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하게는 통일세를 걷겠다는 의미는 아니고, 통일세를 비롯한 통일을 대비하는 현실적인 수단들을 검토해서 조속히 시행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라 생각된다.
그럼에도, 정치권에서는 통일세의 징수에 관한 논의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계기가 되었다고 인정하는 측과 이를 비판하는 측으로 나뉘어 통일세 자체에 논의를 집중하고 있다.
물론, 통일세를 직접 언급했기 때문에 통일세에 대해 검토하는 것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함은 맞다. 그런 의미에서 통일세의 의미와 그 현실성, 그리고 정책적 타당성을 검토해 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통일세는 그 이름만으로 목적세다.
목적세란,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징수되는 세금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소득세나 법인세 등은, 목적세가 아니다. 상속세나 증여세 등등 대부분의 국세는 목적세가 아니다.
목적세는 주로 지방세에서 부과되는데, 지역교육세, 도시계획세 등 특정의 목적을 위하여 부과되는 세금이다.
통일세가 신설된다면 국세로서는 유일한 목적세가 될 것이다.
조세의 목적은 국가재정의 주요 수입원으로서 국민과 기업으로 부터 세금을 징수하여 국가가 이를 사용하는 것이다.(여러가지 의미가 있지만 대략적으로 이해하기 쉽게 표현하면 그렇다는 것이다) 세금은 반대 급부가 없이 부과되는 것으로, 세금을 낸다고 해서 어떤 혜택이 주어진다거나 어떤 권리를 취특하는 것은 아니다. 일방적으로 국가가 직접 부과한다.
일반적으로 목적세가 아닌 국세는 개인 또는 법인의 어떠한 행위에 대하여 부과하거나, 개인 또는 법인의 행위에 의하여 이익 또는 어떤 부산물이 발생한 경우 이를 부과 대상으로 한다. 소득이 있다거나, 이익을 창출하기 위한 사업행위 또는 부가가치의 창출 행위 등 행위와 그 결과에 대해 부과하거나 상속 등 어떠한 사실의 발생에 대하여 부과한다. 즉, 그러한 행위나 이익 또는 사실이 발생했다는 사실에 근거하지, 다른 이유나 원인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다만, 정책적인 이유로 어떠한 행위에 대해서는 세금을 발생시킴에도 불구하고 면세규정을 두어 세금을 면제하거나 영세율을 적용하여 0원의 세금을 걷는 등의 방식을 취하기는 하지만, 대체적으로 동일한 행위에 대해서는 동일한 종목의 세금을 부과한다.
이러한 국세의 특징은, 원인이 되는 행위가 부재하면 세금도 없다는 점을 전제로 한다. 소득이 없으면 세금이 없고 영업행위가 없으면 세금이 없다거나, 상속이 없으면 세금이 없다. 즉, 세금을 부과하기 위해서는 어떠한 행위 또는 사실의 발생을 필수불가결한 전제로 한다.
이에 반하여 목적세는 어떠한 행위를 기준으로 하지만, 그 세금의 사용목적이 정해져 있는 것으로, 행위 도는 사실의 발생 자체에 대하여 그다지 긴밀한 연관성을 가지지 않는다. 목적세 역시 과세의 대상이 되는 행위 도는 사실의 발생을 전제로 하지만, 그 행위 또는 사실이 유일한 원인인 일반적인 세금과는 달리, 그 과세원인은 그저 과세의 대상이 발생하였다는 사실에만 주목할 뿐 그 사실의 내용이나 규모 등은 별로 고려되지 않는다(물론 세율이나 누진율 등에 대해서는 고려되겠지만, 이는 본질적인 내용은 아니다) 이러한 점은 그 원인행위가 세금의 징수 목적과는 다르다는 점을 의미한다. 즉, 소득이 발생했지만, 소득의 재분배나 소득으로 부터의 직접 징수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소득은 발생했고 그거랑 상관은 없지만 돈을 쓸데가 있어서 돈을 가져가겠다는 의미다.
가장 대표적인 목적세인 교육세의 예를 보면 이를 쉽게 알 수 있다.
담배를 사면 교육세가 붙는다. 하지만, 누구도 담배와 교육의 관계에 대해서는 말하지도 않고, 말할 필요도 없다. 담배와 교육은 전혀 관계가 없지만, 담배를 판매한 돈 중에서 일부는 교육을 위해서 쓰여진다는 의미다. 담배의 소비행위가 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담배를 샀기 때문에 교육에 돈을 내야한다는 의미는 아닌 것이다. 담배는 그저 교육세를 걷기 위한 어떤 원인행위에 불과하고, 교육세를 걷는 이유는 담배를 샀기 때문이 아니라 교육에 돈을 투자해야할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통일세의 경우, 통일을 해야하기 때문에 걷는 세금이지, 통일을 했기 때문에 또는 통일을 위한 행위를 하는 사람에게 부과될 세금이 아니므로 통일세는 매우 전형적인 목적세가 될 것이다.
그런데, 세금으로서 목적세를 걷는데에는 몇가지 주의할 점이 있다.
첫째는, 목적세는 그 성질상 반드시 목적에 한정된 세금이기 때문에 그 징수된 세금을 다른 곳에 사용해서는 안된다. 물론, 일부 전용되는 경우도 있고 그러한 절차가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원칙적으로 목적세는 그 세금의 징수 목적에 충실하게 사용되어야 한다. 소득세의 경우 그 소득세를 가지고 경제적인 분야에 쓰건, 복지분야에 쓰건 어디에 쓰건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하지만 목적세인 통일세라면, 그것은 통일을 준비하고, 통일이후의 경제적 부담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에 사용되어야 한다. 법률상 정해진 목적 이외에는 사용이 금지된다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른 세금에 비하여 그 징수 이후의 관리가 투명해 져야 한다는 것이다. 징수야 어짜피 공평하게 징수 대상에 대하여 균일한 방식으로 징수되는 것이니 어떤 세금이건 그 징수의 절차는 동일하지만, 사용에 있어서는 목적세가 아닌 세금에 대해서는 그것이 법률상 금지된 국가의 행위에 이용되거나 해서는 안되지만, 그 범위는 제한이 없다. 하지만 통일세는 목적세인 이상, 통일에 관한 사업 및 통일의 준비 이외에는 사용해서는 아니된다.
두번째로는, 세원이 적절해야 한다는 것이다. 소득에 붙는 소득세의 경우 소득이 발생하기만 하면 그것이 어떤 소득이냐를 불문하고 그냥 걷으면 되는 것이다. 물론 소득의 성격에 따라서 세율이나 징수의 방법 등이 달라지겠지만, 그것이 소득이라고 인정되는 이상 똑같이 소득세가 부과된다. 하지만 목적세의 경우 그 세원이 소득이냐 사업이냐 아니면 상속이냐 하는 것과는 무관하게 세금 부과의 대상이 결정된다. 담배에 붙는 교육세가 그 대표적이다. 담배와 교육은 무관하지만, 담배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할 권한을 가진 국가는 담배에 대하여 세금을 부과한다. 교육세라는 명목으로 말이다. 담배가 가지는 여러가지 국가적, 경제걱, 보건적인 측면을 고려하여 담배가격을 인상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는 상황에서, 담배의 제조원가는 그대로인데 세금을 통해 이러한 목적을 달성함과 동시에 그렇게 조성된 재원으로 교육에 투자하겠다는 것인데, 이렇듯 그 대상과의 관련성은 물문하지만 어떤 한가지 도는 두어가지 이상의 물건이나 행위에 세금을 부과하되, 그 결정방식이 공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담배와 같은 것에는 별로 부담이 되지 않고 어짜피 조세저항도 없을 것이지만, 이를테면 저소득층이 많이 소비하는 물건에 대하여 통일세를 부과한다고 하면, 가난한 사람의 돈으로만 통일을 준비하려 한다는 비난에 봉착할 수 있다. 관련성은 없으되, 그 세금을 부과함에 따라 국민이나 해당 세원의 관련자들에게 지나친 부담이 되어서는 안되고, 그렇게 징수된 세금이 해당 목적을 달성하는데 충분해야 하며, 세그므이 부담자들이 이를 불공평하게 받아들여 조세저항이 생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 외에 통일세라고 하는 세금의 성격상 주의하여야 하는 것이 있을 수 있다.
통일세는, 1회용 세금이어야 한다. 성격상 통일은 1회성이다. 교육과 같이 계속 진행해야 하는 것이거나, 지역개발과 같이 끝없이 이루어져야 하는 목적과는 달리 기간이 오래 걸릴 수는 있지만 단일한 목적을 가지고 그 목적이 1회성이라는 것이다. 물론, 1회성이라고 해서 통일을 위한 비용이 1회만 딱 들어가고 안들어가는 것은 아니고 몇년 어쩌면 몇십년간 지속적인 비용의 부담이 필요한 행위이긴 하지만, 언젠간 생겨나되, 언젠간 또 없어져야 할 목적세인 것이다. 통일세를 모아두기만 하고 한번에 지출하는 것은 아니지만, 통일을 위하여 준비하되, 통일에만 써야하고, 통일에 필요한 모든 절차가 완료되면 사라져야 하는 세금인 것이다.
다음으로, 통일세는 그 사용목적은 있으되, 그것이 사용되는 시기가 특정되지 않은 세금이 될 것이다. 물론, 통일의 준비행위에 들어갈 비용은 미리 계획하고 사용될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인 통일이 언제 이루어질지는 아직 알 수 없고 그것이 예측가능한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부의 세금은 적립하여 일종의 준비금으로 두고, 일부의 금액만을 통일의 순차적 준비행위를 위해 사용되어야 한다. 국가가 시행하는 수 많은 일들의 경우 대부분 시기와 종기를 결정하고 그에 따라 적절한 금액을 순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나, 이 통일세의 경우 일정한 금액을 시기와 종기를 두고 시행하되, 통일 자체가 언제 이루어질지 모르는 상활에서는 일시적으로 소요될 천문학적인 금액의 투입에 대비하여 기금이나 적금처럼 모아두어야 할 필요가 있다. 자칫 이 예상을 잘못하여 지나치게 적은 금액이 적립된 상황에서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이는 매우걱정스러운 일이 될 것이며 통일에 소요되는 기간이 예상보다 장기가 되어 돈을 그냥 모아두고는 쓰지도 못하는 상황이 될 수도 있다. 이런 점에서 다른 목적세와 달리 취급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통일세는 목적세로서 조성되어 징수되지 않을 가능성이 있다. 즉, 기존에 존재하는 세금에 대하여 그 세율을 변경하여 징수액을 늘려 이로서 그 통일세를 조성하는 방안이 고려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미디어오늘의 기사는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전문보기)
읽지 않을 게으른 자들을 위해 중요한 부분만 옮겨보자
기획재정부는 아직까지 통일세의 추진 일정이나 징수 방법 등과 관련, 논의된 바가 없다는 입장이지만 언론은 대부분 "소득세나 법인세 같은 직접세 방식과 같이 세목을 별도로 신설하기 보다 각종 부담금이나 부가가치세 등 간접세를 늘리는 방식으로 통일세를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고 전망하고 있다. "과거 폐지됐던 방위세를 통일세로 이름을 바꿔 부활시키는 방안도 고려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동아일보는 여권 관계자의 말을 인용, "부가세를 2~3%포인트 올리는 방법이 가장 효과적"이라면서 "목적세 형식을 취하면 조세 저항도 최소화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올해 정부의 부가세 예상 수입은 48조7000억원으로 전체 국세 수입(171조1000억원)의 28.5%를 차지한다. 부가세 세율을 2%포인트만 올려도 연간 세수가 약 10조원 늘어난다. 이 신문은 "국민경제적 부담과 그에 따른 조세 저항도 정부가 풀어야 할 큰 숙제"라고 덧붙였다.
부가가치세를 비롯해 간접세가 늘어날수록 중산층과 서민들의 생활이 어려워진다는 건 초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상식이다. 조세를 통한 소득 재분배 효과를 얻으려면 직접세를 늘리고 정부 공공지출을 늘려야 한다. 그런데 보수·경제지들은 간접세가 조세 저항을 줄이는 방안이 될 거라고 노골적인 훈수를 두고 있다. 우리나라의 간접세 비중이 세계적으로도 매우 높은 수준이라는 사실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통일비용은 미국 스탠퍼드대 연구에서는 2300조원, 미국 랜드연구소 연구에서는 2006조원, 조세연구원 연구에서는 10년 동안 GDP의 12% 127조원 정도가 투입될 것으로 추정된다. 1990년 통일한 독일의 경우 3천조원 정도를 쏟아 부었는데 통일 직후 1년 동안 소득세와 법인세에 각각 7.5%씩, 이후 1995년에 각각 5.5%씩을 징수했다. 독일의 경우는 대부분 직접세로 통일비용을 충당했다.
정부·여당과 보수·경제지들이 통일세를 신설한다는 핑계로 부가가치세 세율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건 후안무치한 터무니없는 억지라고 할 수 있다. 추가 세수 확보가 필요하다면 선진국 수준으로 직접세 비중을 높여야 한다. 그러려면 이명박 정부 출범 직후 인하한 소득세와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등의 세율을 원상 복구시키는 것이 우선이다. 더도 말고 OECD 평균 수준만 되도 통일 비용의 상당부분을 조달할 수 있다.
쉽게 말하면,
간접세, 그중에서도 부가세로서 통일세를 징수하면 동일하게 징수된다는 것이다.
소득세나 법인세의 경우, 소득이 많은 사람은 많이 내고 적은 사람은 적게 낸다.
물론, 세율은 같은 경우도 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100만원 버는 사람이 10만원 낼 때 10만원 버는 사람은 1만원 내는 것이니 공평(깊게는 들어가지 말고)하면서도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부가세의 경우에는 그 사람의 소비생활에 관련된 것으로, 모두가 똑같이 낸다.
1,000원짜리 물건을 사면 나도 909원의 물건값과 91원의 부가세를 내는 것이고,
이는 이건희 회장이 1,000원자리 물건 샀을 때랑 똑같다.
게다가 나는 그 세금은 내고 있다는 인식조차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세저항도 없게된다. 징수가 편리하다.
통일세에 대한 부분은,
아직까지는 분명히 나온 것이 없어 뭐라 정확하게 규명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그렇기 대문에 정부나 여당 모두 조심스럽기도 할 것이다. 아직 이렇다할 논의가 시작되지 못한 것도 물론 사실이고.
하지만, 통일은 반드시 온다는 것과 통일에는 많은 비용이 소요된다는 점을 인정한다면
그 논의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을 세금으로 충당하겠다는 점은 좀 더 고려해서 발표해야 하지 않는가 하는 생각은 든다.
