한국어 발음에 사로잡힌 열등한 족속으로 치부하고 있다. 우리에게 과연 그들의 피부색과 어눌한 한국어 실력을 바탕으로한 일상적인 차별을 말할 자격이 있는가? 그것 역시 피부색 속에 파묻혀 버린 파시즘은 아닌가.

백인에게는 영어로 다가가 굽실거리는 주제에 다른 한편으로는 검은 피부의 동남아시아 출신의 이주노동자에게 채찍을 가하고 더러운 것이 묻을까봐 그들을 박해한다. 그들의 음성화된 폭력과 범죄를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그들을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서 얼마나 대우해 왔는지 돌아봐야 한다. 조선족의 범죄와 일탈을 이야기 하기 전에 국적도 없이 중국에 동화되어 오다가 대한민국에 의해 전혀 외국동포로서의 지위는 갖지 못한 채 다시 외국의 이주노동자로 전락해 버린 조선족의 황당한 피해자적 지위를 왜 말 못하는 것일까.

외국의 한국인 차별에는 분노하면서, 우리는 일상적으로 그들을 차별하는데 익숙해져 있다. 얼굴이 검다는 그 이유 하나만으로 그들은 열등한 인종으로 더러운 생활을 하는 자들일 뿐이지만, 반대로 하얀 얼굴의 미국과 유럽인에게 우리는 충실한 황인종이 된다. 우리는 그들의 문화를 습득하고 그들의 언어를 위하 영어마을을 세우고, 그들을 위해 우리의 이름은 흔쾌히 성(姓)을 뒤로 보내는 수고를 아끼지 않는다. 결국은 우리에게 돌아올 우편물을 위해서 우리는 번지부터 시작해서 Seoul로 끝나는 주소 하나쯤은 상식이라고 생각한다. 만연화된 파시즘 속에 피어나는 향기로운 사대주의가 빛을 발한다.

우리보다 하얗지 않은 모든 자에 대한 인종주의적 차별은 물론, 같은 조선족에 대한 파렴치한 배타적 위계의식은 우리를 파시즘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하게 한다.



파시즘을 향한 변명

우리에겐 근대도, 현대도, 보수도, 진보도, 자유도 없다.
더럽고 치졸한 파시즘의 역사.
그것이 우리에게 파시즘이 남겨준 유산이다. 아무것도 없음의 유산

정치 블로그 유감

Posted 2007. 7. 9. 09:47
지금 각종의 블로그스피어에서는 정치관련 포스트가 하루에도 수십개씩 올라온다.
물론, 지난 선관위의 인터넷 선거운동 금지가 시작될 당시 하루에도 수백개씩 올라오던 것에 비하면 미비한 수준이지만, 지금도 그 숫자가 꾸준히 증가하고 있고, 본격적인 대선 레이스가 시작될 가을이 되면, 더 많은 글들이 인터넷을 뒤덮을 것은 확실하다.

올블로그나 이올린에서는 그다지 두드러지지 않지만(아무래도 전문 블로그꾼(?)이 많고 그래도 상당한 수준이 있는 블로거들도 많은) 다음 블로거 뉴스를 보면 가끔 그런 글들이 2007년 대선 관련 뉴스(?)라고 올라오는 것은 좀 짜증이 나기도 한다.

정치인의 개인블로그가 가장많이 본 뉴스 또는 가장 많은 추천을 받은 글이라고 상위에 랭크 되어있는 것을 보면, 이건 뉴스인지, 기관지 인지 모를 지경이다.

오늘 다음의 대선관련 블로거뉴스 순위를 보면 최근 들어 그런 현상이 가장 두드러져 보인다.

많이 본 기사는 있으되, 볼만한 기사는 없다.



* 오늘 순위

1위 - 정동영 블로그
2위 - 손학규 블로그
3위 - 정동영 지지자 공식 블로그
4위 - 정동영 블로그
5위 - 한국사회당 블로그
6위 - 한국사회당 블로그
7위 - 한국사회당 블로그
8위 - 김두관 블로그
9위 - 김두관 블로그
10위 - 김두관 블로그
11위 ~ 18위 - 김두관 블로그

미국식 조기교육

Posted 2007. 7. 9. 09:11
< 12살이면 할거 다 한다 >

민족주의자일수도 있는 내 관점에서는 미국에서 이루어지는 일련의 교육, 문화 등의 대외 잠식 효과에 대해 항상 반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사회의 병폐라고 하는 것들의 50% 이상이 서구의 유물론적(물론 아니라고 하겠지만) 사상체계의 확산과 기존 사상의 붕괴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Both Sides Now

Posted 2007. 7. 8. 0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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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좋은 꿈 꾸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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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블로그

Posted 2007. 7. 7. 02:01
지금 방문객의 딱 1%만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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