먼저, 통일세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회성의 세금이다.
그렇다면 통일에 필요한 모든 절차가 끝난 후에는 그 세금을 모두 없애고 이전의 수준의 세금으로 환원될 것인가?
아마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후에 잉여의 징수액은 어덯게 사용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도 있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어짜피 1회성 비용이라면, 그리고 어떤 의미에서는 우리 국민 모두가 부담해야 할 비용이라면,
국채의 발행이나 그와 유사한 수준의 기금의 조성을 생각해 볼 필요는 없는가 하는 생각이 든다.
어짜피 들어가야 할 돈이고, 그것이 우리가 부담할 돈이라면 국채 발행이나 기타 다른 방법을 통한 기금을 마련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있을 것이다. 통일기금을 조성하여 기업에 대해서는 통일후 이루어질 많은 공사(대통령이 자신있는 토목공사도 포함해서)에 대해 참여 기업에 대한 우선 참여권을 주어 이를 대비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고, 대부분 국유로 되어있을 북한의 부동산(분단 전 소유자들의 권리에 관한 부분은 차치하고)에 대한 불하 또는 투자를 유도하는 방안도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할 경우 세금이라는 비호감의 방안(?)이외의 방안으로 좀 더 깔금하게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법인세와 부자 감세를 통해 이미 세금과 관련한 안티세력을 많이 만들어낸 이명박 정부가 뭐하러 통일세라는 좀 민감한 주제를 새로이 들고 나왔는지는 정치적인 여러가지 해석이 있겠지만, 알려진대로 이명박 대통령의 개인적인 생각이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라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오해라는 변명이나 마사지가 가미되기 보다는 좀 더 정제된 설명과 논리가 필요하리라 생각된다.
얼마전에 언론에서 우리나라의 담배값이 8,000원 수준이 적당하다고 하는 기사를 봤다.
물론, 답배값이 얼마정도가 적당한가의 문제는 중요한게 아니지만,
담배값에 대한 논의가 통일세와 맞물려 나왔다는 것이 시기적으로 참 오묘하다는 느낌이다.
담배의 제조원가야 어짜피 담배값과는 무관하게 그대로일 텐데,
그렇다면 담배값의 인상분은 어디로 갈까?
인상분의 90%는 세금으로 가게 될 것이다. 그것을 기업에 그냥 몰아주지는 않을테니 말이다.
(물론 인상되면 판매량이 줄어 기업이나 세수는 거의 변화가 없을 수도 있다)
지금의 우리나라 조세제도가 적정한 수준이라면,
이번 정권에서 없애버린 종합부동산세나 부자들에 대한 감세만 다시 걷기로 한다면 통일세의 준비는 더 할 필요도 없이 끝날 수도 있다.
애먼 담배값이나 올려서 서민들 주머니 뒤지고 부가가치세 올려서 통일하겠다고 덤벼들일은 아니지 않은가 싶다.
담배값올려서 통일세 걷겠다면, 도움을 주지 못해 미안. 물론 이대통령은 내 말 안 듣겠지만.
부동산이 폭락하고 있다.
물론 폭락이라는 단어에 대해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것이라 본다. 아직은 폭락이 아니라는 의견도 있고,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폭락일 뿐이라고 하는 사람도 있고, 선대인(@kennedian3) 부소장은 이제 부동산으로 돈 벌 생각은 버려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내가 알기로는 선 부소장의 입장이 가장 진화된(?) 부동산에 대한 견해이다)
아무튼 그래서 미국의 경제가 휘청휘청 했다.
서브프라임 모기지론 위기라고 하는 것이었는데, 아무튼 미국이 휘청하면서 세계 경제가 같이 휘청했다.
왜냐면, 미국이 불안하고 스러지려 하니까, 미국이 그 동안 외국에 투자했던 돈들을 다시 회수하는 일들이 벌어졌는데, 미국이 돈을 빼가니 다른 나라들의 경제가 휘청할 수 밖에 없어진 것이다. 우리 같은 미국 의존도가 큰 나라들이 더 심하게 된 것이지. 경제라는게 항상 다른 부분들과 연쇄적인 부분이 있어서 경제를 지탱하고 있는 많은 기둥 중에서 하나만 무너지면, 다른 부분들에 힘이 더 실리기 마련이라, 연쇄적으로 불안해진다.(복잡한 과정까지 알려고 하지말자 나는 경제학도가 아니다)
아무튼, 이리하여 미국의 경제가 뒤집히자 사람들은 생각하기 시작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의 종말이 아닌가?"
신자유주의는 새로운 자유주의다 -_-
자유주의는 이른바 보이지않는 손에 모든 경제적인 흐름을 맡겨두어야 한다는 이론이다. 자유롭게 경제주체들의 상호작용속에 시장과 경제는 좀 더 합리적인 방향으로 돌아가게 마련이라는 것이 자유주의고, 이 것이 1,2차 대전을 거치며, 그리고 경제공황을 거치며 수정되어 국가의 개입을 확대해 나가다가, 다시 자유주의 입장에 돌아서서 국가의 개입보다는 시장 자체의 통제력을 신뢰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주장이 곧 신자유주의인데,
미국의 경제실패는 이런 신자유주의를 신봉하는 공화당(레이건부터 시작해서 부시로 이어지는. 물론 중간의 클린턴 행정부의 경우는 좀 거시기하지만 넘어가시고~) 정부의 실패로 인정되어, 신자유주의의 종말을 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으로 이어졌다. 그리하여 (물론 많은 변수가 존재하긴 하지만) 미국의 오바마 정부(민주당 정권)에서 의료보험이나 등등 여러가지 정책에 대한 엄청난 수정안을 들고 나온 이유가 바로 이런 이유였고, 오바마의 당선에 결정적인 영향을 준 것이 신자유주의 종말론이라고 할 정도였다.
신자유주의가 시장에 대한 막대한 결정권을 경제주체들에게 나누어준 경제적 방임주의였다면, 이에 대한 반성으로 오바마 정권 등 각국의 정부가 시장에 대한 적극적인 정부의 개입을 들고 나왔고 이것이 새로운 세계적인 추세로 신자유주의를 대체할(그것이 어떤 명칭으로 불리우건), 그리고 극복할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여기까지가 해외, 그리고 외부의 경제적 추세였다.
우리만 빼고.
내가 우리만 빼고라는 말을 쓴 것은, 실제 이명박정부가 들어선 이후 많은 경제정책들이 신자유주의적으로 돌아섰기 때문이다. 물론, 노무현정부나 김대중 정부가 전혀 그렇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지난 정권에서도 많은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이 있었다. 그렇게 때문에 좌측 깜빡이를 켜고 우회전을 한다는 비판도 있었고, 많은 진보주의자들이 노무현 정권에 등을 돌린 이유가 신자유주의적 정책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만 해도 그것은 신자유주의의 절정에 달한 세계적 추세에 다라가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일반적인 경향이었지만 이번 정부는 그 반대의 추세 속에서도 신자유주의를 고수하고 있기 때문에 신자유주의로 돌아섰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신자유주의로 돌아선 이명박 정부.
이번 정권의 경제적, 정치적인 정책들이 이해하기 어렵다, 미친짓이다라고 하는 견해들은 세계적 추세나, 우리가 국가의 행위는 이러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들과 다르기 때문이고, 이는 우리의 시각이 시장경제의 반성에서 시작하는 이유에서이다.
신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명박 정부는 매우 reasonable한 정부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우리의 상식은 그것을 답답하다 또는 미친짓이라고 규정하는 것일까?
우리의 상식이 신자유주의의 실패를 이미 상식적인 수준에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이명박정부의 부동산정책,
상지대 사태를 해결하기 위한 정부의 정책방향,
4대강을 바라보는 정부의 시각,
등등은 신자유주의의 입장에서 본다면 매우 당연한, 매우 적절한 것일 수 있다.
민노씨는 자신이 법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하지만, 법없이도 살 사람은 무법자고 -_- 내가 아는 민노씨는 법없이 살 사람은 아니고 그냥 법을 대충 잘 지키는 사람중에 하나다. 내가 민노씨를 알게된건 순전히 블로그를 통해서이고, 한번도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지만, 나 역시 상지대 사태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중에 그가 고소를 당했다고 하니, 그동안 미뤘던(사실 게을러서 망설이던) 상지대에 대한 얘기를 쓰려고 하던 중에 마침 민노씨가 고소를 당했다니 나도 상지대 사태에 대해 좀 생각해 봐야겠다(이런 면에서는 민노씨의 고소를 반가워 해야 하는건가 -_-;;)
상지대 사태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지만, 딴지일보에 비교적 자세히 나와있으니 그걸 참고하도록 하자.
(그거 안 읽고 보면 대책 없이 그냥 뭔 소린지 모를테니 제발 좀 읽자. 상지대 사태에 대해 읽지도 않고 관심이 없다는 둥 뭐시기 하다는 둥 내 일이 아니니까 무관심한거 자랑 아니니 이런 것 좀 알고 다니자. 니들이 대학을 아직 안갔건 이미 졸업했건 그건 중요한게 아니고, 나중에 니들 세금 가지고 엄한데 썼는데 나하고 상관 없다는 소리 좀 제발 그만하자. 그런게 무식이고 무식이 용맹이란 소리 듣는 짓이다)
상지대 사태의 본질은 사립학교의 자율성과 설립자의 권한 등등 여러가지 문제인데, 이 것들이 좀 더 깊숙하게 들어가면 사유재산제도와 민주주의 어쩌고 하는 문제까지 들어간다. 중요한건, 그것들이 우리와 전혀 상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나중에 우리가 대학을 가거나(난 이미 졸업 했지롱) 니들의 애들이 커서 대학갈 때 등록금이 많아서 대학을 가네 못가네 하는 문제까지 연결될 수 있다. 하지만 여기서 다루진 않고...
내가 관심을 가진 부분 중에 하나는,
임시이사의 정이사 선임행위가 무효라고 하는 대법원 판결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 위의 단지일보 기사나 상지대 사태에 관심있는 블로거들이 올린 글 그리고 신문기사를 종합해 보면, 대법원이 기존의 판례를 변경하여 임시이사가 정식이사를 선임하는 권한을 가지지는 않는다라고 판시했다고 하고 이에 대해 비판하는 글들이 올라오고 있다. 그 대상판결이 바로 대법원2007.5.17.선고2006다19054전원합의체 판결 이다. 일반적으로 대법원이 기존의 판례를 변경하는 경우에는 전원합의체에서 이를 결정한다. 기존의 판례를 변경함에 따른 사안의 신중함을 고려한 것이기도 하고, 이로 인하여 사회의 혼란을 줄 수 있기 때문인데, 기존의 판례가 비록 법률상의 기속력을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사실상의 기속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아무튼, 이 상지대학교 사건에서 대법원은 기존의 판례를 뒤집고 임시이사의 정식이사 선임행위를 무효로 판시했다. 그 이유를 보자.
학교법인의 기본권과 구 사립학교법(2005. 12. 29. 법률 제7802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의 입법목적, 그리고 같은 법 제25조가 민법 제63조에 대한 특칙으로서 임시이사의 선임사유, 임무, 재임기간 그리고 정식이사로의 선임제한 등에 관한 별도의 규정을 두고 있는 점 등에 비추어 보면, 구 사립학교법 제25조 제1항에 의하여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 선임한 임시이사는 이사의 결원으로 인하여 학교법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거나 손해가 생길 염려가 있는 경우에 임시적으로 그 운영을 담당하는 위기관리자로서, 민법상의 임시이사와는 달리 일반적인 학교법인의 운영에 관한 행위에 한하여 정식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지는 것으로 제한적으로 해석하여야 하고, 따라서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은 없다고 봄이 상당하다.(출처 : 대법원 2007.5.17. 선고 2006다19054 전원합의체 판결【이사회결의무효확인청구】 [집55(1)민,203;공2007.6.15.(276),873])
이 판례에 대하여 기존의 판례를 보면 임시이사의 권한에 대하여 다른 결론을 내고 있다.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 의하여 선임된 임시이사의 권한과 의무는 이사회에서 선임되어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 취임승인을 한 소위 정식이사와 동일하다고 할 것이나, 임시이사로서는 같은 조 제2항에 의하여 조속한 시일 내에 임시이사의 선임사유가 해소될 수 있도록 노력을 하여야 할 의무를 진다고 할 것이다. (출처 : 대법원 2005. 4. 16. 자 2005마53 결정【임시이사선임】 [공2005.6.15.(228),917])
그런데 아래의 판결에서 의문스러운 것은 임시이사의 권한과 의무는 정식이사와 동일하다고 되어있지만 그 구체적인 범위와 내용까지 특정하여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 무슨 말이냐 하면, 아래의 판결은 문제가 된 사안(임시이사의 파견 기간에 관한 것)에 있어서 임시이사는 정식이사랑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이다.. 정도의 대략적인 임시이사의 법률상의 지위에 관한 설명을 하는 것이지 구체적으로 임시이사들이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그 구체적인 내용까지도 정식이사와 완전히 같다고 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이다. 정식이사와 임시이사가 완전히 같다면 그 임시이사의 임기 역시 정식이사와 같아야 할 것이고 임시이사라는 명칭을 사용하여야 할 이유는 없다. 비록 아래의 판결에서 임시이사와 그 권한과 의무는 같다고 하더라도 그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다를 수 있다는 것이고 엄밀하게 세부적인 사안까지 간다면 다를 것은 예상할 수 있다. 이 점은 위 전원합의체 판결에서도 "대법원 1963. 3. 21. 선고 62다800 판결 및 대법원 2005. 4. 16.자 2005마53 결정 등은 모두 이 사건과 사안을 달리하는 것으로서, 이 사건에 원용하기에 적절하지 아니하다"고 하고 있다.
오히려 전원합의체에서는 대법원 1970. 10. 30. 선고 70누116 판결이 임시이사가 정식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이 있다고 판시하였으므로 이 부분을 변경한다고 하고 있다. 그래서, 대법원의 종합법령정보 판례검색에서 70누116 판결을 찾아보았다.
못 찾았어.
없다 -_-.
그래서 네이버에서 찾아보았다.
그런거 안나와 -_-
검색이 안된다.
그리하여 구글까지 가게 되었다.
뭐야 그거
아무튼, 검색에서는 안나온다. 아마도 너무 오래된 판결이라서 제대로 정리되지 않고 오래된 판례공보에서나 찾을 수 있는 판례겠지만, 이상의 검색으로도 대략의 판결내용을 알 수는 있었다. 그 요지는
교육부(사립대학 감독의 주무부처)에서 파견한 임시이사의 권한은 정식이사와 동일하다.
는 취지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런데, 왜 대법원 다수의견은 위의 2005마53 판결은 적절치 않다고 했을까?
2005마53 판결은 교육부장관이 임시이사를 파견할 수 있는 기간에 관한 판결이다. 이 판결에서 대법원은 임시이사의 파견기간이 단지 4년이 아니라 더 연자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임시이사의 파견은 4년으로 제한하여 파행적 학교운영을 방지할 필요는 있는 것이지만 이를 굳이 4년으로 한정하여 그 이상의 기간을 임시운영체제로 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이 아니고, 그 이상의 임시이사도 파견 가능하며 다만, 임시이사 개인의 임기를 4년으로 제한하여 동일인이 오래 임시직을 역임하며 발생할 수 있는 폐혜를 방지하는데 그 이유가 있다고 하고 있다. 그러면서 임시이사에 의한 운영이 길어짐에 따른 공백을 방지하기 위하여 운영에 있어서만큼은 정식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진다고 하여 임시이사에 의한 파행적 운영이 불가피하다면 계속될 수 있다는 것을 판시하였을 뿐이다.
따라서 이 판결에서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 의하여 선임된 임시이사의 권한과 의무는 이사회에서 선임되어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 취임승인을 한 소위 정식이사와 동일하다고 할 것이나"라고 한 것은 이른바 일반적인 경우에 그렇다는 것이지 이들의 권한이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 까지 주는 것은 아니라고 할 것이다.
아무튼 조금은 쓸데없는 이야기 인것 같지만, 이번 2007년 판결은 기존의 70년대 판결을 변경한 것이니 40년이나 지난 지금 사회가 변하였다는 것을 이유로 얼마든지 변경될 수 있는 것이니 이 판결이 2005년의 판결을 뒤집은 것이라는 주장은 좀 아닌 것 같다.(이 부분에서는 내 생각이 다른 상지대를 구출하기 위한 사람들과 의견이 나뉘는 것 같다)
내가 진짜 관심을 가진 부분은 대법원의 2007년 판례에서 다수의견과 소수의견의 견해차이에 관한 것이었다.
임시이사-정식이사의 체제에서의 차이점과 그 문제의 해결을 바라보는 대법원의 두 가지 시선을 비교하니 많은 것을 시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2006다19054 판결에서 다투고 있는 문제는 크게 두 가지 였다.
구 사립학교법상의 절차에 따라 선임된 임시이사들이 그 선임사유가 종료한 때에 정식이사를 선임하는 내용의 이사회결의를 한 경우, 임시이사들이 선임되기 전에 적법하게 선임되었다가 퇴임한 최후의 정식이사들에게 위 이사회결의의 하자를 다툴 소의 이익이 있는지 여부
구 사립학교법상의 임시이사에게 정식이사를 선임할 권한이 있는지 여부
이 문제에서 위 1번은, 소송을 제기한 김문기 측에게 과연 이런 소송을 제기할 자격이 있는가의 문제였고,
두번째 문제는 이 소송의 본래의 목적으로 임시이사들이 정식이사를 선임한 것이 정당한 행위였는가의 문제다.
먼저 1번의 문제에 있어서는 크게 다투지는 않은 것 같다. 1번이 OK니까 2번 문제를 심판한 것 아니겠나? (보통 1번 문제와 같은 소송의 자격에 관한 문제에서 자격이 없다라고 결론이 나는 경우 2번 문제는 검토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물론 소수의견은 이에 대해 반대하고 종전의 이사들이 임시이사의 권한을 따지는 이런 소송을 제기하는 것이 이해관계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소송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나 역시 이 부분에 충분히 일리있는 주장이라고 생각하며 찬성하긴 하지만 다수, 소수 모두 2번 문제에 더 많은 에너지를 쏟은 듯 하다.
먼저 다수의견.
다수의견은 임시이사들에게 정식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을 주지 않는 것과 종전이사들이 이러한 소송을 제기할 권한이 있는가의 문제를 판단하면서, 매우 중요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을 보장한다는 헌법 제31조 제4항에 따라 인정되는 학교법인의 설립자 및 학교법인 그리고 그 운영주체인 이사들의 사학의 자유, 즉 사학의 설립 및 운영의 자유를 두텁게 보장하려는 취지"
"사립학교는 설립자의 의사와 재산으로 독자적인 교육목적을 구현하기 위해 설립되는 것이므로 사립학교 설립의 자유와 운영의 독자성을 보장하는 것은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본질적 요체이기 때문에, 이와 같은 헌법 정신은 학교법인과 관련된 법률을 해석할 때의 기본 원칙이 되어야 할 것이다.........헌법 정신에 충실하자면 학교법인의 공공성을 해치지 않는 범위 내에서 그 자주성은 최대한 존중되어야 할 것이다."
"학교법인은 사립학교를 설치·경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된 재단법인의 일종으로서 그 운영시 설립 당시의 설립자의 의사, 즉 설립목적을 존중함이 마땅하고, 이러한 학교법인의 설립목적은 그 의사결정기관 및 의사집행기관을 구성하는 자연인인 이사들에 의하여 실현되는 것이므로, 설립자가 최초의 이사들을, 그 다음에는 그 이사들이 후임이사들을, 또 그 다음에는 그 후임이사들이 자신의 후임이사들을 선임하는 방식으로 순차적으로 이사를 선임함으로써 학교법인의 설립목적이 영속성 있게 실현되도록 하는 것이 학교법인의 이사 제도의 본질이라 할 수 있다"
"임시이사에게 정식이사와 다름없는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한다면, ................ 단순히 학교 경영을 정상화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학교법인을 운영할 권한과 임무가 손쉽게 제3자에게 넘어가게 되어 학교법인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되고, 그것은 학교법인의 설립목적 및 이념의 변질로 이어져 독립된 법인격체로서의 학교법인 등에게 보장된 헌법상의 기본권으로서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등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
"임시이사 선임사유가 해소된 경우 그 임시이사들이 독자적으로 정식이사 전원을 선임하는 내용의 이사회결의를 하였다면 이러한 이사회결의에 의한 정식이사 체제로의 전환은 임시이사가 선임됨으로써 한시적·잠정적으로 제한되었던 학교법인의 사학 운영의 자유가 영구적·확정적으로 제한되는 것을 의미하게 되므로 비례의 원칙에 반할 우려가 크다는 점에서, 임시이사에 의한 정식이사의 선임은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 의한 임시이사의 선임과 같은 차원에서 논의할 수 있는 수준의 문제가 아니라고 할 것이다."
뭐 길게 썼지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사립학교의 독립성, 그리고 그 재산을 형성한 설립자의 의사의 최대 존중이 무엇보다 중요
이사들의 임무는 설립자의 설립취지를 연속적으로 계승 발전이다.
사학의 자유의 본질적인 내용은 설립자에 의한 학교의 설립목적 및 이념의 자율적 구현이다
요 정도로 요약할 수 있다
이에 반해서 소수의견의 주장은
"이미 오래전 정식이사의 직에서 퇴임함으로써 학교법인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대변할 지위를 상실하였다........이들을 학교법인의 자주성과 정체성을 확보하는 임무와 가장 근접한 위치에 있는 자라고 볼 근거가 없고 따라서 이 사건 이사회결의에 대하여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가진다고 볼 수 없다."
"설립자는 학교법인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 그 설립목적을 담은 정관에 의하여 사학의 설립 및 운영의 자유 등을 실현하는 것이지 그 외의 다른 방법으로 학교법인 및 이를 운영하는 주체인 이사의 업무에 영향을 주어서는 안 될 것이고, 이사 역시 학교법인에 대한 관계에서 관계 법령과 위와 같이 설립자의 설립목적이 화체된 정관에 따라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로써 업무를 처리하면 될 뿐 그 권한을 설립자로부터 위임받거나 설립자를 위하여 업무를 처리하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학교법인은 기본적으로 민법상 재단법인에 해당하는 것이고, 다만 그 조직·운영에 관하여 법적 규제와 행정감독을 강화함으로써 사학의 공공성을 높이기 위하여 사립학교법이라는 특별법에 의하여 설립·운영되는 특수법인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따라서 학교법인에 대하여는 사립학교법이 우선 적용되나 그 외 사립학교법에 규정되지 않은 사항에 관하여는 민법의 재단법인에 관한 규정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런데 민법 제63조에 의하여 법원이 선임한 임시이사는 일반 이사와 동일한 결의권이 있다는 것이므로( 대법원 1963. 3. 21. 선고 62다800 판결 등 참조), 비록 그 선임 주체가 다르다 하더라도 사립학교법 소정의 임시이사들 역시 정식이사와 동일한 권한이 있는 것으로 해석하여야 하고 따라서 임시이사들로 구성된 이사회에서 정식이사를 선임한 이 사건 이사회결의를 무효라고 볼 수 없다."
"다수의견이 강조하는 학교법인의 자주성 외에 공공성 역시 매우 중요한 법리일 뿐 아니라 사립학교법의 주된 입법 취지 역시 사학의 공공성 확보에 있는바, 구 사립학교법상 임시이사들에게 정식이사와 다름없는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하면 학교법인에 본질적인 변화를 가져 오게 되고 그것은 학교법인의 설립목적 및 이념의 변질로 이어져 그 기본권을 본질적으로 침해하는 결과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다수의견의 견해는 학교법인의 자주성에 지나치게 경도된 견해로서 임시이사 제도를 비롯한 학교법인의 공공성 강화를 위한 각종 제도 자체를 부인하는 것으로 귀착될 염려가 있다"
여기도 간단히 요약하면,
이사에서 잘린지 오래된 사람들이 이제와서 왜 관여함? 말도 안됨
설립자는 설립하고 정관을 만들어 그 건학이념을 만드는 사람인데, 법인으로 독립한 학교운영 지맘대로 하는 건 안됨 이사가 니 꼬붕은 아님.
임시이사의 권한에 대해 사립학교법 규정 없으니 민법에 따라야 함. 근데 민법에서 할 수 있다고 했음.
사립학교의 자율성도 중요하지만 공공성도 중요.
이 정도 되겠다.
즉, 이 사건에서 다수와 소수의견의 주요 견해 차이는
사립학교의 자율성 vs. 사립학교의 공공성
에 대한 의견 차이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사유재산제도는 자본주의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원리로 작용하고 있고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사유재산제도는 자본주의의 폐혜 또한 가져왔고 이에 대한 사회와 국가의 적절한 제한과 규제가 자본주의의 순수한 발전력을 유지시켜왔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것이 바로 수정자본주의다.
하지만 신자유주의 이후 사유재산과 사적자치가 더욱 강조되어 무한경쟁의 시대에 돌입하고, 이에 따라 경제주체간 양극화의 심화를 가져왔다. 신자유주의적 측면이 무한하게 강조딘 것이 사유재산의 보호 그리고 사적 자치의 보장이다.
보통 흔히 말하는 "내 돈 가지고 내가 쓰는데 누가 뭐라 그래"의 완벽한 제도적 구현이 바로 사유재산제도인 것이다.
사립학교에 대한 이 판결의 견해차이도 이러한 측면에서 찾아볼 수 있다.
임시이사는 설립자의 의사에 다라 설립된 학교법인의 뇌를 구성하는 매우 중요한 기관인데 학교법인의 이념과 설립취지를 계승, 발전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하는 것이니 만큼 학교의 발전을 위하여 그 연속성이 보장되도록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견해, 즉 설립자의 이념과 사상이 온전히 구현될 수 있도록, 그리하여 학교가 사회에 봉사하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견해가 다수의견의 핵심이다.
반면 소수의견의 핵심은 학교의 사유재산적, 그리고 사적자치(대학의 자율성이라 말하는)도 중요하지만, 그 이전에 그 공공적 성격을 무시할 수 없고, 그러한 공공성에서 이탈하여 학교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다고 판단되는 경우 이를 바로잡기 위하여 주무관청이 선임한 임시이사는 일탈하고 있는 학교를 정상화 하는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여야 하며 그러한 정상화와 함께 정식이사를 선임하여 학교의 공공적 성격을 충실히 구현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는 견해인 것이다.
어떤 견해가 옳으냐의 문제는 결국 판사들의 가치적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의 문제인 것일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사립학교의 설립자의 의사가 매우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나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이러한 다수의견에 찬성할 수 없다.
첫째, 사립학교를 법인인 학교법인만이 설립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설립자와 별개의 독립된 인격체로 하여금 학교를 운영하게 함으로서 학교가 개인의 사유물이 아님을 천명하려 한 것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학교가 설립자의 설립취지를 구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임은 당연하지만, 그것이 학교의 유일한 설립취지가 되어서는 아니되며, 법에서 인정되는 교육의 중추를 담당하는 기관으로서 반드시 교육의 공공적 이념과 헌법에서 정하고 있는 교육의 권리와 의무를 실현하는데 충실하여야 함이 우선적으로 고려되어야 할 것이며,
둘째, 학교법인의 이사는 그 설립자의 의사를 구현하는 수명자가 아니고, 그 학교의 정관과 또한 그 정관에 비록 표현되어있지 아니하더라도 공공적 기관인 학교가 구현해야 하는 헌법적 가치의 실현을 위하여 선량한 관리자로서 학교를 운영하여야 하는 주체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다라서 설립자의 의사 또는 그 설립취지가 헌법에서 정한 교육의 가치를 훼손한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당연히 그 공공성을 우선하여 설립자의의사에 반하는 운영의 원칙을 수립하고 이를 시행할 책임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시이사 체제는 학교운영의 비합리적, 비헌법적, 불법적인 현실의 타파를 위하여 필요한 것이며 이러한 임시이사의 선임사실은 설립자의 건학이념의 훼손을 수반하는 경우도 있으나 더 중요한 것은 학교가 가지는 공공적 성격과 헌법적 가치를 훼손하였다는 것을 말해주는 가장 확실한 사실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점을 종합하여 볼 때 임시이사의 선임으로 해임되거나 그 임기가 다한 정식이사는 교육의 공공성을 해하였었다는 것 또한 추론할 수 있다. 이러한 종전이사들이 학교의 공공성을 회복하기 위하여 선임된 임시이사들의 권한을 다툴 권한이 있는지 여부에 있어서 그들이 이를 통하여 구현하고자 하는 것이 불법적 학교운영의 반성에서 나온 학교 정상화의 의지인지, 아니면 단순한 사유재산으로서의 학교재단의 탈취에 있는지 분명하게 고려할 필요가 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셋째, 임시이사는 선량한 관리자로서 비정상적인 학교의 운영을 정상화 하고 이를 통하여 학교의 공공성을 회복함은 물론, 학교의 정관에서 설명하고 있는 설립당시의 건학 취지와 이념을 구현하는 것에 최선을 다할 의무가 있다. 따라서 그 권한의 행사 역시 이러한 전제하에서 이루어져야 할 것이며 이를 위반한 임시이사 권한의 행사는 관리감독기관인 교육과학기술부의 몫으로 두어야 할 것이며 법으로 강제하는 것은 불필요하고 또한 개별적인 사례에 적용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하는 것 또한 부적절하다. 따라서 그 임시이사가 정식이사를 선임함으로 인하여 학교의 연속성과 설립취지의훼손이라는 다수의견의 견해는 일응 가능할 수도 있다고 볼 여지는 있으나 임시이사의 섬임의 취지나 학교의 공공적 성격을 고려한다면, 이미 불법적 운영으로 인하여 훼손된 그 설립취지의 연속성이 깨진다는 것은 인정하기 어렵고, 임시이사가 설립취지에 반하는 결정을 하여 정식이사를 선임하는 경우 행정청이 이를 심사하여 판단할 문제이며 그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보여진다. 그러므로 임시이사가 정식이사의 선임권한이 있는가의 문제를 학교의 연속적 운영에 대한 단절을 의미한다고 보는 것은 기존의 임시이사 체제가 학교의 자율성을 박탈한다는 일방적 견해로 보아 부정할 것이 아니라, 학교의 불법적 운영에 따른 이사회와 학교법인의 정상화를 통한 학교 설립이념 및 공공성의 정상화 과정으로 본다면 정식이사 선임권한을 배제할 이유도 없다.
이 판결에서 매우 고무적인 것은,
소수의견을 낸 판사인 이홍훈 판사의 견해다.
학교의 공공성에 초점을 두고 판단한 이홍훈 판사의 견해와 시선에 매우 찬성하는 바다. 이홍훈 판사의 견해를 보면 다음과 같다.
7. 대법관 이홍훈의 반대의견에 대한 보충의견
대법관 이홍훈은 다음과 같이 반대의견을 보충하고자 한다.
가. 우리 헌법 제31조 제4항은 “교육의 자주성·전문성·정치적 중립성 및 대학의 자율성은 법률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보장한다.”라고 규정하고, 교육기본법 제5조 제1항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는 교육의 자주성 및 전문성을 보장하여야 하며, 지역의 실정에 맞는 교육의 실시를 위한 시책을 수립·실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는 한편, 사립학교법 제1조는 “이 법은 사립학교의 특수성에 비추어 그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함으로써 사립학교의 건전한 발달을 도모함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규정하여, 교육의 자주성이 보장됨을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앞서 본 바와 같이 헌법 제31조 제4항은 ‘대학의 자율성’이 보장된다고 규정하고, 교육기본법 제5조 제2항은 “학교운영의 자율성은 존중되며, 교직원·학생·학부모 및 지역주민 등은 법령이 정하는 바에 의하여 학교운영에 참여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여, 대학 및 학교운영의 자율성 보장에 관하여 규정하고 있다.
위와 같은 교육의 자주성 및 학교운영의 자율성 보장의 원칙은 이른바 교육자치의 보장을 의미하는 것인데, 위 헌법 및 법률의 관련 규정을 종합하면, 교육자치란 교육공동체인 학교에서 교육 및 학교생활에 관련된 사항이 교육의 주체인 교직원, 학생, 학부모 및 지역주민 등의 참여하에 외부의 부당한 간섭이 없이 자치적으로 결정되고 수행되도록 하는 것을 말하며, 이는 최대한 존중되어야 마땅할 것이다.
나.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헌법은 제31조 제1항에서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같은 조 제3항, 제5항, 제6항에서 “의무교육은 무상으로 한다.”, “국가는 평생교육을 진흥하여야 한다.”, “학교교육 및 평생교육을 포함한 교육제도와 그 운영, 교육재정 및 교원의 지위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은 법률로 정한다.”라고 규정하며, 교육기본법 제9조 제2항은 학교는 공공성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같은 법 제11조 제1항은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에게 학교를 설립·경영할 의무를 부과하는 한편, 사립학교법 제1조는 사립학교의 공공성을 앙양함으로써 그 건전한 발달을 도모하여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위 규정들을 통하여 우리 헌법 및 법률은 국민에게는 천부적으로 교육을 받을 권리가 있고, 국가는 이를 위하여 교육제도를 운영할 책임이 있으며, 교육에는 공공성이 있음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이에 따라 교육 및 사립학교 관계 법령은, 교육의 다양성과 창의성을 지향하는 사립학교의 특수성을 존중하면서도, 사립학교는 국가나 지방자치단체의 위임을 받아 공교육의 일익을 담당하는 교육기관으로서 공공성이 있으므로 그 운영 주체에 대하여 교육목적에 적합하게 사립학교를 설치·경영할 의무를 부과하고 그에 따라 엄격한 통제를 하고 있다. 정규의 사립학교는 원칙적으로 학교법인만이 설치·경영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사립학교법 제3조) 사립학교와 그 설립자의 연관성을 단절시킴으로써 사립학교가 사적 지배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학교법인의 설치·운영에 있어 민법상의 재단법인보다 높은 공익적 통제를 가하여 학교교육이라는 그 본래의 설립목적에 적합한 형태로 운영되는 것을 확보하기 위하여 필요한 여러 가지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있다. 학교법인의 이사는 엄격한 자격요건을 구비하여야 하고, 이사의 취임에는 민법상 재단법인의 이사취임과 달리 관할청의 취임승인이 필요하며 취임승인을 받은 이후라도 일정한 사유가 발생하면 관할청이 취임승인을 취소할 수 있도록 규정되어 있다. 이는 학교법인의 이사에게 국가공무원에 준하는 청렴성과 함께 관련 법률과 정관에서 정한 의무의 준수를 요구하고, 그러한 의무를 준수하지 아니할 경우 엄격한 통제를 가하여 학교법인이 설립목적에 적합하게 운영되도록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것이다.
따라서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의 자주성 및 학교운영의 자율성은 교육의 공공성에 저촉되지 아니하는 한도 내에서만 존중될 수 있는 것이라고 보아야 한다.
다. 학교법인은 정관을 가진 독립된 재단법인이다.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의 자주성 및 학교운영의 자율성은 교육의 주체인 교직원, 학생, 학부모 및 지역주민 등이 같이 참여하여 그 학교법인의 정관에 담겨 있는 설립목적과 교육 이념 및 목적의 취지에 맞게 학교법인을 운영함으로써 실현되는 것이지, 설립자나 그의 영향력하에 임명된 이사가 학교법인의 운영에 참여할 것을 보장함으로써 확보되는 것은 아니다. 설립자나 그의 영향력하에 임명된 이사가 순차적으로 후임이사들을 선임하여 나아가야만 학교법인의 설립목적이 영속성 있게 실현되는 것이며, 그것이 학교법인의 이사 제도의 본질인 것이자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의 자주성 및 학교운영의 자율성에 부합하는 것이라고 해석하는 것은, 개인이 직접 정규의 사립학교를 설립하는 것을 원칙적으로 금지하고 학교법인을 별도로 두어 그 정관에 정해진 교육 이념과 목적에 따른 교육이 실시되도록 하여 사립학교와 그 설립자의 연관성을 단절시킴으로써 사립학교가 사적인 인적 지배나 재산권의 대상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하는 한편, 교직원, 학생, 학부모 및 지역주민 등이 법령에 정하는 바에 의하여 학교운영에 참여할 수 있도록 함으로써, 교육의 자주성 및 전문성을 보장하고 아울러 교육의 공공성을 확보하려는 우리 헌법의 정신을 무시하는 위헌적인 해석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라. 학교법인의 이사는 선량한 관리자의 주의의무로써 학교법인의 정관에 따라 업무를 처리하여야 하는 수임자의 지위에 있는 것이고,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의 자주성 및 학교운영의 자율성은 그 이사들이 정관의 취지에 따라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각자의 임무를 충실히 함으로써 달성되는 법리인 것이다.
마. 우리의 법제는, 공익법인에 관하여는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을 별도로 두어 재단법인 또는 사단법인에 관한 민법의 규정을 보완하도록 함으로써 그 공익성을 유지하며 건전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한편(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 제1조), 공익법인 중 학교법인에 관하여는 사립학교의 자주성을 확보하고 공공성을 앙양하여 그 건전한 발달을 도모하기 위하여 사립학교법에 더 엄격한 규정들을 두고 있다( 사립학교법 제1조).
그런데 우리 헌법과 구 사립학교법뿐만 아니라 공익법인의 설립·운영에 관한 법률의 그 어디에도 구 사립학교법 제25조 제1항에 의하여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 선임한 임시이사의 권한을 정식이사의 권한보다 제한하는 규정은 전혀 두고 있지 아니하다. 그러므로 법의 일반 원칙에 따라서 구 사립학교법상의 임시이사는 민법상의 임시이사와 마찬가지로 정식이사와 동일한 권한을 가진다고 해석되어야 한다. 이와 같은 해석은 사립학교의 공공성 및 그 건전한 발달을 도모하기 위한 사립학교법의 입법목적과도 부합할 뿐만 아니라, 사립학교에서의 교육의 자주성 및 학교운영의 자율성에도 맞는다고 할 것이다. 구 사립학교법상의 임시이사는 정식이사와 완전히 동일한 권한을 가지게 됨으로써 학교법인의 정관 및 그 교육 이념과 목적에 따라 더 자주적이고 자율적으로 사립학교를 운영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바. 우리 법제는 사립학교에 관하여 위와 같이 엄격한 규정들을 두고 있으므로 만약 사립학교의 임시이사의 권한에 제한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면 그에 관한 명시적인 규정을 두었을 것이다.
다수의견은, 사립학교의 임시이사 선임사유가 해소된 경우의 정상화 방법에 관하여 아무런 규정을 두고 있지 아니하던 구 사립학교법하에서는 민법의 일반 원칙으로 돌아와 해결함이 상당할 것이라고 한다. 민법 제63조는, “이사가 없거나 결원이 있는 경우에 이로 인하여 손해가 생길 염려 있는 때에는 법원은 이해관계인이나 검사의 청구에 의하여 임시이사를 선임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다수의견은 이 규정을 유추적용하여 해결하자는 취지로 보여진다. 좀더 자세히 말하면, 민법 제63조에 의하여 법원이 임시이사를 선임하면 그 임시이사는 정식이사를 선임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는 임시이사가 되므로 그들로 하여금 정식이사를 선임하도록 하여 사립학교를 정상화시키자는 견해로 보인다.
그러나 구 사립학교법 제27조 본문은 “ 민법 제59조 제2항ㆍ 제61조ㆍ 제62조ㆍ 제64조 및 제65조의 규정은 학교법인의 이사장과 이사에게 이를 준용한다.”라고 규정하여, 민법 제63조를 준용대상에서 명시적으로 제외하고 있으므로, 다수의견과 같은 해석은 무리한 해석이라고 하지 아니할 수 없다.
구 사립학교법 제25조에 의하면, 임시이사는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다. 그런데 다수의견과 같이 보게 되면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게 있던 임시이사 선임 권한이 일부 법원으로 옮겨지게 된다. 헌법이 보장하고 있는 권력분립의 원칙에 비추어 볼 때 명시적인 입법적 근거도 없이 이러한 해석이 과연 가능한 것인지 심히 의문이다.
나아가 구 사립학교법 제20조 제2항은 “임원은 관할청의 승인을 얻어 취임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바, 민법 제63조에 의하여 법원이 임시이사를 선임한 경우에도, 다시 구 사립학교법에 의하여 관할청의 승인을 얻어야만 취임할 수 있다고 해석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구 사립학교법상 관할청은 교육인적자원부장관 또는 교육감이다( 구 사립학교법 제4조). 만약, 관할청의 승인이 필요하다는 해석론을 취하게 되면, 다수의견과 같이 민법 제63조에 의하여 법원이 임시이사를 선임하더라도,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의 승인을 얻어야 취임할 수 있다는 결과가 된다. 그렇게 되면 결국에는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의 승인을 얻어야만 취임할 수 있는데, 그 임시이사가 처음부터 교육인적자원부장관에 의하여 선임된 임시이사와 무엇이 다르다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할 것이다. 다수의견에 대한 보다 근본적인 의문은, 민법 제63조에 의하여 법원이 선임한 임시이사가 후임 이사를 선임하면 학교법인의 정체성과 자주성이 유지될 수 있고, 구 사립학교법에 의하여 교육인적자원부장관이 선임한 임시이사가 후임 이사를 선임하면 위 정체성과 자주성이 침해될 우려가 있다고 보는 점이다. 이와 같은 견해에 합리적인 근거나 법적인 정당성이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할 것이다(또한, 우리 헌법은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보장하고 있는데, 학교법인의 정체성에 대한 지나친 강조는 교육의 평등권을 보장하고 있는 헌법 정신에 위반될 우려도 있다).
법은 정의에 대한 의지이고 정의에 봉사하기 위한 질서와 규칙이다. 법의 이념은 정의 이외의 다른 것이 될 수 없고, 모름지기 법을 해석함에 있어서는 법의 내용에 담긴 정의의 이념이 훼손되지 않도록 조심하여야만 한다. 우리 교육기본법은 교육의 이념을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모든 국민으로 하여금 인격을 도야하고 자주적 생활 능력과 민주 시민으로서 필요한 자질을 갖추게 하여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게 하고 민주국가의 발전과 인류 공영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이바지하게 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교육기본법 제2조). 이와 같은 교육의 이념, 그리고 앞서 본 교육의 공공성과 아울러 정의로운 법해석에 의한 법적 안정성 및 법적 정당성의 보장은 우리가 추구하여야 할 궁극적 가치 내지 정신이라는 점 등을 종합하여 생각하여 보면, 비영리 공익법인이면서 공법관계와 사법관계가 혼합되어 적용되는 특수법인인 학교법인의 임시이사에 대한 지위와 권한을 명시적인 법적 근거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자의적인 해석에 의하여 제한하는 것은 법 해석의 한계를 일탈한 위법한 해석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사. 앞서 본 법리와 같이 학교법인의 임시이사들은 법령상의 제한이 없는 한 정식이사와 완전히 동일한 권한을 가지는 것이므로, 이 사건에서 피고 학원의 임시이사들이 피고 학원의 정상화를 위하여 정식이사들을 선임한 이사회결의는 적법하여 그 효력이 있다고 보아야만 한다.
아. 이상과 같은 이유로, 법적인 근거도 없이 구 사립학교법상 임시이사들의 권한을 제한하여 해석하려는 다수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너무 길다고 여겨지만 위의 "다." 부분과 마지막의 푸른 글씨만 봐도 충분하다.
이번 상지대 사건에서 법원의 판단에는 매우 섭섭함을 금할 수 없으나, 교육과학기술부의, 그리고 위원회의 적절한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또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육의 이념에 구현을 위하여 학교가 하여야 할 일이 과연 무엇이며 여기서 교육당국이 할 수 있는 일이 과연 무엇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다. 학교가 길러내야 하는 인간이 학교의 설립이념과 취지를 온전히 구현하는 인간인가 아니면 사회와 인간을 위하여 봉사하여 인류발전에 이바지 하는 인간인가 하는 것이다. (물론 두 가지가 충돌할 때 이야기다. 두 개가 같으면 상관없다)
사유재산은 보호되어야 한다.
그러나, 사유재산의 보호는 그 사유재산이 정당하고 올바르게 모아지고 사용된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다.
우리 법이 학교의 설립을 법인으로 제한하고 있음은 설립자와 학교를 분리하여 학교가 설립자의 배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배를 채우게 하기 위한 여러 조치들 중에 하나다. 설립자는 학교를 세워 사회에 봉사한 인재를 키우는 것에 주력하여야 할 것이지만, 그를 통해 자신에게 봉사할 인력을 키우는 것이 허락된 것이 아니다.
게다가 이번 상지대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설립이념따위에는 관심도 없는 찬탈된 설립자의 지위에 있는 모리배가 낄 자리를 주는 것은 결코 우리 헌법에서 말하는 사학의 자율성은 아니다. 그것은 그냥 탈법과 불법을 위한 훈육집단에 불과하다.
교육과학기술부와 사분위의 현명한 판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민노씨가 수감되면(?) 나는 사식을 넣어줄 것이다. 사비로.
(하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지난번 글을 보니, 내가 봐도 이해하기 더 어렵게 한 것 같아서 좀 분위기를 바궈 보기로 했다.
그냥 가볍게... 가자.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내용을 중심으로 가 보는게 쉽지 않겠나?
최근 장마로 인해, 4대강 공사 현장 곳곳이 침수 등 수해가 발생했다고 한다.
물론, 조중동이나 KBS 등 정권에 친화적인 언론(?) 등에는 기사가 거의 나지 않았지만 조금만 시선을 다른 데다가 돌려보면 그런 사실들을 알 수 있다. 네이버만 해도 "4대강 홍수"라고 치면 신문기사만 이렇게 많이 나올 정도니 말 다했지 뭐.
아무튼, 이번 정권의 가장 큰 업적 내지는 사업은 바로 이 4대강이 될 전망이다.
다른 일도 많이 있겠지만 지난 대선에서부터 대운하로 시작하는 강 관련 사업이 제일 큰 사업이 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한 것 아니겠나?
근데 왜 이 정권은 4대강 사업을 할까?
최근 글로벌 경제 위기가 있었던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렇다면 이런 글로벌 경제 위기가 왜 왔는가 그리고 이 것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하는 문제는 새로 출범한 이명박 정권이 풀어야 할 가장 큰 문제가 된다. 게다가 경제대통령을 표방하는 이명박 대통령으로서는 그것을 무시할 수 없다.
김대중정부의 겨우 IMF라는 큰 짐을 지고 시작했지만 우리 사회가 김대중을 뽑은 것은 경제적 발전 보다는 민주화의 결실을 원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는 사실이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대통령 보다 경제적인 식견이나 능력이 탁월했던 대통령을 뽑으라면 난 주저없이 김대중을 뽑을 것이다) 노무현 정부 역시 경제적인 기대감을 가지고 출발했다기 보다는 민주적 정치적 요소들의 집합체였으니, 그리고 소위 이른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주장의 가장 큰 핵심은 경제 였으니 김대중 노무현 정권의 경제적 능력과 그 업적과는 상관 없이 이명박 정부에 있어서 경제 성장 또는 경제 회복 등등 경제적 능력의 현실화 또는 경제적 발전의 현실화는 매우 중요한 문제가 된다.
(가끔 내가 노무현이나 김대중 정권과 비교하기도 하고 약간은 가치적으로 치우친 언어를 사용하거나 그런 뉘앙스를 풍기는건 그냥 느김일 뿐이다. 나는 가급적 최대한 객관적으로 이 글을 쓰고 싶다. 물론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그것은 순전히 내 능력이 모자라기 대문이거나 당신의 글 읽기 능력이 덜어지기 대문일 것이라고 그냥 믿자. 제발. 난 사찰을 당하고는 못 살 사람이란 말이다. 물론 정부가 앞으로 그런 일 없을 것이라 했으니 믿어도 되겠.......지?)
글로벌 경제위기는 이전에도 항상 있어왔다. 얼마전 미국의 서브프라임모기지의 붕괴에 따른 경제위기 전에는 일본의 부동산 버블 붕괴에 따른 위기도 있었고 그 이전에는 유럽연합의 성장으로 인한 타격도 있었다. FTA 대문에 위기가 오기도 했었고, 석유파동이나 다른 여러가지 이유로 경제적 위기는 항상 있어왔다. 사실 뭐 우리나라가 언제 편안하게 장사하던 때가 있었나 싶기도 하다.
그런데 이번 위기는 좀 다르다.
이번 위기가 남다른 이유는, 그동안의 다른 경제 위기와는 달리 미국의 경제위기였기 때문이다.
미국의 경제위기라고 하는 이유는 그 이전에는 양측의 경제주체중의 일부에 발생한 문제로 인하여 다른 쪽에 영향을 준다던가 미국이 아닌 다른 나라의 문제로 인하여 미국에서 문제가 커지는.. 그런 류의 문제였다(물론 미국의 경상수지가 항상 엉망이긴 했다) 그런데 이번 서브프라임으로 부터 시작한 위기는 미국 내부의 문제로 발생한 것이었다. (이건 보기에 따라서는 달리볼 수 도 있는 문제인데, 그냥 내가 이렇게 생각한다는 것만 알고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가자.)
최근 이라크전이나 아프간전에서 미국은 다른 나라를 공격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따지지 말자. 이라크가 정말 핵을, 대량 살상무기를 가지고 있었는지는 중요하지 않고 911테러는 누가 했는지 묻지 말고 아무튼 미국은 두개의 큰 전쟁 그리고 국소적으로는 몇번의 전투를 해치웠다. 미국의 전쟁은 우리나라의 전쟁이나 다른 나라의 전쟁과 좀 다를 수 있다. 전세계 유일의 강대국인 미국의 전쟁은, 물량이다. 마구 쏟아붙는 거다. 항공모함 한대의 유지비용이 우리나라 1년 예산의 얼마를 차지하네 뭐네 하는 얘기는 많이 들어봤을 것이다. 그런데 미국은 그거를 그냥 몇 대를 보내버린다. 군인도 많이 보내지만 엄청나게 보낸다. 전투기 한대가 싸구려라고 할 만한 것들이 몇백억씩 하는데 그걸 몇십대씩 보내고 그러면서 또 몇십대씩 사고 한다. 그러니까 돈을 엄청나게 벌게 된다. 미국이? 아니 군수물자를 생산하는 방위산업체들이 말이다. 대부분의 비싼 장비를 생산하는 보잉이니 록히드마틴 같은 회사들은 다 미국회사고, 그 회사들이 돈을 엄청 벌게 된다. (이래서 방위산업체들이 전쟁을 일부러 땡기네 뭐네 하는 소리가 나온다. 평화는 그들에겐 적일 수 밖에 없다) 그 돈을 그냥 두고 바라만 봐도 기쁘지만, 쓴다. 또 막 쓴다. 그러다보면 돈이 사회에 많이 풀리고 ...... 아무튼 이러면서 경제가 풍성해 지면서 막 돈이 남아돌아 주체를 못하는게 정상이다.
그런데 위기가 왔다.
부동산의 거품이 빠지면서 너도나도 죽어 나자빠지겠다는 소리가 나온다.
아무튼 미국이 그렇게 경제위기에 퐁당 하고 빠져버렸다.
최근에 연이어 발생한 미성년자 성폭력 사건 때문에 이른바 화학적 거세라는 새로운 조치에 대한 논의가 한창이다.
얼마전 국회에선 이른바 "화학적 거세 법안"이 통과되었다고도 한다.
화학적 거세(化學的 去勢) 법안
- 일반적으로 화학적 거세법안이라고 불리우나, 정식 명칭은 "상습적 아동 성폭력범의 예방 및 치료에 관한 법률"로, 한나라당의 박민식 의원의 대표발의로 2010년 6월29일 국회 제291회 제8차 본회의에서 통과되었다.
이 법률안은,(이하 내용은 법안 제안이유임)
최근 사회적으로 문제되고 있는 성폭력범 중 특히 13세 미만의 아동 성폭력범에 대하여 강력한 처벌이 여러 특별법에서 시행 중이지만, 1년 이내 재범율이 40%에 이르는 등 재범방지에는 한계가 있어, 아동에 대한 성폭력범은 성인에 대한 성폭력범과는 다른 정신적·사회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므로 강력한 처벌로 일관하는 것보다는 범죄자 특성에 맞추어 처우를 달리하자는 것임.
잠재적인 피해자인 우리 어린이들을 두텁게 보호하기 위하여 아동 성폭력범에게는 “처벌보다는 치료”를 해주거나 양자를 병행하는 것이 재범율을 낮추는데 효과가 있다는 것이 여러 선진국의 연구결과이다.
특히 미국 캘리포니아주는 1997년부터 시행되고 있는 상습적 아동 성폭력범에게 성욕을 조절할 수 있는 호르몬 주사를 주기적으로 투여하는 약물치료요법(일명 화학적 거세 치료요법)을 심리치료와 병행하고 있는데 아동 성폭력범의 재범율을 낮추는데 현저한 효과가 있다고 보고되고 있어, 이와 같은 상습적 아동 성폭력범에게 재범율을 낮추기 위하여 심리치료 등과 더불어 약물 치료요법의 법적 근거를 마련하여 실시하고자 하는 것이다.
성범죄자에 대한 다양한 시각을 통한 대처에 관해서는 일응 환영할만하다. 하지만 화학적 거세가 가지고 있는 한계점이나 그 사회적인 영향에 대해서는 과연 얼마나 검토가 이루어졌는지 그리고 그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어느정도이며 우리 사회의 성숙도가 어느 수준인지의 문제는 좀 더 깊이 고민해 봐야 하는 문제가 아닐까 한다.
(여담으로, 이런 점에 있어서 법안의 발의한 박민규의원실에서 관련 연구보고서를 발간했다는 사실은 매우 환영할만한 것이 아닐 수 없다. 해당 연구보고서를 아직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내용에 대해서는 말할 수는 없지만, 이런 부분에 대한 연구가 이루어지고 그것이 입법활동으로 이어져 실제 법안이 국회를 통화했다는 사실은 향후 입법과정에서 매우 바람직한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한다.)
화학적 거세법에서는 아동성범죄자에 대하여 화학적인 방법으로 성충동을 억제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미성년자를 대상으로 한 성범죄에 대하여 단순한 처벌이 아닌 다른 방법을 모색하겠다는 자세는 매우 환영할만한 조치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분명히 그 한계와 처우의 문제에 있어서 몇가지 검토하여야 할 사항이 있다.
먼저, 화학적 거세는 결코 처벌의 방식이 아니라는 점이다.
화학적 거세는 법에서도 밝히고 있는 바와 같이 일종의 "치료 요법"이다.
화학적 거세는 처벌이 아니며 치료의 한 방법이므로, 당사자에 대하여 강제적으로 시행하는 것이 불가능하며 대상자의 동의를 전제로 한다.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알려진 약물의 주사 이외에 심리치료를 병행하도록 하고 있다. 법안에서는 화학적 거세 치료요법을 시행하기 위한 전제조건으로서 다음 과 같은 조건을 열거하고 있다.
대상자의 동의가 있을 것
대상자의 비정상적 성적 충동과 관련된 것으로서 대상자의 심각한 질병, 정신적 장애 또는 고통을 방지·치료하거나 완화하기 위한 것으로써 의학적으로 알려진 것일 것
대상자는 25세 이상이어야 할 것
과도한 신체적·정신적 부작용을 초래하지 아니할 것
의학적으로 알려진 바대로 시행되어야 할 것
이러한 조건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당사자가 거부하거나, 당사자에게 질병 기타 다른 이유로 이 시술을 하기 곤란한 경우엔 적합하지 않다. 또한 화학적 거세 치료대상자가 그 치료에 관한 사항을 거부 또는 게을리한 경우 7년 이하의 징역 등 처벌을 수반하기 때문에 시행이 어려운 경우도 분명히 존재한다.
화학적 거세는 분명히 처벌이 아니라 치료행위다. 우리 형법에서는 범죄자를 처벌하는 형벌의 종류를 9가지로 한정하고 있다.
제41조(형의 종류) 형의 종류는 다음과 같다.
1. 사형
2. 징역
3. 금고
4. 자격상실
5. 자격정지
6. 벌금
7. 구류
8. 과료
9. 몰수
치료행위에 불과한 화학적 거세는 대상자의 동의를 요한다는 점에서 분명히 한계를 가지고 있다. 게다가, 신체적 기능의 저하를 가져오는 의학적 행위라는 점에서 그것이 치료행위인가의 여부에 대해서도 의문은 있다. (이른바 치료행위라고 할 수 있기 위해서는 치료행위로 인하여 신체적 기능의 향상을 가져오는 결과를 이끌어내야 한다. 비용을 위한 성형수술이 치료행위가 아니고 그에 따라 건강보험이 적용되지 않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당사자의 동의를 요구한다는 점에서 이를 강제할 수 있는 장치는 없고 그저 당사자의 의사에 맡겨져야 한다. 이를 강제하기 위한 행위는 또다른 인권 침해행위를 유도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그 한계의 극복을 위해서는 다른 조치가 필요할 수 있다.
분명히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를 치료의 대상으로 보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정책적 모색은 매우 환영할만한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살펴보아야 하는 것은 그것이 과연 정신적 질환 또는 신체적 질환에 의한 범죄인가 하는 것이다.
화학적 거세를 인정하고 이를 시행한다는 것은 그 행위가 정상적인 정신상태에서 이루어지지 않은 일종의 병질적 반응이라는 것인데, 이렇게 된다면 그 행위의 가벌성이 문제된다. 병에 의하여 하게 된 피할 수 없는 행위가 어떻게 처벌의 대상이 되는가 하는 것이다. 법률에 의하여 치료의 대상으로 인정된 행위를 처벌의 대상으로 볼 수 있을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발생한다. 음주운전과 같이 그 원인행위를 스스로 유발한 경우 그 가벌성을 원인행위에서 찾는 것은 문제가 없을지라도 스스로 그 병적인 상태를 유발하였다고 볼 수 있는 여지가 없는 미성년자 대상의 성범죄자가 가벌성이 있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을까 한다.
다시말하면, 그 행위를 정신병 또는 기타 치료의 대상이 되는 병질에 의한 것이라고 정의한다면 그 사람에 대해서는 형법상 책임조각사유에 해당할 수 있다는 것이다. 화학적 거세를 시행하는 것에 대한 비판이 있을 수 있는 부분이다. 이러한 부분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이번에 통과된 법에서는 이 부분에 대해 침묵을 지키고 있다. 게다가 형법 제10조에서 정한 심신미약자에 대하여 검사가 치료를 청구할 수 있도록 하여 심신미약에 의한 가벌성이 면제되는 경우를 미리 예상한 듯한 조문까지 마련되어있다.
화학적 거세를 도입하는 것은 분명히 형사적 대응이 아닌 의학적 대응이 필요한 성범죄자를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분명 진일보한 점은 있다. 하지만, 화학적 거세를 인정한다는 것이 불러올 수 있는 질병에 의하지 않은 정상적인(?) 성범죄자의 심신미약 주장에 대하여 관대해 질 수 밖에 없는 길을 열어두엇다는 것도 피할 수 없는 비판이기도 하다.
생각건대, 화학적 거세를 논하기 전에 성범죄자 또는 그 외의 누범에 대한 교정행정의 문제점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다고 본다. 법무부의 무능 탓인지, 그것이 아직 우리 사회의 한계인지 아니면 어떤 이유에서일지는 모르나, 지금까지 밝혀진 교정행정의 수 많은 실패사례 중에서 단연 으뜸이 되는 것은 미성년 대상의 성범죄자의 누범화이다. 성범죄의 재범화에 대한 비난 보다는 교정행정의 철저한 실패를 인정하는 것이 오히려 문제해결에 한 발짝 더 다가서는 길이 아닐까?
얼마전 성범죄자에 대해서는 택시운전을 하지 못하도록 하는 조치를 단행할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다. 이 조치를 보면서 분노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은, 첫째, 수 많은 선량한 택시운전기사들을 예비적 범죄자로 몰아간다는 직업적 차별행위와, 두번째로, 처벌로 인하여 그 사람의 범죄행위에 대한 처벌을 끝마치고 사회가 그들 역시 포용하여야 한다는 교정행정의 제1원칙의 위배와 일사부재리의 원칙의 위배, 그리고 전과자의 사회복귀를 저해하는 행정청의 무책임함 때문이었다.
화학적 거세의 도입에 대해 논하기 전에 미성년자에 대한 성범죄가 만연하게 된 원인을 찾아 해결하고자 하는 행정기관과 정책결정권자들의 진지한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 글을 스면서도 좀 조심스러운게,
최근에 문제된 총리실의 민간인 사찰.....이 나라고 예외일 수 없다는 점이 좀 껄그럽긴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명박정권은 정말 없어져야할 나쁜 정권이니 뭐니 하려는건 아니니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대다수의 사람이 나하나 쯤이야 하고 사는 이 시대에 나 하나쯤이야 이런 글 올려도 되겠거니 하는 마음에서 쓴다면 좀 지나친 낙천적인가 -_-
아무튼, 뭐 한나라당이 뭐 그렇게 태생부터 더러운 당일리도 없고, 이 정권이 나라를 팔아먹으려 작정한 그런 정권도 아니고, 잘 살아보자고 하는 일인데 너무 걱정할 것은 아니라고 본다. 그까이꺼, 이명박 대통령도 좀 더 잘 살아보자고, 국민들이 더 좋은 세상에 살게 해 주겠다고 저리 노력중이니 내가 이런 글 쓴다고 괴념치 않으리라 본다.
총리실의 사찰 때문에 한번 문제가 되었으니 다음 부터는 그런 일 없으리라는 안도감도 있고 하니 말이다.
뭐 그렇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먼저,
좀 개괄적으로 보자.
사람들이 대다수 그렇게 이해하듯,
이명박 정권은 보수적인 정권이다. 언젠가 아마도 '서양의 지적운동'이라는 무식하리만치 두꺼운 책에서 (무슨 그냥 교양서적 같은 제목을 단 이 책은 무려 2권이고, 대학교과서 수준의 하드커버까지 갖추고 있다.) 읽은 것인 듯한데, 이념의 보수주의와 생활과 습성으로서의 보수성은 좀 구별해서 읽어주길 바란다.
생활의 보수적 습성이라고 표현한 것은 사람은 누구나 자기에게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새로운 것에 대한 약간의 경계심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인간 본래의 습성이 있다는 것. 그러니까 집에 갈 때도 웬만하면 가던 길로 가고, 밥을 먹어도 전에 먹어본 것을 먹고 새로운 것을 먹기는 좀 꺼려진다는.. 뭐 그런 습관을 말한다. 지금까지 없었던 파격적인 옷, 이를테면 탱크탑이나 비키니 이런것 보다는 조신하게 가릴 건 다 가린 그런 옷이 더 좋다.. 뭐 이런 것인데 이런 것을 가지고 이 사람은 보수주의라거니 하는 것은 이념적으론 맞지 않는다는 소리다.
그런 식으로 하면 나도 참 보수적인데, 길거리에 어떤 아가씨가 비키니만 입고 돌아다닌다면 속으론 어떨지 몰라도 세상이 망조가 들었다는 둥, 요즘 젊은 것들은 어쩌고 하면서 혀를 찰게 뻔한데, 이런 것을 가지고 그 사람은 보수적이다라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되 그 사람은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런 것은 사회적 경험이 적어 경험에서 나오는 사회적 고착성이 덜된 젊은 사람들이 더 받아들이기 쉬운 것이 당연한 것이고 그러다 보니 더 개방적인 것이지 이런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 곧 보수주의자라고 할 수 없다는 뜻이다.
뭐 설명이 길면 거시기 하니 넘어가자.
아무튼, 이명박정권은 보수적 정권이다.
경제적 측면에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를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 될지 보자.
좀 복잡하게 가자면 자유주의니 신자유주의니 하는 어려운 것을 개념적으로 봐야 하겠지만, 쉽게 보자고 했으니 좀 쉽게 이런 것을 이해해 보자.
진보든 보수건, 경제는 돌아가야 하고 경제발전의 목적은 잘먹고 잘살자 다.
잘먹고 잘살기 위해서는 당연히 경제발전이 필요한데, 경제는 당연히 자본주의를 기본으로 한다. 그건 진보건 보수건 상관이 없다. 우리나라에서는 말이다. 일부 공산주의를 주장하는 부류도 있고, 그 쪽에 더 중심을 두고 있는 쪽까지 배려하자면,
우리 경제의 근간은 사유재산제도와 사적자치(계약자유)를 근간으로하는 자본주의적 가치를 기본적으로 깔고 시작한다. 내꺼는 니가 먹으면 안되고 나도 니꺼 안먹겠다는게 사유재산제도이고, 너랑 나랑 약속한건 꼭 지켜야 하지만, 너랑 나랑 약속한걸 다른 사람이 이래라저래라 하지 말라는게 바로 계약 자유의 원칙이다.
이렇게 두 가지의 자유로운 경제주체들의 활동을 보장하는 것이 국가의 의무이고 이렇게 만들어진 시스템이 자본주의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말하는 자유주의이기도 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시스템에 문제가 생기게 되었다.
가진 사람은 계속 더 가지게 되고 못가진 사람은 점점 더 못살게 된다.
사유재산제도를 극단적으로 보호하니, 내 돈으로 뭔 짓을 하든 끼지 말라는 이기주의가 생기고, 계약자유에 따라 당사자들에게 모든 문제를 맡겨두니 가진 자에 의해서 불평등한 계약이 생겨났다.
가난한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아이들까지 조막만한 손으로 축구공을 만들지만 평생 축구공 한번 못 가져보고, 어떤 사람은 신장이며 눈알 까지 팔아야 하는 장기매매까지 생겨난다.
계약자유에 따라 그런 계약도 성립할 수 있고, 사적자치(사유재산과 계약자유의 확장판(?))에 따라 신체도 사고팔 수 있으니 없는 놈은 계속 착취당한다. 노동자(근로자라는 단어는 내가 싫어하니 노동자라고 쓰지만, 근로자라고 읽어도 좋다)는 적은 임금으로 살아야 하고 자본가는 더 많은 돈을 벌게 된다.
그래서 여기에 이전까지는 그냥 치안이나 담당하고 계약자유를 폭넓게 인정하고 방임해 왔던 국가가 개입하게 된다. 그래서 불공정 계약에 대한 규제도 하고, 사적자치라도 너무 심한 경우를 국가가 제재하는 수준에 이르게 된다. 이로서 이른바 자유방임주의가 쇠퇴하고 수정자본주의가 등장한다.
공산주의가 국가에 의한 통제를 말한다면 자본주의는 국가의 방임을 말해왔는데, 어느 순간, 그것이 곂쳐지는 순간이 오게 된다. 이것이 수정자본주의다. 물론 자본주의적 입장에서 공산주의의 요소들을 도입한 것이기 때문에 사적자치와 계약자유, 사유재산은 여전히 존중받지만, 그 한계성에 대한 문제제기에 대한 국가의 개입이 시작된 것이다.
여기에서 경제적 분야에 대한 보수주의와 진보주의의 차이가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다.
보수주의자들은 국가의 개입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그 범위를 최소화 하여야 한다는 입장이 된다. 여전히 자유주의적 가치를 유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자본주의를 지탱하는 근간이 되는 것이므로 그 가치를 훼손하면 안된다는 것이 자유주의의 기본 가치를 보호하며 나타난 이른바 신자유주의 되시겠다.
진보주의자들은 자본주의의 폐혜가 나타난 것이 그 확대된 사적자치와 사유재산의 문제이므로 그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가능한 한 확대하여 사회정의를 실현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나치게 자유를 옹호하다 보니 내 자유로 인하여 타인의 자유를 침해하게 된 것에 유려를 나타내는 것 그리고 그에 대한 국가의 개입을 점차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진보에서 말하는 경제적 민주성은 바로 이것을 나타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물론 일치하는 것은 아니고)
이러한 생각의 차이는 곧 국가정책에도 반영되었는데,
누구든 돈을 가진 사람은 땅을 아무 제한없이 살 수 있는 것이 자유주의였다면, 환경과 농업의 보호를 위해서 직접 농사를 짓지 않는 자의 농지 소유를 제한하고 타지(주로 도시) 거주자의 지방의 토지소유를 금지하도록 하는 등 국가의 개입이 적극적으로 필요하다는 것이 진보주의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제한은 최소한으로 그쳐야 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되시겠다.
진보주의의 토지 소유에 대한 이념이 반영된 제도들이 우리가 알고 있는 토지공개념이라거나, 종합부동산세 등등이다. 너무 많은 토지를 보유한 사람에게(개인의 필요이상의 토지를 보유한 자에게) 많은 세금을 물리는 것이 정당하며 이를 통하여 토지 소유를 제한하도록 하자는 진보주의자들의 정책적 실현이 바로 그런 것인데, 그런 것이 개인의 토지소유를 지나치게 제한하니 그것을 풀어버리자는 것이 신자유주의자들의 주장인 것이다.
고용과 생산의 측면에서도 비슷하게 이해하면 된다.
자본주의의 아름다운 청사진에 따르면,
누군가는 많은 자본을 가지고 많은 사람을 고용하여 그들에게 월급을 주며 생산을 하고 그 월급을 받은 사람들은 적당히 소비를 하여 경제를 발전시킨다. 단순하게는.
그런데, 많은 자본을 가진 자본가는 적게 월급을 주고 싶어하고 노동자들은 많은 월급을 받고 싶어하는데, 워낙 관계가 불평등하다보니 자본가는 월급을 조금만 주고 일을 시킨다. 그것이 싫다는 노동자는 자르면 된다. 그러다보니 점점 낮은 임금의, 어린 노동자의 노동력 착취가 생기게 되고 이로인해 도시의 슬럼화, 유아사망율의 증가, 사회적인 손실이 많아지는 문제가 생기게 되니 역시 여기에도 국가가 개입하게 된다.
어린이들의 취업을 금지시키고, 모성의 보호를 통해 여성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한 장치들을 마련하고 등등... 게다가 노동자들도 한명씩 두명씩 자본가에 대응하기 어려우니 노동조합이라는 제도를 만들어 집단적으로 그들과 맞서게 된다. 혼자서는 대응할 수 없으니까.
이런 진보적 조치들이 실현된 것이 최저임금제도니, 부당노동행위의 금지 등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계약자유와 사적자치를 강조한다. 노동자와의 근로계약을 종료시키는 행위 역시 자유롭게 이루어져야 하고(그래서 계약직을 고용하는 것이 필요하고) 임금의 인상은 사업주의 판단에 따라야 하는 것이 정상적이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의 공산주의적 요소의 결합은 이렇게 표면적으로 나타나는데, 이러한 것을 좀 근본적으로 대비시킨 것이 바로 "생산과 분배"다.
경제는 생산과 분배를 근간으로 발전하는데,
생산을 강조하여 생산이 원할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경제발전의 중심이며 이로서 분배도 그에 다라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는 것이 신자유주의.
분배를 강조하여 분배가 공정하게 이루어지면 그에 따라 생산을 위한 기반이 갖추어지고 생산이 분배 수준을 따라가게 된다는 것이 진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는 보수주의이며 신자유주의적이다.
신자유주의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기본원칙에 충실하다.
생산을 많이 하면 그 생산물을 소비하기 위한 분배는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자본가가 바보가 아닌이상, 그 물건을 살 사람을 확보하기 위해 노동자의 임금수준이나 생활수준을 적당히 향상시킬 것이다. 그래야 돈이 돌게 마련이니 말이다.
그런데,
왜 진보주의자들은 신 자유주의를 미워하는 것일까?
그리고 왜 이명박 정부의 신자유주의적 정책에 대하여 사람들은 비판을 하는 걸까?
현재 우리나라의 대통령은 이명박(李明博, 1941.12.19~ )이다. 청와대 홈페이지에서는 "굳이" 밝히고 있지 않지만, 일본 오사카 출생이며 일제시대 당시 창씨개면했던 이름은 월산명박(月山明博 츠키야마 아키히로)이며, 대한민국의 제17대 대통령이다.
별명은 좀 많은 편이라 모두 나열하긴 어렵지만, 2MB(라고 쓰고 이메가 라고 읽는다), 쥐박이 등등 그의 이름이나 회자되는 이미지를 희화화하여 비난조로 불리는 것이 대부분이다. 기존의 정치인들이 이름의 이니셜로 불리웠던 것과 같은 맥락이나, 메가 바이트 라는 용어와 결합되어 그의 뇌 용량이라거나 하는 불쾌할만한 명칭으로 해석되고 있다. 본인은 '컴퓨터+불도저'라는 의미의 '컴도저'라는 별명이 있다고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 있으나, 별로 인구에 회자 되진 못하고 주로 네티즌에게 앞서 밝힌 이메가 또는 쥐박 등등의 모욕적 별명으로 불린다.
영부인 김윤옥씨와 사이에 1남2녀를 두고 있으며 막내인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결혼을 했다. 동지상고(야간)와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으며 대학원은 다니지 않은 것으로 청와대 홈페이지에 되어있으나 몇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가지고 있다. 현대건설에 대학졸업과 동시에 입사하여 사장까지 지내고, 현대그룹에서 요직을 거쳐 국회의원과 서울시장을 지냈다. 그 외에도 여러번의 사업을 했었고, 2007년에 있었던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로 출마하고 승리하여 2008년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군대는 면제로, 사유는 기관지확장증이며, 이후 완치되었다 한다.
종교는 기독교로, 서울 압구정동에 소재한 소망교회(담임목사 김지철 목사)의 장로이기도 하다.
여기까지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이명박 대통령의 프로필이다.
이런 정도의 정보만 가지고 어떻게 대통령과 그 정권을 이해할 수 있을까? 물론 없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정권이 이해할 수 없다거나, 아니면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지만, 그리고 여러 놀랄만한 이벤트를(?) 열어주고 있지만, 왜 그들이 그렇게 행동하는지에 대한 이해도는 없는 것이 현실이다.
축구를 해도 상대방의 예상 움직임을 읽어야 하는데, 하물며 이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에게 있어서 이명박 대통령과 그 정권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과 경향을ㄹ 이해하지 못한다면 정말 문제가 될 것 같다. 그래서 준비했다.
이명박 정권 이해하기.
왜 그들은 이렇게 민주주의를 후퇴시킨다고 비판받을까? 그리고 실제로 그럴까?
왜 그들은 운하와 4대강을 꼭 하고 싶어하며 그 배경은 뭘까?
왜 그들은 세종시는 수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세종시는 과연 수정되어야 하는 것일까?
물론 쉽지 않은 문제지만 차근차근 검토해 보자.
모든 정권이 그렇겠지만,
역사적, 이념적 배경이라는 엄청난 단어로 포장하면 이해하기 점점 힘들어질 뿐아니라, 나랑 이념적 색깔이 다르면 점점 더 싫어지기 마련이니 그런 거창함은 버리고 가볍게 이해해 보자.
이번 선거에 대한 각 언론들의 코멘트다.
그도 그럴 것이, 전라도를 제외하고는 어디 하나 명함은 커녕 얼굴도 못내밀던 민주당이 인천시장부터 시작해서 강원도지사와 충남(아, 감격의 충남..ㅜ.ㅜ;;)지사, 충북지사까지, 게다가 무소속 김두관 경기도지사 당선자나, 우근민 제주도지사 당선자는 혈통상(?) 민주당에 한자락씩 걸치고 있는 사람들이고 보면, 이번 선거결과에서 친민주당 계열의 광역자치단체장은 모두 9명이다.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이건 뭐 서울이랑 경기도 건진 걸 그나마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정도다. 대구 경북이야 안방이니까 그렇다고 치고, 경남은 물론 충청도에 자신했던 강원도에 제주도까지 먹혔으니 겨우 살아있다고 숨이나 쉴 정도인 것이다.
민주당은 그저 입이 쫙 벌어질 정도고, 자유선진당은 울기 직전. 한나라당은 이미 울고 있는거 같고, 다만 아쉬운 것은 진보신당이나 민주노동당 들 개혁세력의 성적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데다가(사회당은 그나마 선전한 것 같다) 국민참여당의 유시민까지 떨어졌다는 점은 좀 아쉽기는 하다.
아무튼, 이번 선거는 친노세력의 엄청난 부활(이광재, 김두관, 안희정. 이 세사람을 빼놓고 어찌 노무현을 말하랴)이라는 점 이외에도 민주당의 헤벌쩍한 상태라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그래
표면적으로
민주당은 승리했다. 그냥 승리했다가 아니라,
완전한 승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시와 경기도가 조금 문제라고 할지 모르나, 이미 의회까지 다수당이 되어버린 그들이 뭐가 두려운가.
민주당은 승리했다 멋지게.
하지만 앞의 포스트에서 말한 것 처럼, 돈 있는 자들이 장악하고 있는 서울과 경기는 그들에게 돌아갔다. 그래서 나는 민주당이, 그리고 노무현의 가치가 그들의 돈을 향한 열망에는 못미친다고 말했다. 아니, 노무현이 그렇게 말한 가치들이 덜 중요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지켜야 한다는 우리의 마음속의 열망. 그것을 가진 사람의 수는 아직 대한민국의 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민주당은 승리하지 못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다수는
여전히 올라가는 집값에 그들의 철학보다는 그들의 밥그릇을 대입시키는 자들과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어쩌면 그 밥그릇을 찾는 자들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사실도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아이들의 식사 한끼보다는 내 아이의 영어실력에 더 많은 가치를 부여하면서 경쟁에서 이기길 바라는 것이 그저 소박한 부모의 심정이 아니라, 우리가 이 시대를 살아오면서 배워오고 채득해온 철학과 가치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우리의 철학과 가치는 어쩌면 이렇게 소박한 소시민의 소망 정도로 아름답게 그리고 아무도 몰래 포장해서 우리는 자신의 비겁함을 감추며 살고 있다.
이번 선거에서 한나라당과 그 아류 정당을 지지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꼭 묻고 싶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다.
과연, 그들의 국정운영 작게는 동네 운영의 철학과 가치에 대해 한번 생각해 보았느냐고. 그리고 우리에게 주어진 그 한표가 그들의 철학과 가치를 더 한층 강하게 확고한 기반위에 서게 하는 것에 일조했다는 사실을 인지하였느냐고.
그리고 한가지 더. 그들이 철학과 가치를 나에게 설명해 줄 수 있느냐고.
나는 이번 선거에서 MB의 아들을 보지 못했다. 그에게 피를 이어받은 그 개념없는 아들이 아니라, 그의 가치와 정신을 계승하겠다고 하는 후보자를 보지 못했다. 표면적으로 MB를 지지한다고 하지만, 그의 철학이 무엇인지 말하고, 설명하며 그에 목숨을 걸겠다고 하는 사람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보았다. 노무현의 가치를 말하고, 그 정신을 역설하며 그 철학을 논하는 자들을 보았고, 그에 목숨을 걸고 이를 지키겠다고 하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보았다.
혹시 나에게 이 정권의 철학과 가치에 대해 설명하면서 돈을 더 많이 벌어 잘먹고 잘살자 이상의 다른 그 무엇이 있는지 묻고 싶다.
경제발전 이상의 무엇이 과연 우리의 철학과 가치가 되어야 하는지 묻고 싶다.
나는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가 되기를 원한다. 가장 부강한 나라가 되기를 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남의 침략을 받아 가슴 아팠으니 내 나라가 남을 침략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도 행복을 주겠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나라가 남의 것을 모방하는 나라가 되지말고 이러한 높고 새로운 문화의 근원이 되고, 모범이 되기를 원한다.
그래서 진정한 세계의 평화가 우리나라에서, 우리나라로 말미암아. 세계에 실현되기를 원한다. 홍익인간이라는 우리 국조 단군의 이상이 이것이리라 믿는다.
혹시 이런 정도의 아름답고 소박한 가치와 철학이라도 그들의 잎에서 나온 적이 있었는지 묻고 싶다.
그리고는 다시 묻고 싶다.
당신의 가치와 철학이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의 자녀가 살아갈 이 땅에서 당신의 가치와 철학에 가장 근접한 자들이 당신이 찍은 그 사람이라는 점을 인정하는지.
노무현의 가치와 철학이 옳다고 말하지 않겠다. 김구의 문화국가론이 옳다고 하지 않겠다. 그리고 이명박의 가치와 철학이 옳다고 말하지 않는다. 그것을 판단하는 것은 당신의 몫이니까.
하지만,
우리 시대의 가치와 철학이 무엇이며,
이번 선거에서 각 정당과 후보자가 말하는 가치와 철학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는지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그리고 자신의 가치와 철학이 무엇인지 솔직하게 말해 보자. 아무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로
나는 이번에 어떤 가치와 철학에 투표하였는가 반문해 보자.
그리고
이번 선거가
과연 어떤 철학과 가치를 우리에게 가져다 줄것인지 4년동안 생각해 보자
마지막으로 당신이 투표했을지도 모르는 어떤 교육감 당선자의 말을 인용해 본다.
인터뷰에서 누군가 질문했다고 한다.
"전면적인 무상급식이라면, 부자와 가난한 자들 모두 가리지 않고 무상으로 밥을 먹게 해 주자는 것인데 그것이 옳은가?"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부자와 가난한 자들을 차별하지 않도록 가르치는 것이 교육입니다."
6월2일 지방선거가 끝났다.
언론에서는 이번 선거가 한나라당의 참패, 그리고 민주당의 약진, 그리고 또한 친노세력의 부활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럴까
그 수 많은 설화에도 불구하고,
그 많은 풍(風)에도 불구하고.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에 오세훈과 김문수가 재선되었다.
혹자는 그것을 진보신당의 패착이라고 하고, 혹자는 서울 시민의 준엄한 선택이라고 한다. 과연 그러할까
개인적으로 이번 선거의 가장 큰 발견은
강남불패의 확고한 재발견으로 규정하고 싶다는 생각이다.
기존의 강남불패와 비교하여 더욱 놀라워진 것은 단순한 강남 불패의 신화가 아니라,
강남의 확대와 재조정이라는 역학적 강남구조의 변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서초구 일부의 이탈과 강남구의 재결집
그리고 강남의 아류로 불리웠던 지역들의 강남화 열망의 정치적 발현
이러한 구조를 가장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강남구와 서초구의 구청장 선거가 아닐까.
강남구는 기존의 구청장을 배제하고 강북구 부구청장 출신의 여성을 후보자로 내세웠다.
강남구민들이 무엇을 원하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 있었는가 싶을 정도의 무모한 공천이었던 것이 사실이다.
현구청장인 맹정주 후보의 경우, 이렇다할 비리도, 실정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공천을 받지 못했다.
과거 강남의 지형적 조건이 한나라당에서 깃발만 꼽으면 된다는 정서에 힘입어 그동안 전혀 이렇다할 이슈를 만들어내지 못한 구청장을 갈아치워야 한다는 논리가 가능할지 모르나, 이는 강남구민의 needs가 무엇인지 모르는 처사다.
강남구의 구청장에 대한 구민들의 요구는 매우 간단하다. Let it be.
그냥 내버려 두라는 것이다. 충분한 재정과, 충분한 지지를 보내줄 터이니, 아무것도 하지만고, 그저 심심풀이 놀이 하듯 그 돈 가지고 알짱거리되 방해하지 않는 구청장을 원한 것 뿐이다.
강남이 지하철을 원하는가? 아니다.
강남이 특목고를 원하는가? 아니다.
강남이 격차해소를 원하는가? 아니다.
충분한 재정을 쥐어주니 아무것도 하지 말아달라는 것 외에는 없다.
이런 실정에 맹정주 전 구청장이 한 일이라고는 이렇다할 치적이 없을 정도로 조용했다(이건 내가 강남구에만 20년 넘게 살아온 경험이다)
결국 엉뚱하게도, 이 지역의 공천은 강북구 부구청장 출신의 신연희 후보가 받아버렸다.
실제 강남의 정서상, 강북구에서 훌륭한 일 많이 한 사람의 출마는 한나라당의 엄청난 패착이다.
강북에서 하던 짓 하면?
강북에서 ㅅ하던 것처럼 주민들 대하면?
강남은 그런거 못참는다.
아무리 혁신하고 개혁해도 싫은 건 어쩔수 없다는 것이 강남구다.
지금 불편해 보여도 그건 니들이 차가 없어서 불편한 거고,
아무리 없어보여도 여기 땅 한평이 니들 땅 100평보다 비싼 건데,
그 윗동네에서 한 경험은 물로보인다.
그런데 당선되었다. 신연희 후보가.
공약은 과연 주효했을까?
(나 조차 보지 않은 공약을 무슨 검증....)
아니다 뻔한 공약이었다. 뻔한.
1. 교육명문구의 위상을 더욱 높이겠습니다.
-> 사교육 만세 삼창을 하시겠다는 거다. 묻지말자.
2. 강남구의 자존심, 행복 복지로 돌려드리겠습니다.
-> 어짜피 관심 없다. 이미 잘 살고 있으니까내 복지는 내가 한다.
3. 강남구 주거환경 개선 사업, 주민의 의사를 존중한 주민참여 방향으로 풀겠습니다.
-> 재개발 만세
4. 강남이 서울의 경제를 강력히 견인하고 문화관광의 중심지로서 실질적 역할을 수행할 수 있는 미래 도시기반을 조성하겠습니다.
-> 관심 없다.
여기저기 노후화된 부자 아파트 재개발 할 수 있게 하고, 집값을 지켜주어 다른 동네 애들이 부러워 하도록 만듦과 동시에,
개포동 학원가의 활성화를 통한 명문대 입시 성공을 이룩하고 남는 돈으로는 남들 다 하는 복지와 경제개발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땡큐.
그런데 당선이다.
1. 재건축 마무리를 통한 명품도시로의 재탄생
2. 최고인재를 키우고 평생학습의 장이 펼쳐지는 대한민국 제1교육도시 강남
3. 재래산업과 미래 지식산업이 함께 발전하는 강남 실현
4. 아름다움과 쾌적함이 함께 하는 제1 웰빙도시 건설
5. 보육과 경로시설이 풍부하고 안전한 도시, 강남 실현
위의 신연희 당선자 공약을 좀 더 노골적으로 풀어보았다.....가 아니라 맹정주 후보의 공약이다.
재건축이라는, 교육도시라는, 좀 더 노골화된 표현 이외에 달라지는 건 없다. 그게 그거라는 소리다.
게다가 맹정주 후보는 무소속으로 출마하며,
당선 후 주민들이 원하는 당으로 가겠다는 웃긴 공약까지 내세웠다.
그럼에도 그의 공천탈락이나 낙선이 의미하는 바는 뭘까.
신연희 후보가 강남 주민들의 정서나 정치적 관심에 그다지 부합하는 후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당선되었다는 사실은
강남에서는 개가 아니라 무엇을 가져다 놔도 한나라당이 당선된다는 사실이다.
그러한 효과는 서울 시장 후보의 표 쏠림에서도 드러난다.
무상 급식 따위가 표를 좌우할 정도의 관심을 끌 수도 없는 것이고,
(이 동네는 너가 굶는 건 관심도 없다. 무상 급식 그거 얼마나 든다고. 그거 하면 되는 거다. 서울시와 상관 없이 강남구는 그냥 하면 된다)
아무튼, 전체적인 표의 향방과는 관계없이 강남의 극소수 존재한다고 알려진 좌파들은 뻥한 가슴 부여잡고 4년 더 살면 될까
아니
우리는 그냥 살면 된다.
어짜피 새 구청장도 별로 할일 없다는거 알고 있으니까.
다만, 서울 시장의 향방을 우리가 갈랐다는 사실에 위로 내지 비난 받으며 살면 그만인 것이다.
그래도 우리의 집값은 국내 최상위권을 유지할테니 말이다.
이미 이명박 정부에서 계획된
수많은 건설붐은 강남에서 역시 꽃피울 것이고,
신연희 구청장은 손안대고 코풀기 식으로 그냥 남은 돈으로 심시티 하듯, 위룰 하듯 놀다 가시면 그만인 것이다.
서울 시장 선거에서는 더 의미가 놀랍도록 확실하다.
엎치락 뒤치락 하는 선거 판세를 비웃기나 하듯, 전체 평균에 비해 엄청난 표차의 강남선거 결과를 보라.
< 개표 결과 보기 >
물론 35% 정도의 한명숙 득표는 엄청난 결과다.
하지만, 전체 표차를 확고하게 뒤집어버린 그들의 힘은 여전하다.
이전 공정택의 당선에서 보았듯이, 강남이 이미 서울을 지배한다.
무상급식이니 하는 따위의 아랫것들이나 도와주자는 공약가지고는, 노무현 향수와 같은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건
들리지 않는 공허한 외침일뿐.
아무것도 해 놓은 거 없는 오세훈이 당선되는 것을 보면, 역시 강남이다 싶을 정도다.
진보신당이건, 민주당이건
다 놀아났다는 것 밖에는 없다.
유권자 수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수 많은 자본주의에 특화된 레세뻬族들을 바꾸지 못한다면 그들에게 서울에서의 승산은 없다.
서울에서 승산이 없으면 경기에서 승산이 없고
나아가 대한민국은 변하지 않는다.
진보의 가치가 얼마나 옳은 것인가를 주장할 시기가 아니라,
보수의 가치가 얼마나 확고한 것인가를 깨우치는 선거가 되었길 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내가 겨우 기억을 하는 어렸던 시절. "반노"라는, 아직도 그 뜻을 모르겠는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때였다.
이제는 그 내용도 기억나지 않지만, 출간되자마자 음란성과 통속성으로 한국 문학계의 큰 반향을 일으켰다하는 그 책에 대한 평가를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은,
미카엘 엔데의 처녀작인 "꼬마친구 짐크노프"라는 책을 읽었을 때였다. 상상력과 꿈이라는 진부한 희망을 알게 해 준 그 책을 읽으며 또 다시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세번째로 그렇게 생각했던 것은,
김종찬이 나오는 김홍신 작가의 인간시장을 읽었을 때였다.
글이라는 것이 어떻게 사람의 생긴꼴을 결정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대학에 가서,
"스펙타클의 사회"라는 기 드보르의 책을 읽으며 또 다시 글쟁이가 되고 싶었다.
이미 글쟁이라는 말은 소설가가 아닌, 글을 쓰면서 그 존재 형식을 결정지을 수 있는 지식인이라는 위치에 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블로그나 트위터 처럼 글과 말을 통한 소셜네트워크의 진화를 보며
또 다시 글쟁이가 되고 싶어졌다.
글을 써서 먹고 사는 지식소매상이 아니라,
글을, 말을 하며 그 생존성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되고 싶어졌다.
바쁜 일상에 블로그는 내팽겨쳐지고 이젠 할 말도 남아있지 않은 사람이 되어버렸지만,
여전히 나는
글쟁이가 되고싶다.
그것이 글, 말, 또는 사진으로 표현되더라도,
종이에, 아니면 net에 내 글이 남겨지더라도
내 존재형식은 인간이로되, 그 존재가치는 내가 남겨둘 나의 말과 글로 남는
물론 한주호 준위의 업적은 무공훈장을 받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따져봐야 할 것은 과연 그가 그 훈장을 받아야 하느냐는 것이다. 해군의 그리고 국방부의 충분한 사고대응을 위한 지원만 있었더라도(감압챔버만 더 준비했더라도, 드라이슈트만 있었더라도) 살릴 수 있었던 군인이 왜 죽었는가 하는 문제에는 해군과 국방부는 왜 침묵하는가 말이다.
이번 일로 인해 이런 훌륭한 군인들의 명예가 높아지도록 정부가 나선다는 것은 옳은 일이로되,
이런 식으로 정부가 죽은자에게 말없이 던지는 훈장 쪼가리 던져주고는 내 할 일을 다 했다는 듯이 구는 꼴을 보일까 걱정이다.
또 누군가 이렇게 국가와 전우를 위해 목숨을 바치려 뛰어들었다가 당국의 무책임한 작태 때문에 생명을 잃고도
훈장으로 모든 것을 무마 하려는 무책임이 더 이상 발생할까 걱정이다.
훌륭한 군인에게 그에 맞는 대우를 해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런 불행한 일이 다시는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어떤 군인도,
어떤 대원도
훈장을 받기위해 목숨을 바치지 않는다.
그들이 목숨을 바치는 건, 무엇이 소중한 것인가 정확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을 죽게 내버려둘 권리가 정부에는 없다.
훈장의 훈격을 높이는데 신경 쓸 것이 아니라 이런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지,
이제와서 훈장 줘서 어쩌겠다는 것인가.
최근들어 블로그가 뜸해진 이유는, 내가 바쁘다는 핑계도 있지만,
최근의 메타블로그의 행태 때문이기도 하다.
대다수의 파워유저들은 어쩌면 트위터로 옮아간 것 같고,
최근의 메타블로그는 어디서나
한개의 큰 축은 아이폰과 안드로이드 일색,
거기에 또 한 축은 직업정치인들의 선전용(광고용도 아니고, 아직 선거용도 아닐테니) 브롤그로 도배된 듯 하다.
그나마 생활의 소소한 일상은 담은 블로그들은 메타블로그에선 그 기세에 밀려
가뭄에 콩나듯 보여지는게 전부.
아마 트위터가 더 활성화 되면 이런 현상도 가속화되겠지.
아무래도 나도 곧 트위터로 갈아탈 듯 하다.
숨가쁘게 일주일의 노동을 마감하는 22일 금요일 저녁. 아내와 TV를 보다가 경악스러운 프로그램을 하나 보게 되었다. KBS에서 방영하는 스펀지2.0 이라는 프로그램. 워낙 오래된(?) 프로그램이고, 아마도(예상컨대) 시청률 역시 만만하게 나오는 프로그램이니 그다지 주목받거나 하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나 역시 이런 류의 프로그램을 즐겨보지는 않으니, 그 시간대에 집에 있었다는 것이 우연일 뿐, 그다지 눈에 힘 주고 보는 프로그램은 아니다.
우리 대통령의 사생활은 깨끗할까
무심코 채널을 돌리다가 스펀지를 보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코너가 있었다. '무심코'라고 한 것 처럼 아무 생각 없이 보다가 뒤통수 맞은 기분이 이럴까. 그날의 코너를 보다가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의 사생활"이라는 끔찍한 짓을 시사 교양 프로그램도 아닌 오락 프로그램에서 돌리고 있다니.
정보와 지식이 합쳐진 고품격 정보 버라이어티라는 소개가 무색하게도, 마치 전두환 시절의 3S 정책 처럼 우민화 정책에 한 몫하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것 아닌가 하는 우스운 걱정이 앞섰다.
그 날 대통령의 사생활 코너에서는 임기중에 음반을 발매한 인도네시아의 '수실로 밤방 유도요노' 대통령, 자국 축구 1부리그에서 활약중인 볼리비아의 '모랄레스'대통령, 수중 각료회의를 연 '나시드' 몰디브 대통령 등등이 소개되었다. 마지막에 나온 것은 위의 기사에 따르면 전직 역도 금메달리스트라는 나우루의 '마르쿠스' 대통령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것은 보지 못했고, (사실 진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봤는데, 왜 못봤는지 모르겠다. 편집인가...) 마지막에 소개된 것은 쌍동이 정치인으로 유명한 폴란드의 레흐 카친스키 대통령과 총리에 관한 내용이었다.
이런 저전 잡설은 냅다 집어치우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자.
1.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형제지간이다. 그러니까 한 집안의 두 아들이 둘 다 정치인이다. 이게 사생활이냐?
2. 형제가 둘다 집권자라는 사실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래, 안된다고 하지만, 그것은 그만한 능력이 있을 때 얘기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 없는 소리다.
4. 뜬금없는 대통령 스토리는 뭔가. 우리는 인도네시아 대통령이나 몰디브 대통령에 대한 스토리는 관심이 없다.
언론이 정권에 장악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는 이미 우리는 5공에서 봤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를 막기 위해 난리치는 국민이다. 땡전뉴스도 봤고, 그 전에 박정희 대통령 각하의 위대한 영도력 아래서 제한된 TV와 신문으로 보며 길고 긴 어둠의 터널을, 신문지로 덕지덕지 발려진 그 터널을 달려왔다. 그래서 우리는 언론이 정권의 손아귀에 들어가는 것을 막고자 하고 있다. 그러나.
이번 정권이 언론의 장악을 위해 그 난리를 치는 것은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 이미 알 사람은 다 아니까. 그런데, 뉴스에서 이렇게 나불나불 떠들어 대면서 우리가 언론 장악했어요 하는 짓은 너무 뻔하다고 생각한 것일까? 아니면 이미 식상했다고 느끼는 것일까?
이명박 정권에서는 오락프로그램을 장악한다. 이미 무한도전이나 빵꾸똥꾸 사건에서 보는 것과 같이 시사프로그램의 장악이 어렵다는 사실(아마도 너무 눈에 빤히 보인다는 점 때문이겠지)을 간파하신 이 정권께서는 오락프로그램 건드신다.
사실. 아마도 이명박 정부에서는 오락프로그램에 대해 일언반구 논평하실 게 없으실 거다. 장악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생각해 보자.
동네 깡패들 중에서 가장 하수들이 하는 짓이 바로 삥뜯기다. 지나가는 꼬마 불러다가 삥뜯어내시는게 주 업무요 그게 하수다. 이런 하수 급의 양아치들이 성장하여 동네를 완전 장악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 '알아서 바친다' 동네 꼬마들이 알아서 보호비 명목으로, 세금 처럼 모아서 바친다. 물론 오른팔 정도 되는 꼬봉이 그 돈 수거해서 가져온다. 재미있는 것은 이럴 경우에 경찰도 별로 어찌 할수가 없다. (어쩔 수 없다기 보다는 어쩔 수 없는 경우가 많다) 돈을 내라고 한 것도 아니고, 때린 것도 아니고, 살살 꼬드긴 것도 아니고, 협박한 것도 아닌데, 어쩌라고? 지들이 주는데 어쩌란 말이냐? 날 잡아잡수 하며 스스로 껍질 까고 있는 쏘세지 안먹으라고?
장미란 앞에서 사과박스 들다 허리부러지는 소리하고 있네.
알아서 알아서 귤껍질 까고 입에 넣어주는데 안먹는 놈이 병신이다. 방송도 똑같다.
스펀지는 그러고 싶은 의도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알았으니까 닥치고, 왜 하필이면, 대통령의 인간적인 모습을 소개하면서 왜 형이랑 동생이랑 둘 다 정치하고 있는 그 동네 얘기 해 주시느냔 말이다. 그건 사생활도 아니고, 그나라의 정치상황이다. 우리 동네 상득이형과 명박이 동생은 전혀 딴판이니까 웃기지 말자. 상득이 형님께서는 동생이 대통령이라 물러나려고 하신 분이시던가? 못나간다고 사지 뻗어 버티시던 분이다. 아직도 건재하시고 말이다. 그분은 상왕(上王)이시니까.
언론 장악보다 더 무서운 것은 언론이 알아서 기어다니는 짓이다. 무서워서 퍼떡 드러누워 배 내밀고 이렇게 기어다니는 언론. 그런 언론이 어떻게 되는지 내가 말해주마.
10년 후 20년 후 우리 언론이 이명박 정권에 살랑거리는 것이 옳지 못했다고 누군가 일갈할 때, 지금 스펀지를 만들던 누가 그것을 반성할까. 나는 안그랬어요 하며 반성하지 못하고 우리의 친일파 청산 처럼 역사에 맞긴다느니 어쩔 수 없었다느니 하며 개거품 물고 변명하며 나는 죄없네 하고 빠져나갈 것이다. 그들은 아무도 책임지지 않을 것이다. 왜곡되어버린 우리의 현대사를 전달하지 못한 책임은 이명박에게 짊어지게 한 채, 자신을의 손을 씻으며 예수를 죽였던 본디오 빌라도 처럼 그들은 발을 뺄 것이다. 그 언젠가 친일파 들이 그랬던 것처럼 다시 언론을 움직이는 원로로 남을 것이고 우리는 그런 언론인들의 후예를 계속해서 우리의 언론이라 믿고 의지해야 하는 불행한 민족이 될 것이다.
그럴 것이다.
알아서 기는 소극적이지도 못한 비열한 배신자들.
나서서 때리지도 못하는 비겁한 박쥐들
우리 언론은 스스로 그렇게 되려는 지도 모른다.
아니라면 벌써 그렇게 되었거나.
(덧붙이자면, 앞의 신문에서의 프로그램 내용과 실제 방영내용이 다른 이유는 아마도, 이상득과 이명박을 위한 막판 뒤집기 쑈였을 가능성이 크다. 언론에 흘리기는, 아니 미리 편집된 내용에서는 그런 얘기 할 필요도 없고 하고 싶지도 않았지만, - 쌍동이라는게 뭐 그리 사생활이고 인간적이라고- 막판 경영진에서는 뭔가 꼬리를 치고 싶었을지 모른다. 더럽게도 말이다)